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대학에 입학한 진수의 첫 학기는 최악이었다.
전공은 국문과, 수능 점수에 맞춰 학교를 선택하다 보니 정해진 학과였다. 딱히 희망하는 학과도 없었던지라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적당히 친구도 사귀면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은 생각했던 것과 많은 것이 달랐다. 수업 내용부터 학교 생활까지 스스로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일 투성이다.
글을 써본 적이 없던 진수에게 국문과는 좀처럼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한 달에 책 한 권도 읽지 않는데 국문과가 쉽게 적응될 리 없었다. 반수도 생각해 보았지만 군대를 다녀와야 하는 시간을 계산하면 편입이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열심히 하면 복수전공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마음을 잡아본다.
무엇보다 친구를 사귀기가 너무 힘에 부친다. 대부분 여학생인 점도 그렇지만 동기들의 취미나 사고방식이 고등학교 때와는 너무나 차이가 난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타쿠라고 놀림받기 일쑤인 아이들이 이곳에서는 과 대표를 하고 있고 동아리 활동에 열심이다.
그래서 대학, 대학 하는 가 싶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하나의 교복에 같은 과목을 공부하고 동아리 활동이라 봐야 형식적으로 분류되어 있었을 뿐 서로 다른 생각을 나타낼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학교 내에서 인기 있는 친구들이나 힘깨나 쓰는 친구들이 중심이 되었고, 공부 좀 하는 애들은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잠깐 모여들었다가 시험이 끝나면 각자의 생활로 흩어졌다.
고등학교 때 진수는 나름 인기 있는 편이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적당히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과 고등학교는 분위기가 다를 거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학교 생활에 자신이 있었던 터라 적응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학기 내내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아리 연합 행사에서 뜻밖의 친구를 만났다. 중학교, 고등학교 6년간 같은 학교를 다녔던 동창이었다. 같은 동네에서 살다 보니 인연이 깊은 친구였지만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 동네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칠 때면 눈인사 정도 나눌 뿐이었고 친구들과 모여 있을 때는 그냥 모른 척 지나친 친구였다.
"너. 정우? 정우 맞지?"
"응, 어떻게 알아보네."
"야, 여기서 너를 만나네 어떻게 이 학교를 다녀?"
"어떻게 다니긴 합격했으니 다니는 거지."
"푸하하, 너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
"농담 아닌데, 너야 말로 어떻게 이 학교 들어왔냐? 공부 안 하는 것 같더니."
"막판에 좀 열심히 했지. 쨔식, 모른 척해 그냥 모범생이었다고 기억해라. 그런데 넌 무슨 과냐?"
"응, 전자 공학"
"아 맞다 너 이과였지?"
진수는 정우가 이과였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인사치레로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할 뿐이었다.
"너는 문과였던 것 같은데 무슨과야?"
정우의 질문에 진수는 한 숨을 쉬며 대답한다.
"나는 국문과야. 미치겠어 적응 못해서. 언어영역 잘 봐서 잘 맞을 줄 알았는데 맨날 책 읽고 과제 제출하다 보면 일주일이 다 간다."
"나는 끔찍하겠지만, 국문과 갔으니 열심히 읽고 써야지 뭐. 수고해."
짧은 대화를 마치고 일어나는 정우에게 진수가 따라가며 계속 말을 건다.
"야 어디가? 이렇게 만났는데 한 잔 하러 가야지."
"나 동아리 부회장 맡아서 행사 진행해야 해. 나중에 한가하면 한 번 보자."
그렇게 한 마디 남기고는 진수의 눈앞에서 멀어져 갔다.
'햐, 저 찐따 같던 녀석이 제법 멋있어졌네. 아니지? 신입생이 부회장을 맡아?' 진수는 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묘한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며칠 뒤, 진수와 정우는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안 그래도 연락처를 주고받지 못했던지라 다시 볼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대학도 별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금세 만날 수 있었다. 진수는 정우에게 연락처를 물었다. 정우는 연락처 대신 뜻밖의 대답으로 진수를 붙잡았다.
"됐고, 우리 2층 로비에서 커피나 한 잔 하자."
진수는 남자끼리 뭔 커피인가 싶었지만 더 반가워하는 사람이 을이지 않나 싶어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2층 로비에는 자판기 하나와 학생들이 앉을 수 있는 벤치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래 난 이런 곳이 어울린다 이거지?'
진수는 은근 섭섭한 대접에 약이 오르는 기분이다. 정우는 진수에게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취향도 묻지 않는 정우가 얄밉게 느껴졌다.
"그냥 먹어. 학교 생활은 할 만하냐?"
속 마음을 들킨 게 미안한 지 진수는 슬며시 웃어 보이며 커피를 삼켰다.
"모르겠어. 생각보다 재밌지는 않네."
"아무 생각 없으면 재미없는 거고, 뭔가 계획이 있으면 재미있는 거지."
"그래서 너는 뭘 하는데?"
"공부하고, 동아리 모임 하고, 소개팅도 하고......"
"너 여자도 만나?"
"국문과는 여자들 천지잖아. 우린 반 강제로 만나지 않으면 안 돼."
"네가 사람 구실은 하는구나. 나는 여자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날 학교에 적응시켜 줄 선배가 필요해."
"과 선배는 없어?"
"응, 남자 선배들은 대부분 군대 갔고, 여자 선배들은 아무래도 좀 어렵고... 그렇지 뭐."
