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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완 May 05. 2023

독서에 대한 고백

    

젊을 땐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인문학을 전공해서 책을 읽는 일이 학업이기도 했지만

역사와 철학을 좋아했기에 관련 책을 구입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어려운 책이라도 일단 무조건 읽었습니다.

활자를 모두 읽어내는 일이 의무였고 이해 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레벨 업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누가 물어보면 "아, 나 그 책 읽었어."라고 대답해 주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독서의 양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생활에 여유가 없고 가족 부양의 책임이 생기면서

독서를 취미로 하기에는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99%는 게으름입니다.


여유가 생겨도 책을 보기보다 영화, 드라마 시청이나 웹 서핑으로 이어집니다.

최근에는 영화도 느긋하게 즐기지 못합니다.

인생을 즐기는 행위에도 귀차니즘이 찾아오는 시기,

빨리 돌려보거나 누군가의 리뷰로 시청을 대신하곤 합니다.


삶이 그러할진대 독서의 시간은 더더욱 내 공간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핑계를 대자면 시대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책은 우리 모두가 읽지 않는다고 말해야 맞는 것 같습니다.

10년 전에만 해도 지하철, 버스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신기할 정도이니까요.


물론 독서의 도구가 달라졌다고 하지만 가독성이 떨어지는 만큼

깊이 읽고 사색하기에는 종이에 담긴 먹색 잉크에 비하면 부족함이 있습니다.

역시 문장을 곱씹으며 지식과 정보를 두뇌에 각인시키고

심장 박동에 따라 감정의 흐름을 영혼 깊숙이 밀어 넣기에는 

여전히 책이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합니다.


알면서도 독서는 점점 어려운 숙제가 되어 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마음은 조급해지고 책을 펴는 행위조차 여유롭지 못합니다.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대충 내용을 지레짐작하고는 덥어버리곤 합니다.

인생의 경험이 늘었으니 책이 말하는 이야기도 다 안다는 교만함 때문이겠지요.






아내와 자주 찾는 집 앞 카페에는 거의 매일, 늦은 오후에 가면 노 부부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일흔은 훌쩍 넘기셨을 것 같은 부부는 그 시간이 되면 차 한잔씩 드시면서 말없이 책을 읽으십니다.

매번 뵐 때마다 책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 정말 열심히 읽으시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은 제법 오랜 시간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에게 주어진 책에 집중하십니다.

항상 우리 부부가 먼저 일어났었는데 하루는 두 분이 먼저 일어나셨습니다.

일어나시기 전, 노 부부는 책을 덮고 짧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셨고

잔을 치우신 뒤 책을 손에 든 채 카페를 나섰습니다.

가방도 없이 서로가 읽을 책만 들고 오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너무 멋있다고 아내에게 고백했습니다.

아내는 우리도 그렇게 늙어가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좋은 생각이었지만 왠지 그럴 자신이 없었습니다.

내 인생의 황혼을 상상하면 매우 분주하고 어수선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책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책 속에는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만드는 마법이 숨겨져 있습니다.

책을 읽는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그 긴 시간 나는 더 긴 시간을 여행하고 나올 수 있습니다.

이집트의 5천 년 역사를 삼일이면 여행할 수 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혹한 시간을 단 하루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이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우주의 끝을 만날 수 있고

누군가 30년을 넘게 고민한 철학적 사유를 하루 이틀이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수록 더욱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았습니다.

몰라서 안 하는 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알고도 안 한다면 바보라고 해야겠지요?


이제 다시 시간을 거스르는 여행에 동참하려 합니다.

여전히 독서를 삶의 일부로 살고 계시는 선배님들의 고백은 응원으로 듣겠습니다.

늦은 고백에 솔깃한 마음이 생기셨다면 오셔서 함께 걸어도 좋습니다.

황혼이라 생각하시면 더욱 함께 해야지요.

남은 세월을 천년처럼 살 수 있는 비밀인 걸요.


나는 앞으로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동경하며 아날로그와 비 효율을 채우겠습니다.

쓰고 보니 앞으로도 게으르게 살겠다는 다짐 같네요.

원래 게으른 사람이었지만 책으로 인한 게으름이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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