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Dec 01. 2021

좋아하는 일을 하는 기쁨과 슬픔


완급을 조절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마치 그것은 팽팽한 첼로의 현. 조금만 더 줄을 당기면 원하는 소리가 나올 것 같은데 줄을 당기는 힘의 실패로, 잘못된 손의 악력으로 줄은 끊어져 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첼리스트는 악기에 귀를 바짝대고 조심히 조심히, 줄을 당겼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원하는 소리를 얻는다.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었고, 되었고, 이후 7,8년 쯤은 모든 열정을 쏟았다. 그리고 공황장애가 왔고 이후 2,3년 쯤은 아팠다. 그리고 그 후론 모든 것을 이겨내고 행복하게 살았냐고? 아니다. 그 아픔의 시간이 흐른 후, 플로리스트로서 나의 사업을 시작하였고 다시7,8년쯤 모든 것을 쏟았으며, 이후 다시 공황장애가 심해졌다. 플로리스트로 일하는 20여년간 두번의 긴 열정기와 함께 두 번의 짧은 아픔의 시간이 있었다. 이 병은 완치가 없다. 극복도 없다. 그저 나의 일부로 적절히 돌보며 조절하는 것 뿐이다. 이 조절을 잘 하면 일상에는 크게 무리가 없다. 하지만 오랜시간 무리하거나, 돌보기를 소흘히 하면 초대하지 않은 손님처럼 불쑥 곁으로 온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처럼 바른 길을 가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뒤집어져 있고, 뒤집힌 채로 한참 가다 보니 다시 원래의 길에 서 있다. 이 일을 직업으로 삼은 시간 동안 그렇게 환희에 찼다가 다시 부러지기를 반복한다.

첫번째 공황이라는 예기치 않은 증상이 찾아 온건 ‘욕심’ 때문 이었다. 꽃으로 성공하고 싶은 욕심. 목표를 정하고 이를 정복하듯 선망하는 곳, 유명하다는 곳으로 옮겨갔다. 이후 그 끝에 닿았을 때는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두번째는 ‘불안’이었다. 플로리스트로 십여년을 일한 무렵 드디어 나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공간을 얻고 꾸미고,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나의 색을 입혔다. 감사하게도 노력은 통했고 그곳을 찾는 발길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운영이 7,8년쯤 되던 그때 언제까지 잘 될지, 언제까지 잘 할지, 과연 우리를 찾는 걸음은 언제까지 이어질지에 대한 고민이 무수히 쏟아졌다. 두려웠다. 자영업을 영위하는 여느 사람들의 마음과 같을 것이다. 예전에 한번 무너진 적이 있던 나의 마음에는 조금은 익숙하게 그 증상이 다시 찾아왔다.

어쩌면 두 번째가 더욱 혹독했던 것 같다. 처음에야 쉬면 되는 일이었지만 나의 사업을 시작한 후로는 힘들다고 해서 마냥 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깊은 고민과 불안 그리고 이것이 한데 엉켜 범벅이 되면 어김없이 공황이 왔다. 하지만 병원은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이미 이 증상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 들인 이유였지만 결국은 근본적인 해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방법은 불안의 분산이다. 강물에 와인 한잔을 부으면 이내 물의 흐름에 따라 와인은 흩어지고 사라져 맛과 색을 잃는다. 마찬가지로, 꽃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시도하는 것이다. 마치 처음하는 것 처럼.

꽃과 관련된 영상도 찍고 글도 쓰고, 꽃이라는 큰 틀은 변함이 없지만 곁가지 일들을 일인 듯 취미인 듯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즐기려했다. 그러한 가운데 일을 통해 오는 수익이나 앞으로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지속 가능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잊게 된다.

흔히 주변에서는 꽃 말고 새로운 흥미거리를 찾아 보라 했다. 하지만 그게 참 안되더라. 나에겐 꽃이 가장 설레고 재미있는 일이었기에 나머지거리에선 어떠한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낭비 처럼만 느껴졌을 뿐이다. 차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이 점이 무척이나 괴롭다. 일이 주는 스트레스로 인해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지만, 결국 일 말고는 어떤 재미도 없다는 것. 하, 끔찍해 끔찍해. 그래서 완급의 조절, 조율이 필요하다. 현의 길고 짧음을 맞추는 것. 악기에 한껏 귀를 기울여 소리를 통해 현의 긴장을 느끼듯 나의 마음과 몸은 고단함이 없이 잘 견뎌내고 있는 수준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욕심이든 불안이든, 그게 그렇게 잘 못된 것일까. 일을 하다 보면 더 잘하고 싶고 더 오래 하고 싶은 마음이야 자연스레 드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욕심과 불안은 더 잘하고 싶은 열정과 기대의 다른 이름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스러지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한채 끊임없이 스스로를 코너로 몰아 부쳤던 것이다. 내게 잘못이 있다면 욕심과 불안의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느슨해 질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여튼, 몇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러한 불안의 분산법을 찾으며 두번째의 고비 역시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끝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나는,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플로리스트일 것이고 길게 십년의 주기로 이런 고비들이 찾아왔다면 곧이어 이런 시련은 언제고 다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면서 매일이 기쁘고 설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꽃들을 만나게 될지, 이 꽃이 이어주는 인연들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기대로 하루를 맞았다. 그리고 밤이면 침대에 누워 앞으로 꽃을 통해 어떤 일들을 만들어 나갈지 그것이 주는 새로운 변화는 무엇일지 그려가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올곧이 꽃과 일에만 집중하는 시간이었고 이는 무엇에도 대신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돌파구가 없는 것, 완전히 벗어나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이면의 슬픔이다.

아, 어렵다. 나는 그렇게, 뫼비우스의 띠 위를 오늘도 속절 없이 달린다.

이전 08화 하고싶은 일을 하고 살면 행복할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