"오히려 네가 너무 튀는 거 아니야?"
"내가? 왜 난 아무것도 안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튀는 거지. 대학은 스스로 뭔가를 해야 하는 거라고."
"아~ 몰라. 이렇게 인생이 힘든 건 줄 몰랐다. 그냥 가만히 있어도 친구들이 모여들 때가 좋았지. 지금은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야."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정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다 큰 성인들이 모였는데 인간관계가 억지로 만들어지겠냐? 놀이터만 가면 알아서 친구가 생기던 그런 시절은 이제 없어. 그런 고민하지 말고 그냥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그게 뭔지 몰라서 그러는데 어떡해?"
"네가 지금 하고 싶은 걸 하라고. 공부를 하던가. 열심히 놀던가. 동아리를 하던가. 아니면 연애를 하던가."
"그게 다야?"
"우리에게 그거면 충분하지 뭐가 더 필요하겠어? 단순하게 생각해. 대학만 가면 알아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는 1년 만에 전혀 다른 세상 앞에 서게 된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 여전히 공부하지 않으면 뒤쳐지고, 시험은 계속되고, 미래에 대한 고민도 심하면 심해졌지 해소된 건 하나도 없어."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을 뿐인데 왜 이렇게 겁을 주냐?"
"우리가 알 던 평범은 누군가가 짜 맞춰준 삶이야. 진짜 내 삶은 지금부터 내가 만들어 가는 거라고."
진수는 살짝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원래 진지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진지한 녀석임을 알고 나니 더 무서워졌다.
"모르겠어. 아직은 너처럼 내 인생을 설계해 나갈 용기가 안 생기네."
"사실 나도 몰라. 전공이 나에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데 어떻게 대학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해?"
"모르니까 일단 가는 거야. 그러다 아니다 싶으면 돌아가면 되잖아.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면 이 길이 맞는지 틀린지도 알 길이 없어. 너무 잘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진심으로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특별해져 있지 않을까?"
"이과는 다들 이렇게 고차원적이냐?"
"아니 단순한 거지. 주어진 조건에서 Yes 나 No를 빨리 선택할 뿐이야."
"정우야. 솔직히 말해봐. 너는 내가 대학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냐?"
"나야 모르지.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우리는 그저 하얀색 양말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흰 양말?"
"평범한 색이거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데 생각해보면 평범하게 어울릴 수 있는 것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있을 때 해당되는 거지. 개성이 강한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 더 눈에 띄는 것처럼. 검은 옷이나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면 흰 양말이 가장 눈에 띄게 마련이거든."
진수는 뭔가 멋진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에 와닿지 않는 기분이다.
"저기 있잖아. 초등학교 5학년쯤 되는 애한테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다시 말해봐."
"너 그래서 졸업은 할 수 있겠냐?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야. 새로운 환경을 만들 수 없다면 네가 적응하는 수밖에 없어. 고등학교 때 분위기가 그리우면 그 시절 너의 색으로 칠해보던가 아니면 대학에 맞춰 너의 색을 바꿔보던가."
"색을 바꿔라? 오~ 멋진데? 넌 뭐하러 이과 갔냐? 철학과 갔으면 딱이었겠네. 소크라테스가 울고 가겠다."
"요즘은 멀티 버스의 시대야. 이과도 인문학 모르면 뒤쳐진다고."
진수는 대충 이해할 수 있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정우의 한 마디가 명문이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진수는 사실 대화 내용의 절반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 싶은 궁금증이 생겼다. 아무래도 좋다. 오늘은 친구와 인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내디딘 기분이 든다.
서로의 대학생활을 응원하기로 의기투합한 후, 도서관을 나와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불안한 마음이 절반은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문관으로 향하는 도중에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 이 자식 또 전화번호 안 가르쳐줬네. 뭐, 또 열심히 다니다 보면 다시 만나겠지?'
너무 진지한 내용의 소설만 쓰다 보니 조금 가볍고 편안하게 읽을 내용을 써 보려고 했습니다. 막상 써 내려가다 보니 가벼운 글이 더 어렵게 느껴지네요.
올해 대학에 입학한 큰 아들 녀석을 생각하면서 그려본 소설입니다. 성인이 되면 한 짐 내려놓게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이 더욱 커집니다. 누군가 육아가 가장 힘든 때가 언제라고 물었을 때 '지금'이라고 대답한 답변이 떠오릅니다. 자녀를 키우는데 마음 놓이는 시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부모님도 같이 늙어가는 제 모습을 보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성인이 된 아들이 어떻게 사는지 부모가 알 수 있는 영역은 점점 줄어들어 갑니다. 알아서 잘 살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비워봅니다. 그맘때 아이들이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관계에 대한 고민부터 미래에 대한 고민까지 수험만 바라보며 달려온 아이들에게 밀려오는 고민은 빛나는 청춘의 시절을 어둡게 만듭니다. 청년들의 고민을 청년들의 이야기로 풀어내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쓰다 보니 꼰대 같은 감성도 드러나네요. 노땅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평생 에세이에 최적화된 글 만 써 왔는데 뜻하지 않게 소설이라는 장르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소설을 쓰는 재미가 있습니다. 마음대로 끄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제 안의 욕망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재미는 없을지라도 시간이 아까운 글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모한 도전은 조금만 더 이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