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이언 Dec 24. 2021

팬데믹에 대처하는 플로리스트의 자세


우르르 꽝꽝.


비 바람에 번개라도 쳐대는 모양새다. 이것이 날씨라면 예보라도 있었을 테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2019년에서 20년으로 이어지던 겨울, 아득히 다른 나라 일 같다가 ‘어, 어’ 하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 곁에 바짝 다가온. 그러다가 우당탕탕 모든 것을 휩쓸고도 여전히 끝이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져 오는 것. 생에 처음으로 겪은,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팬데믹은 우리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나라고 재간이 있을까. 이 비 바람이 오롯이 나를 감싸기 까지 할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었다. 2020년의 2월 까지는 나를 걱정해 주는 이가 많았다. 졸업식과 입학식이 모두 취소되던 때다. 우리는 괜찮아요. 웨딩 플라워를 해서 졸업 시즌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렇게 안심을 시켰고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런 채로 불과 한달 만에 확진자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그 해 봄에 예정되었던 예식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취소 되었다. 카드 현금 서비스를 받아서 위태롭게 남아 있던 마지막 예식의 계약금을 돌려 주고서야 사태의 심각함을 느꼈다. 이전까지 나를 걱정하던 이들은 이제 내가 걱정해 주어야 상황이 되었고 끝내 단 한 사람도 남김 없이 서로가 서로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잠깐은 폐업을 해야하나 라는 가혹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 일이 터지기 전 해에 작업실은 집 가까이 걸어갈 수 있는 곳으로 옮겼고, 너른 창고나 다름 없는 곳이라 유지비라 할 만한 것은 크지 않은 부담의 월세와 약간의 수도 전기세 밖에 없었다. 인건비 또한 일이 없으니 나갈 것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폐업을 하나, 하지 않나 계산기를 두드려 보지 않아도 별 차이가 없다는걸 알았다. 폐업 조차도 답이 되지 않는다. 어쨋거나 이렇게 더 버텨볼 수 밖에. 

역시나 생계의 문제가 컸다. 웨딩은 모두 취소 되었고 꽃꽂이 강의가 잡혔던 관공서 등에서의 수업들 마저 모두 무기한 연기가 되었다. 지속적으로 수입을 가져다 주던 거래처 웨딩홀들은 오히려 나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수입은 0원이었다.

모아 두었던 얼마 간의 돈으로 당장의 생활비는 충당할 수 있겠지만 그 역시 길게 가지는 못할 것이다. 뉴스에서는 출하된 꽃들을 갈아 엎는 장면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었다. 어디 하나 안 그런 곳이 없겠지만 화훼업계는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가장으로서의 막막함이 몰아쳤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집 밖으로 나가는 것 조차 녹록지가 않았다. 다행히 작업실 까지는 타인과의 접촉 없이 걸어가면 되는 것이니 하루 종일 그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궁리를 했다. 지금 할 수 있는건 무얼까. 대면 수업이 불가능 하니 나 또한 줌을 써 볼까도 했다. 하지만 꽃은 그 특성상 쉽지가 않다. 

대신 홀로 꽃을 다듬고 꽂는 모습들을 찍어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미뤄 두었던 일을 결국 시작하게 된 것이다. 물론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일은 익숙지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많으니 이 또한 꾸준히 하게 되더라. 편집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니 이것에 들이는 품은 확연히 줄었다. 같은 시기에 전자책 크라우드 펀딩에도 도전을 했다. 플로리스트 창업에 대해 약 150페이지 분량으로 글을 써서 펀딩 사이트에 올렸다. 기간 동안 목표 했던 금액을 훌쩍 초과하게 되어 성공적으로 판매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펀딩을 해주신 분들의 면면을 보니 모르는 분들도 있었지만 익숙한 이름들도 많이 보였다. 어느 분은 전자책 비용의 서너 배, 혹은 다섯 배를 넘게 펀딩하시기도 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전자책 크라우드 펀딩은 책의 단가 때문에 성공하더라도 사실 그리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수익이 0원인 상태에서도 무언가를 해 냈다는 안도 그리고 나의 경험을 유형의 가치로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어 주었다. 이 시기에 한 일은 또 있다. 중국이나 일본과의 무역 루트가 조금씩 정상화 되면서 이들 나라로 부터 조금씩 수입을 하여 스마트스토어에서 판매를 하는 것이다. 처음엔 무엇을 팔아야 할지 몰라서, 그리고 역시나 사이트를 꾸미거나 상품을 올리거나 택배를 보내는 일 등이 모두 서툴러서 애를 먹기도 했다. 그때 수입한 물건들이 지금도 재고로 쌓여 있지만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게 된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버텨내었고, 지금도 버텨내고 있다. 불과 지난 두 해의 시간들은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사건들의 집합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이 더 이상 당연할 수 없고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 같은 것도 짧은 시간 만에 바뀌어 버렸다. 지난 십 수년의 변화 보다 이 두 해간의 변화가 훨씬 크다. 5년이 넘게 우리에게 웨딩 꽃장식을 맡겼던 웨딩홀은 결국 도산을 했다. 결혼식 하객 인원이 삼백명이 훌쩍 넘던 시간도 이제는 아득하게 느껴진다. 예식은 간간히 하더라도 식사를 하지 않거나 하객의 수가 많아도 백명을 넘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한 시간들이 이어질까. 지금의 상황이 나아진다 해도 우리는 완전한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반면,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결혼식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줄어든 하객 수, 목숨을 걸고 축하해 주러 오는 정예로운 소수가 이룩한 이 성과는 웨딩의 품격을 한층 높여 주었다. 시장통 같이 북적이던 예전의 모습은 더이상 온데간데 없다. 앞으로도 결혼식은 더 작아질 것이고 더 산발적일 것이다. 꽃의 소비 또한 특별한 날 누군가에게 주기 위한 것에서 평범한 날 자신과 가족을 위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꾸어 놓은 가장 큰 변화는, 바로 나 자신이다. 지금까지 가졌던 관념들 그리고 미래에 대한 꿈.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 변화의 충격은 가히 가까운 이의 죽음에 비견할 만큼의 크기이다.

이제 강의는 영상을 통해서, 판매는 온라인에서만, 그리고 웨딩은 작은 결혼식에만 더욱 집중을 할 것이다. 예전엔 너른 공간을 구해 대규모의 예식을 할 수 있게 꾸미는 것이 미래에 대한 유일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철옹성 처럼 크고 높고 단단한 것을 이루는 것에서 물이나 모래처럼 그 물성이 0에 수렴하는 물질인 채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유연하고 부드러워 쉽게 부러지지 않는 것, 크고 강력한 단 하나의 전략을 세우기 보다 작지만 다양한 여러 재능들이 순환하며 서로를 보완해 주도록 말이다.

그래, 아직은 이 모든 것이 추상적이며 계획하는 대로 잘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변화에 적응하고 또 배우고 익히며 앞으로의 시간들을 담담히 맞이해야 겠다. 부디 그럴수 있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되뇐다.

이전 12화 직업도 리폼이 됩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