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꽃을 하시네요.
지난 20여년간 무던히도 들었던 말이다. 이제는 무뎌질 때도 되었는데 그게 참 안된다. 이 말만 들으면 마치 머리 속에서 부스터가 붕 하고 작동하여 갖은 앙금의 추억들을 다 끄집어 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이 말을 하는 쪽에선 낯설고 신기해서, 그저 아무 뜻 없이 하는 말이겠지만 나로서는 마치 자동 회로가 작동하듯 내 마음은 울렁거린다.
매번 나의 직업을 말할 때 마다 주기적으로 듣게 되는 이 말은, 이제 더 이상 상처라고 까진 할게 없지만 그래, 솔직히 불편하다.
꽃을 시작한지는 이십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그 동안 나역시 청년에서 중년이라 불러도 될 만큼의 나이가 되었다. 외모에서는 더 이상 청년의 모습이라곤 찾을 수 없기에 낯섦 이외의 생각은 들기 어렵겠지만, 이십대 시절에 이 말을 들을 때면 성적인 호기심까지 다분히 느껴지곤 했었다. 나의 성 정체성을 은근 떠 보기 위한 질문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플로리스트라는 직업이 주는 여성성의 이미지, 그 페미니티적인 시선으로 나를 보며 재차 이것이 너의 직업이 맞는지 확인 받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당시엔 워낙 남자 플로리스트의 수가 적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이 말이 회자되는 것은 조금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리고 정말 안타까운건, 이십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남자 플로리스트의 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율상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이 직업에는 성별이 주는 장벽 혹은 적어도 그 이미지는 존재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간 몇몇의 작은 신문사나 방송사에 인터뷰를 할 일이 있었다. 처음엔 호기심에 응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무척 조심스럽다. 사전에 인터뷰 질문을 확인하고 기사의 방향을 확인하며 할지 말지를 고민한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대부분은 실망하며 고사하고 만다. 예전에 했었던 인터뷰도, 그리고 요즘도 종종 들어오는 인터뷰의 내용도, 질문은 대부분 ‘남자 임에도 불구하고’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플로리스트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일과 꽃이 주는 기쁨을 알리고 싶다. 그러니 나의 성별이 그에 앞서 회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 플로리스트’라는 명칭대신 그냥 플로리스트로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참 어려운 일인가 보다.
우리 사회가 원체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인식이 그릇되어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름 성 역할의 불균형이 우리 보다 훨씬 낫다는 유럽에서도 별반 다를 점은 없었다.
런던에서 플로리스트로 일할 때 나의 동료들은 대부분 여성이거나 게이였다. 순수(?)한 남성의 비율은 한국 만큼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조금 우스운 상황도 발생한다. 남자 플로리스트를 만나면 게이 인지 아닌지 서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밝히지 않으면 당연히(?) 게이 인줄 안다. 상황이 이러니 숱하게 많은 오해들을 받기도 했다. 때문에 누군가를 처음 만나 나를 소개해야할 일이 있다면 ‘저는 플로리스트 입니다. 이성애자예요.(I am a florist, straight)’ 라고 지례 묻지도 않은 성정체성을 미리 밝혀야만 했다. 아, 정말 피곤한 일이다.
‘남자 임에도 불구하고’ 플로리스트로 일하는 지금까지의 시간은 투쟁이었고 나는 원치않게 투사가 되어 있었다. 다들 그러더라고 성의 고정관념을 깼다고. 나는 뭔가를 깬적도 없고 깨려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암튼 깨었다고 한다. 그런데 굳이 깬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가졌을 고정관념들이 아니었을까.
이 직업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사회가 그어 놓은 많은 틀과 이미지 속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느낀다. 남성이지만 여성성이 강한 직업을 가졌고, 이성애자이지만 동성을 좋아하는 이들이 나의 주변에는 필연적으로 많았다. 오히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기에 양쪽 모두로 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양쪽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한건 행운이다.
아마도 이 직업으로 살아가는 동안은 ‘남자가’나 ‘남자 임에도’로 시작하는 말은 영원히 듣게될 것 같다. 솔직히 이제는 포기한 심정이다. 다만 이 말에 어떻게 대답할지는 여전히 고민이다.
처음엔 어떻게 설명할지 그러니까 나의 성정체성은 유별날 것이 없고 이 일 또한 남성과 여성을 가릴 것이 아니라는 점을 어떻게 짧고 굵게 어필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이 말에 좀 더 유연히, 어렸을 때 처럼 눈빛으로 레이저를 팍 하고 쏠 것이 아니라 포용적으로 응할 수 있는 문장이나 추임새 같은게 있으면 좋겠다.
그러고보니 얼마전 방송에서 어느 남자 간호사 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나의 경우와 비슷한 질문에서 ‘환자를 돌보는데 남성과 여성이 중요한게 아니라 의료적인 지식과…’로 자연스러운 면서도 세련되게 답을 하고 있었다. 한켠 준비된 멘트 같긴 했지만 상황을 일시에 정리해 주는 임팩트가 느껴졌다. 그럼 나도 이것을 응용해서 앞으로는 이렇게 말해 볼까.
‘꽃과 관련된 일을 하는데 남성과 여성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꽃을 좋아하는데 남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
별로, 와닿지 않는다. 조금 더 고민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