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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언 Nov 30. 2021

하고싶은 일을 하고 살면 행복할까

호텔에서의 근무 강도는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 넘었다. 하지만 플로리스트라면 모두가 선망하는 곳에서 일한다는 자부심, 나의 꿈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으로 버텨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도, 큰 힘도 필요하지 않았다. 조금씩 천천히 내 삶은 나도 모르는 채 스러지고 있었다.

입사 이후로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요즘은 플로리스트들의 근무 여건이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엔 공식적으로 주 1회의 휴무가 있었다. 하지만 늘 적은 인원으로 큰 행사들을 해 내었기에 온전히 하루를 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8시쯤 출근을 했고 딱히 퇴근시간이라고 정해진 것이 없었다. 늘 열시, 열한시는 기본이었고 꽃시장이 열리는 자정에 맞추어 호텔을 나서는 날도 많았다. 퇴근이 아니라 꽃시장에 가서 필요한 꽃들을 주문해 놓고 새벽 두세시쯤 집으로 돌아가 쪽잠을 자고 다시 아침에 출근을 했다. 그 해엔 유난히 국제행사도 많았고 연예인들의 대형 결혼식도 많았다. 휴식 없는 삶이 몇 주, 몇 개월씩 계속되었다. 새벽에 일찍 나가야하는 날이 많아 불을 켜 놓고 자는 습관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깊게 잠드는 날도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며칠씩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양말이나 속옷은 편의점에서 급한대로 사서 입고 화장실에서 씻고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던 날들이었다. 그때 늘 가졌던 생각은 ‘자고 싶다’였다. 알람을 맞춰 놓지 않고 불도 켜 놓지 않은 채 암흑 속에서 몇시간이고 뒤척이지 않고 누워서 자는 잠. 그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

좀 더 편하게 일하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냐겠지만 그건 스스로의 꿈과 목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플로리스트가 일 할 수 있는 최고의 곳으로 왔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다는 것 자체가 패배나 도망이라 생각했다. 최고의 목표를 이루니 그곳이 최후였고 더 이상 갈 곳은 없었다.

계속해서 깊은 잠을 자지 못했지만 기껏 잠들어도 깨기 일쑤였다. 딱히 악몽을 꾸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면서도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다. 일할 때도 현기증이나 갑자기 빨리 뛰는 심장, 식은 땀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런 증상은 점점 심해졌다. 결국 어느 새벽엔가 죽을 것 같은 극심한 공포가 찾아오면서 숨을 쉴 수 없었다. 나는 가슴을 움켜쥐고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뛰어들어갔다. 가슴 엑스레이를 찍고 심전도를 측정하고, 내가 알 수 없는 이런저런 검사들을 다 해 보았지만 이상이 없었다. 이렇게 죽을 것 같은데 이상이 없다니, 이후에도 계속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설풋 잠이 들다가도 갑자기 요동치는 심장에 일어나 앉아 밤을 지샜다. 그리고 다시 죽을것 같은 공포로 응급실을 찾았지만 신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을 밝혀지내 못했다. 그리고 그날 응급실에서 나를 진찰했던 당직의는 시간이 될 때 정신과에 가보라고 조심히 일러주었다. 나는, 공황장애였다.

정신과에서 그렇게 진단을 받으니 차라리 홀가분한 마음도 들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다만 나의 정신상태는 내 몸이 죽을 만큼 힘들다고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내 꿈을 정한 이후로 7년여를 쉼없이 달려왔다. 그리고 진정 내가 원한 자리에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내 몸은, 내 마음은, 나의 정신은 곪을대로 곪아 피폐해졌을 뿐이었다.

호텔에서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꽃이란게, 정말 지긋지긋해졌다. 사람들은 꽃향기 맡으며 편히 일한다고 하지만, 꽃향기를 맡으면 구역질이 났다. 이른 아침, 트럭에 한 가득 꽃은 층층이 호텔 검품장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그 트럭의 문이 열리는 순간 나던 냄새, 꽃과 풀과 농약이 한데 뒤엉켜 나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의 하루는 또 얼마나 길까.

어렵게 따낸, 호텔 플로리스트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려놓고 그곳을 떠나 요양에 가까운 생활을 시작했다. 정신과는 일주일에 두번씩 찾았다. 첫날의 진료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의사선생님께 하소연을 하듯 어려운 입을 떼었다. 스스로를 긍정적이라 생각했고, 열심히 살았고, 타인과의 관계도 나쁠 것이 없는데 왜 내게 이런 병이 온 걸까요. 그리고 그분께서 해 주신 짧은 말씀.

‘타인에게 관대할 수록 스스로에게 인색할 때가 많습니다.’

나에게는 인색했다. 나를 돌보는 것에는 소흘했다는 말이겠지.

그간의 시간, 영국과 서울을 거치며 쉼 없이 달렸다.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이루며, 마치 이러한 마음의 가짐이 긍정이며 진취라 생각했다. 아니다. 그건 그저 게임의 퀘스트를 정복하는 것처럼 하나의 목표를 이루면 다음, 그리고 다음, 끊임없이 새롭게 이겨내야할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마지막 적을 무찌르고 나면 무엇을 위해 그리 열심히 했던가 허무가 찾아오는 것이다. 어쩌면, 호텔 다음의 목표가 있었다면 아프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곳을 그만두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가는 동안은 나의 열정이 아픔을 덮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훗날로 조금 미뤄두는 것일 뿐 곪은건 언젠가는 터지기 마련이다. 과연 무엇을 위한 열정이었을까. 대학문을 호기롭게 박차고 나오면서 꼭 성공해 보여주리라 다짐했던 오기, 꽃을 통해 무엇인가를 이뤄내고 싶다는 욕심.

