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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Nov 24. 2021

엉망진창 서울생활

엉망진창이었다. 달리 무슨 표현이 있을 수 있을까. 좌충우돌? 아니, 그건 너무 약해. 천방지축? 글쎄, 너무 경쾌한 것 같다. 이건 엉망진창이 맞다.

영국에서의 유학 경험과 실무자로서의 경력이 있다고 해서 레드카펫 이라도 깔아 줄거라 기대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지난 시간에 대한 내 노력의 대가 쯤은 가지기 마련인데 그건 서울 도착과 동시에 산산히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다. 완전히 처음 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는 간단히 인사만 드리고 바로 서울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 연고가 전혀 없는 상경자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적당한 가격의 고시원을 찾아 그곳에 짐을 풀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녹록치가 않았다.

런던에서 이메일을 통해 입사했던 그곳은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생화 보다는 공간 장식등의 큰 프로젝트를 하는 곳이라 조금 안 맞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일 자체의 적응 보다는 서울 적응의 실패였던 것 같다. 2년여의 영국 생활이 외롭고 힘들었다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 일상에 무던하게 익숙해졌던 탓인지 초기의 서울 생활이 무척이나 어렵게만 느껴졌다. 이걸 ‘역향수병’이라 하던가. 외국 생활이 분명 외롭고 서글픈 점은 있지만 조금 더 여유로운 근무 분위기나 삶의 방식 때문에 바쁘고 정신 없이 흘러가는 서울에서의 삶이 더 고단하게만 느껴지고, 싫어서 떠난 그곳이 다시금 그리워지는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이다.

그래, 사람은 참 약았다 약았어.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은 것이 아니라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그렇게 낯설고 물설고 언어의 장벽 조차 있던 런던에서의 생활이 더 없이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아직은 비자의 기간이 남아 있는데 다시 돌아갈까, 아니면 일본이나 네덜란드 등 새로운 나라에서 도전을 해 볼까. 이런 저런 고민들에 불면의 밤이 깊었다. 그러다 살풋 잠이들면 익숙했던 런던의 거리와 그곳의 사람들이 꿈 속에서 까지 펼쳐지곤 했다. 그토록 서울에서의 처음이 힘들었다는 것 이겠지. 하긴 평생을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살아온 나에겐 서울에서나 런던에서나 이방인임은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나름의 서구식 라이프스타일이 익숙해졌던지 한국의 어마무시한 근로시간이나 불필요한 회식 같은 것도 참 피곤한 일이었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처음 해는 흐지부지 흘러갔다. 

이후 몇 해가 지나는 동안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런 애정 조차 생기지 않던 서울에서의 첫 직장을 나와 이것저것 다양한 일들을 시도했다. 아니, 저질렀다. 당시 자작나무에 인조 잎을 댄 인테리어가 유행을 하고 있었는데 이걸 팔아 보려고 샘플과 전단지를 만들어 카페나 식당 등을 찾아 다녔다. 나무꾼도 아니고, 자작나무를 진채 버스며 지하철을 타던 내 모습. 아, 정말이지 지금도 이불킥 감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지.

그 무렵 인터넷 쇼핑이 대중화되면서 인터넷으로 꽃을 판매하는 곳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 역시 이 분야에 발을 담그게 되었는데 처음엔 하나하나 샘플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는 재미가 나쁘지 않았다. 소소하게 하나 둘씩 꽃 상품이 판매되던 그때, (지금은 별 의미조차 없는) 화이트데이라는 큰 이벤트 시즌에 맞추어 꽃과 케익을 어마어마하게 준비하였다. 물론 대박을 기대하면서. 하지만 주문은 기대했던 절반의 절반에도 미치지도 못했고 배송되지 않은 케익은 이르게 풀린 날씨 덕분에 흐물흐물 녹기 시작했다. 우리는 기존 업체들이 사용하는 버터크림 케익이 아닌, 고급의 생크림 케익을 배송하는 것이 나름의 차별화였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화를 불렀다. 왜 여타 업체들이 녹기 쉬운 생크림 보다 맛은 덜하지만 단단한 버터크림 케익을 이용 하는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작업실 바닥에 흥건히 녹아내린 끈적한 생크림. 그 달콤한 냄새는 결코 달콤하지 않는 눈물 쩔은 짠내였다. 설상가상, 배송이 된 꽃과 케익들 조차 택배 트럭 안에서 엎어지고 뒤엉켜 항의 전화와 댓글이 빗발쳤다. 이건 다른 의미에서의 대박이라고 할까. 정말 대박 사건이었다.

꽃을 하면서 단 하나의 신념이 있다면, 절대로 꽃은 택배 배송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택배의 시스템이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진 지금이지만 이때 정한 나의 신념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바로 당시의 충격 때문이라 할 만하다.

이외에도 소모적인 일들은 계속 일어났다. 물론 당시엔 소모적이고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 또한 경험이라 하겠지만 당시에 겪은 좌절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열정과 열심이면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글쎄 그건 나의 기준에서 열정과 열심이었지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본다면 그건 그냥 삽질이었다.

아직 혼자설 준비가 되지 않았었나 보다. 배워야할 것, 경험해야 할 것이 아직은 훨씬 많았다. 다시 나를 추스려 가고자 하는 방향을 찾았다. 바로 호텔이다. 어쩌면 서둘러 서울에 오고 싶었던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 이었을 것이다. 대형 호텔에서 플로리스트로 일해 보는 것. 그건 처음 플로리스트라는 꿈을 가졌을 때 부터 꼭 해보고 이루고 싶었던 목표였다.

다시, 런던에서 일자리를 구했을 때 처럼 가고 싶은 호텔의 리스트를 만들었다. 서너군데 정도로 그리 많지 않았다. 역시나 무턱대고 찾아가기 보다는 전화를 걸어 채용 계획이 있는지 확인했다.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면, 외부로 공개된 직통의 전화번호가 없어서 호텔의 프론트로 전화를 하여 거치고 거쳐서 어렵게 연결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 그쯤이야.

몇 곳과 통화를 하던 중 한곳으로 부터 면접을 보러 오라는 대답을 들었다. 유선상이긴 하지만 나의 경력과 경험에 대해 열심히 어필을 했고 그쪽에서도 런던에서의 내 포트폴리오에 대해 관심을 가져 주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있었던 면접은 무리 없이 끝이나고 나는 다시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섰다. 꽃을 시작한지 햇수로 육년 혹은 칠년쯤의 시간이 지나서야 꿈꿔오던 곳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호텔 플로리스트로 일한다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적은 없다. 쉽게 이룰 수 없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한번쯤 가져봤던 기대고 희망이었다. 이제 드디어 무형인체였던 희망을 현실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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