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 예찬

용기가 필요한 쓰기

by 류민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면서!"

"네 마음이 어떤데?"

"나도 몰라!"


그럴 때마다 일기를 썼다. 내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말이 먼저 튕겨져 나올 때는 대부분 후회로 가득했다. 나는 왜 나를 표현할 단어가 부족했을까. 억울함이 있어서 말로 할라치면 눈물부터 쏟아져서 어버벅 거리며 누가 봐도 우스운 얼굴이 되곤 했다. 나는 세상 무너질 것처럼 서러워 우는 건데 내 앞의 어른들은 나를 보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어비가 운다~히히 코옆에 주름 봐라~ 아따, 고 신기할세."


어린 시절의 별명이 '어비'였다. 어벙하다고 어비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엄마가 말해 줬는데 사촌언니는 야시(여우)였고, 나는 착한데 착하다는 적절한 별명을 붙일 것이 없어서 어비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부터였는지 나는 친척들을 만나면 진짜 어벙해졌다. 어비야~ 부르면 돌아봤다. 이제는 안 그래도 되는데 지금도 만나면 어비가 된다. 그들의 과거에는 나의 어린 시절이 여전하다. 지금은 어비 아니라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말도 못 하는 나는 어비가 맞는 걸까?




어느 날, 잊혀진 서랍 속에서 먼지 낀 일기장을 손에 쥐었다. 오랜 세월 동안 열 번 남짓한 이사를 거치며 늘 소중히 사수해 온 것은 그 편지박스와 일기장이었다. 차곡차곡 모아 온 작은 기록들과 친구들의 목소리가 담긴 빛바랜 박스를 열어보면 그날의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진다. 때 묻은 종이에 잊혀간 이야기들은 잊고 지냈던 시간의 조각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편지들과 일기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감정에 복받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을 때 일기장에 기록을 했다.


'기쁜 일도 분명 많았었는데...'


일기장은 슬프거나 후회스러운 사건들이 빼곡하게 자리했다. 시간이 흘러도 내 곁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흔적들은 기억에서 지워진 과거의 나를 보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이야기

코미디 같은 글에 웃고 울며 미움과 증오, 시기심과 설렘이 지금에 와서는 웃음 띈 얼굴로 읽어보게 되니, 신성한 감정들이 차분하게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나의 외로움을 종이와 연필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까끌한 연필심 끝에서 흐르는 일기 속 내 목소리는 구구절절했다.



1995년 4월 26일 날씨 맑음

오늘이 가는 날이다. 속이 시원하다. 이것보다 지옥이 낫겠다. 나는 춤도 잘 못 추는데 언니가 좋아하는 것만 시키고 내가 못 추는 거 알면서! 시켜서 춤추면 비웃고! 내가 왜 어비고 언니는 왜 야시야? 차라리 야시가 낫겠네. 엄마는 언니의 진짜 모습을 모른다. 나는 잘못하면 사과하는데 언니는 웃으면서 아프냐? 한다. 언니 될 자격도 없는 나쁜 악마다. 거짓말쟁이! 심술쟁이! 먹보! 사치스러운 인간! 커서 도둑이나 돼서 머리 빡빡 깎고 교도소나 가라!


그때의 나는 심각했다. 어린 내가 속이 깊었던 건지, 성격이 그렇게 타고난 건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엄마도 다 알지~ 너 힘들었던 거"

말도 안 했는데 다 안다는 엄마. 일기장을 들킨 걸까?




혼잣말을 하고 일기를 쓰며 버텼다. 누군가에게 내 말이 굳이 닿지 않더라도 연필심 끝에서는 언제나 솔직할 수 있었다. 샤워를 하다 거울을 보았다. 내가 너무 불쌍해 보여서 더 많은 고통을 흘리려 애를 썼다. 억지스럽게 짠맛을 보았다. 눈물을 삼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물을 모두 쏟아내고 나서 치유되는 나를 발견했다. 눈물은 강렬했고 힘껏 쏟고 나면 마음의 딱지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 단단함이 나를 지키려 했던 이기적인 마음을 품게 된 것도 사실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종이 위에 마음을 흘려보내던 그날들을 떠올리면, 외로움을 견디던 내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단단해진 나를 만나게 된다.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들 사이에도 눈물 맺힌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은 우리가 감추고 싶은 약함이 아니라, 다시 꺼내어도 부끄럽지 않은 빛이 된다.


글을 쓰면서 더 생각하게 된 것은 글쓰기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시절의 내가 드러내어 생채기를 겪은 것처럼 두려움이 앞선다. 아무도 내 이야기에 관심 없지만 나의 관심은 피할 수 없다. 바로 내가 보고 있다. 그렇게 쓴 종이 위 짧은 이야기들은 머무르기만 할 뿐, 진짜 살아있는 이야기가 될 수 없었다.
펜을 잡으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건 어린 시절 쓰던 삐뚤빼뚤한 편지와,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몰래 적던 일기장이다. 그때 내 글은 그저 종이 위에 쏟아낸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다정함, 누군가에게 비친 나 자신의 솔직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른이 되어 문장 하나 다듬고, 수식어를 붙이려 할 때면 자꾸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마음 가는 대로 쓰던 반짝이던 시절들이 그리워진다. ‘좋은 문장’을 그리워하는 동안, 내가 처음 편지를 썼던 이유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편지를 쓸 때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도 있지만, 인정받기 위해 답장 없는 편지들을 그렇게나 썼다. 다칠까 두려워 숨겨둔 작은 상처들을 내가 달래주기 위해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불러낸 위안은 쓰기였다.


어비가 자라서 더 이상 어비로만 남지 않기 위해. 써야 한다. 나를 자세하게 들여다봐야 하는 글쓰기는 여전히 어렵다. 펜이 내 마음을 이끌어가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글자 위에서 마음이 폴짝폴짝 뛴다. 삐뚤어져도, 뒤죽박죽이어도 괜찮다.

글쓰기에 진심을 불어넣고 나를 믿어 보는 시간.

나와 타인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