이 문장들 속에 어쩌면 답이 있을 것이다. 보여주고, 이뤄내고. 이 속에 주체는 나는 없다. 다른 사람에게서 보여질 나의 모습과 성취, 그리고 결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타인에게 관대하고 나에게 인색하다는 뜻이었겠지.

어디서 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처음의 주체는 나였다. 하기 싫은 것을 떠나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일을 하는 과정 가운데 분명 잘못된 사회적인 분위기나 노동환경 등은 있었지만 시간이 갈 수록 점차 나의 마음이 시들해 갔던건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이 무렵,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행복할까 라는 생각을 무던히도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은 쉽게 하고 싶은거 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좋아하는 일 하며 행복하게 사세요 라고 인사 처럼 말한다. ‘하고싶은’과 ‘좋아하는’을 떼어내면 결국 ‘일’만 남는다. 하고 싶은 것을 하게 되면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그때 부터는 ‘하게 된 일’이다. 좋아하는 감정은 그것이 마치 화수분 처럼 평생을 솟아나지 않는 다면 결국 언젠가는 소멸되기 마련이다. 그때면 역시 일만 남는다.

어쩌면 우리는 ‘행복하세요’라는 말도 너무 가볍게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은 사람의 감정이다. 기쁨, 슬픔, 분노 혹은 희망이나 절망처럼 처럼. 누군가에게 기뻐하라고 해서 기뻐질 수 없고 슬퍼하라고 해서 슬퍼질 수 없듯이 행복하라고 해서 행복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듯 희망과 기대가 적절히 버무려져 만들어낸 ‘하고싶은 일’이 무너지고 난 후, 그때의 마음은 뭐랄까. 바다 한 가운데에서 도착지를 잃은 배처럼 갈 곳 없이 버려진 존재처럼만 느껴졌다.

꽃만 아니면 어떤 일이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다. 취업 사이트를 뒤져 여기저기 되는대로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고졸이었던 나는 지원 자격 조차 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한참이나 기대를 낮춰 지원을 하고, 막상 면접을 보러가면 ‘지금까지 뭐 했어요’라는 말을 가장 먼저 들었다. 대학 자퇴 이후 곧 서른이 되는 그때까지 꽃 이외의 경력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원업무 관련해서만 작성을 하라는 이력서는 그렇게 하얀 종이인 채로 제출되었다. 고작 그걸 물을거면 대체 서류전형은 왜 통과시킨건지.

어째저째, 지인의 소개로 작은 사무실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워드만 치면 되는 단순한 일이었다. 하루종일 자리를 지켰고 화장실은 가지 않았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구려 셔츠에 어울리지도 않은 넥타이를 맨 나를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나다운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 답지 않은 건 있었다. 그때가 그랬다. 결국 그곳도 세달을 채우지 못했다.

생계는 몇 군데 파트타임 플로리스트로 일하며 이어갔다. 나의 삶은 무너뜨린건 꽃인데, 나의 삶을 유지해 주는 것 또한 꽃이었다. 참 우스운 아이러니다.

그렇게 방황의 골이 깊어갈 때 쯤 플로리스트 선배로 부터 제안을 받게 되었다. 

“지방에 호텔이 하나 새로 생기는데 웨딩과 호텔 꽃장식을 맡아서 해줄 책임자가 필요해. 네가 가지 않을래?”

그곳은 절묘하게도 나의 본가가 있는 곳이었고, 서울 생활에 지칠대로 지친 나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 무렵, 건강을 비롯해 많은 것을 잃었다 생각했지만 얻은 것 또한 있었다. 이제서야 오롯이 이 직업이 나의 것이 되었다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점이다. 나는 정말이지 꽃 이외의 분야에서는 ‘노바디’였다. 이력서 한장 번번히 넣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지난 긴 시간에 대한 나의 열정은 꽃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허송한 것에 불과했다. 반면 꽃에서 만큼은 경력과 업계의 평판이 쌓여 더 이상 이력서를 쓰지 않아도 되었다. 이력서 조차 받아주지 않는 곳과 더 이상 이력서가 필요 없는 곳. 당시의 차이를 통해 내가 얼마나 이 일에 녹아져 있었던가를 떠올려 본다. 지금은 데이터의 먼지가 되었을 수 많은 이력서들, 그것을 받아준 단 한곳이 있었다면 어쩌면 영원히 꽃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당연하게도?) 그런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간은, 꽃과 불꽃 같은 연애를 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열정을 다해 사랑을 쏟지만 사소한 불만과 토라짐으로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사이. 하지만 이후 부터는 부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에게 분명 상처가 될 일은 있지만 타협과 애정으로 다시 긴 시간을 함께 할 사이. 지난 시간보다 더욱 성숙해져 앞으로의 미래를 함께 그려갈 사이 말이다. 이걸 꼭 그렇게 죽을 만큼 아프고서야 깨닫게 된 점은 억울할 따름이지만, 플로리스트의 사춘기는 그렇게 가만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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