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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민 Oct 31. 2023

그리운 계절

다정한 이름의 계절

 옛날이야기는 워낙 까마득해서 헤집어 꺼낸 생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겠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나를 더 구체화시키고자 적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학교 때는 워낙 이사가 잦아서 정 붙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쩌다 나와 비슷한 소꿉놀이 친구와 정분을 쌓다 보면 어느새 이사 갈 날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상황이 싫었지만 엄마에게 내색한 적은 없었다. 그때의 엄마는 나를 돌아볼 만큼의 여유도 따뜻한 시선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중학교 입학식날 체크무늬 교복을 입고 거울을 보니 새사람이 된 것 같이 기분이 좋았다. 걸어서 10분 남짓되는 골목과 골목사이를 지나고 널따란 큰 사거리를 건널 때면 사람들이 모두 나만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짧은 단발에 흰색 운동화 단정하게 내려온 붉은 줄무늬 스커트는 수줍게 바알 간 내 무릎을 덮었다.


 한편으로는 걱정을 했다.
"국민학교 친구들이 많이 가는 중학교로 배정받지 못하고 왜 하필 조금 더 먼 곳으로 되었지?"
나를 아는 아이가 있나 없나 눈알을 굴리며 제일 안전해 보이는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여전히 친구가 없었던 나는 종이가 찢어져라 낙서만 해대고 있었다. 전 수업은 과학 시간이었는데 선생님 얼굴이 유난히 얼굴이 크고 수염이 덥수룩하니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반면에 국어 선생 님은 TV에 나올 법한 세련된 외모로 눈길을 끌어 공부가 쉬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부가 하기 싫어서 핑곗거리들을 찾곤 했던 터였다. 나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구부정한 모습으로 과학 선생님을 그리고 있었다.
  "야! 너 나랑 단짝친구하자! 일주일 동안 뒤에서 지켜봤는데 너 친구 없지? 나도 없으니까 오늘부터 도시락 같이 먹는 거 어때?"
별안간 사랑 고백이라도 받는 애처럼 멀뚱멀뚱 그 환한 미소의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민아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는 그런 나를 보고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쾌활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구김살 하나 없는 민아가 마음에 들었고 그날부터 민아와 밥을 같이 먹었다. 어떻게 이렇게 급속도로 가까워질 수 있는 건지 신기하면서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다.


 한 번은 민아가 집으로 초대해서 놀러 가게 되었다. 나 혼자서는 처음 타보는 버스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엄마는 내가 학교 가까이에서 다닐 수 있도록 거처를 옮겨 다니셨다고 했다. 나한테 해 준 것이 별로 없다는 엄마지만 나름대로 뜻이 있었고 때로는 과분했다.


민아의 동네는 낯선 것들로 나를 위축시켰다. 새로 만든 길이었는지 어쩐지 대구에 이런 곳이 있었는지 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좋으면서도 위화감을 느꼈다. 아주머니께서는 나를 무척이나 반기셨다. 민아는 수줍어하는 내 손을 얼른 잡아 이끌었고 나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 가볍게 움직였다.

"우리 민아가 집에 오면 민정이 이야기 많이 하던데, 고마워. 민아 친구가 되어 줘서."

 민아 엄마는 맛있는 다과를 내어 오시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셨다. 민아 방은 곳곳에 가족사진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고 방 안에 피아노와 침대 그리고 책상과 옷장이 들어갈 만큼 넓었다. 나는 그 크기에 짓눌려 잠자코 앉아서 달큼한 사과만 씹어 대고 있었다.


 민아는 얼마 전 영국에 다녀와서 산 인형과 엽서를 보여 주면서 내 생각이 나서 하나 더 샀다며 건네주었다. 그러고는 날 위해 피아노도 연주해 주고 그림도 그리면서 놀았는데 내 시선은 자꾸만 아기자기한 인형과 엽서에 꽂혀 있었다. 저것들을 들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당시 나는 순진해서 그런 것에 비교하거나 의기소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친구가 곁에 있음을 감사했다. 밥상 위에  책꽂이를 얹은 낡은 책장 한켠을 비우고 친구가 준 외제 인형을 올려 두었는데 왠지 어울리지 않았다. 주변을 더 예쁘게 꾸미고 정성을 들이고 나서야 제법 보기 괜찮았다. 엄마는 "지 책상 청소 한번 안 하면서 참 별일도 다 있다." 며 핀잔을 주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뿌듯한 경험이었다. 그 인형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텔레파시가 통한 것처럼 그립고 간절한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낙엽이 바스러지는 계절 가을, 하교를 하며 민아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나는 형식을 갖추어 초대라는 말을 쓰는 것이 쑥스러웠다. 자연스럽게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미로 찾기를 하는 것처럼 쌍둥이 같은 두 여학생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가득 메웠다.


 개 조 심!!

처음으로 손님을 데려왔는데 1층 주인집 개가 사납게 짖어 대며 우리를 맞이했다. 민아는 손을 흔들며 개를 달랬다. 좁은 마당에 냄새나는 바깥 화장실을 지나 조그마한 철문 앞에서 녹슨 열쇠로 문을 열었다. 방 한 칸에 엄마랑 내가 살고 있다는 소리를 몇 번 들었는데도 실제로 와서 보니 신기하다는 듯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민아는 그런 소녀였다. 분명 사는 형편이 다른데도 무시하거나 깔보는 언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했고 자기의 것을 기분 나쁘지 않게 나눠 주는 마음이 몸에 밴 소녀였다. 자신이 준 인형을 곱게 장식해 둔 것을 보고 민아는 예측할 수 없는 탄성을 질렀다. 나를 안아주며 연신 감동이라고 했다. 그 뒤로 해외에 다녀오면 일본 캐릭터의 스티커들과 유럽에 기념품들을 아낌없이 나눠 주던 사랑스런 소녀는 나에겐 선물이었다.


 중학교를 같이 졸업하고 훗날도 함께 꿈꿀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난 대구도 아닌 경기도 일산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그것도 나 혼자. 엄마가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외삼촌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나를 흔쾌히 맡아 주시겠다고 했다. 이사 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하얗고 통통한 민아 얼굴이 자꾸 떠올라 밤마다 베개에 눈물을 적셨다.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이번 이사는 나에게 혹독했다. 그때만 해도 휴대폰이 없어서 서로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곤 했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약속하며 꿈같던 지난날들을 회상했다. 그 후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서로가 뜸해졌다. 살다 보니 애틋했던 그 마음도 모두 내 것으로 챙기기가 벅찼던 모양이었다. 낙엽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는 계절이 오면 한없이 다정했고 예뻤던 소녀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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