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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Jan 24. 2020

장교들은 설날에 뭐할까?

군대와 명절

 음력 새해를 맞는 설날이다. 누구나 그렇듯이 장교들도 명절 연휴를 기다리게 된다. 군대에서 며칠씩 연속으로 쉴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지 않기 때문이다. 양력 1월 1일의 경우, 의욕 넘치는 사단장을 만나면 전군에서 가장 먼저 혹한기 훈련을 해야 한다고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설은 그렇지 않다. 사단장도 가족이 있으니 설 연휴 전후로는 큰 부대 일정을 잡는 경우가 별로 없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정이란 게 생길 수도 있지만 그럴 땐 자신의 불운을 탓할 수밖에...


그럼 장교들은 설에 뭐하면서 지낼까?


피할 수 없는 당직근무

 군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는 휴일이냐 연휴에는 당직체제로 돌아간다. 최소한의 간부만 남아서 병력 관리를 하고 부대 운영을 한다. 이번처럼 4일 연휴에 당직이 걸리지 않으면 금상첨화 겠지만 앞에서 포스팅한 당직근무 관련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직근무는 피하고자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욱이 간부수가 적은 부대라면 4일 동안 이틀의 근무를 서는 경우도 있다. 단 하루만 근무하더라도 연휴 중간에 낀 날짜라면 꼼짝도 할 수 없다. 간부끼리 근무 일정을 서로 바꾸기도 하는데 연휴 첫날이나 마지막 날이면 모를까 중간에 끼인 당직은 아무도 바꿔주지 않는다. 이번 설처럼 '금. 토. 일. 월' 연휴에서 금요일과 일요일 당직근무를 한다고 하면 최악이다. 이런 근무를 퐁당 근무라고 한다. 금요일 아침에 근무 투입돼서 토요일 아침에 숙소에 들어와 눈 붙이면 오후 늦게 깬다. 다시 일요일 근무를 위해 10시엔 자야 한다. 일요일 아침에 근무 시작하면 월요일 아침에 숙소에 올 수 있다. 연휴가 다 끝난 거다. 4일 연휴 내내 한 거라곤 상황판만 작성하고 방에 와서 잠을 잔 게 전부다.   

 

근무 운수가 좋지 않은 경우 연휴 내내 상황판만 작성할 수도 있다.


제설작업

 올 겨울은 눈이 많이 없었다. 스키나 스노보드 같은 겨울 스포츠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비극이지만 군인에게는 희소식이다. 눈이 날리면 제설작업도 시작된다. 휴일에 눈이 오면 눈이 그칠 때까지 기약 없는 작업을 해야 한다. 전술도로가 얼면 복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예외란 없다. 눈 온다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빗자루와 눈삽을 들어야 한다. 

  설 연휴라도 눈이 오면 예고 없이 제설작업을 해야 하는데 장교라고 따듯한 사무실에서 난로를 쬐고 있을 수는 없다. 병력이 나가서 일을 하는데 어찌 간부가 놀 수 있으랴. 작업이 잘 되고 있는지, 부족한 부분은 없는지, 눈치 우면서 다친 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사람은 없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연휴에 당직 서는데 눈이 온다면 누군가 인생에서 최악의 설날을 물어볼 때 주저하지 않을 수 있다. 



번외 활동

긴 연휴를 맞이하면 병사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거다. 그냥 가만히 누워 TV나 보는 게 연휴에 하고 싶은 일중 앞도적으로 1등이다. 하지만 간부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병사들은 자유로이 내버려 두면 반드시 사고를 친다. 간부들 사이에서 불문율이다. 뭐 통계적으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지만 군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의 경험에서 나온 격언(?)이다. 실제로 군기사고의 경우 내무생활이 긴 부대에서 주로 일어난다. 전방 GOP 같은 부대에서 경계 임무만을 수행하면 근무 시간 외엔 생활관 내에서만 보낸다. 혈기 왕성한 젊은 사람들이 비좁은 생활관에서 하루에 10시간 넘게 있는데 아무런 사고도 없는 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선임이 후임에게 심심하니 장난도 걸고, 동기들끼리 농담하다가 시비도 생길 수 있다. 근무 간 쌓였던 갈등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반면 훈련 강도가 높은 부대에서는 체력적으로 힘들어 정리하고 잠들기 바쁘다. 그러다 보니 접촉이 적으니 갈등이 줄고, 사고 발생도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에너지를 충분히 쏟을 수 있는 축구나, 족구, 단체 윷놀이 같은 행사를 기획한다. 연휴가 4일이라면 중대장배 축구대회, 농구대회, 족구대회 등을 동시에 개최할 수도 있다. 남아서 한가로이 TV만 보는 이들이 없도록 전체가 참여를 의무화한다. 설사 첫날에 떨어지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무한 패자부활전이나 순위 결정전을 이끌어가서 중도 탈락 자체가 없도록 한다. 신나게 운동만 하다 보면 연휴가 끝난다. 연휴가 끝난 다음날 중대장이 포상으로 분대장에게 휴가증을 줘서 분대 내 가장 휴가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도록 한다. 몸은 자연히 단합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군에서도 차례를 지낸다. 각 조상의 신위를 모실 수는 없지만 마음은 담아 보낼 수 있다 / 출처: 뉴시스


합동 차례

대대급 이상인 경우 합동 차례를 지내기도 한다.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는 장병들을 생각해서 군에서 조상님께 예를 다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 차례상에는 대단한 것이 올라가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군대스타일로 그날의 짬밥을 올리고 절을 하진 않는다. 행보관이 어딘가 있었는지도 모를 제기를 들고 와서 과일과 떡국 등으로 제법 차례상답게 차려낸다. 

 예전엔 합동차례에 참석하는 게 강제였는데 지금은 개개인의 종교 신념을 고려해 자율적으로 참여토록 한다. 하지만 장교가 자신의 종교를 이유로 나 몰라라 하기는 힘들다. 왜냐. 합동 차례에는 보통 지휘관이 오기 때문에 휘하 간부들은 대개 참석한다. 절을 하진 않더라도 옆에 서있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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