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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연군 Feb 15. 2019

[ROTC 장교 한 번 해볼래?]
설원 위의 군인

그 스무 번째 이야기. 제설 작전 

제설복장으로 장비 갖춰서 연방장에 집합하기 바랍니다.

'눈이 온다.'는 말은 군인에게는 '하늘에서 작업이 내려온다.'로 들린다. 눈이 내리면 반사적으로 빗자루와 삽을 들어야 한다. 군에 오기 전엔 눈이 오면 하얀색의 위장 전투복을 입고 스키 타는 훈련을 할 것 같지만 그런 건 일부 특전사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대부분의 99% 장병들은 삽과 넉가래 그리고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워야 한다. 겨울이 끝날 때까지 계속.


눈이 오면 휴전선 155마일을 또렷이 식별할 수 있다. / 출처 : JTBC 블로그




제설작업의 목적

계속 내리는 눈을 치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전술로 확보다. 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동과 보급이다. 움직일 수 없는 부대는 적의 포탄의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하다. 언제든 전술적인 상황에 따라 기동이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먹어야 한다. 음식, 피복, 탄약 등 군이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보급이 중요하다. 누가 그랬던가. 미군이 작전을 할 때는 가장 먼저 보급로를 확보하고 움직인다고.


폭설로 인해 고립된 부대가 식재료나 난방유 같은 기본적인 물품의 보급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보통 한 개 대대라 하면 400~500여 명의 인원이 있다. 이들이 폭설로 인해 눈이 녹을 때까지 보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12사단, 21사단처럼 군에서도 눈이 많이 오기로 이름난 곳은 적설량이 1m를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눈이 녹아 보급로가 확보되기 전에 다시 눈이 내리기 때문에 겨우내 자연적으로 도로가 확보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전방에서 눈이 오면 적설량이 1m를 넘기는 경우도 많다. / 출처: 연합뉴스


밤낮이 없는 제설작업

제설작업이 힘든 이유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눈발이 날리는 것은 제설 작업의 신호탄이다. 밤이나 낮이나 눈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빗자루를 들고 모여야 한다. 제설 작업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하는 이유는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도로면과 접한 아래쪽은 금세 얼어버린다. 그때는 제설에 시간도 더 오래 걸리거니와 더 많은 장비나 약품이 요구된다. 눈이 오자마자 빗자루로 쓸어내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러니 눈이 그칠 때 까지 수시로 나가야 한다. 실제로 작업하는 장병들에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가장 최악의 눈은 당직을 서는 새벽에 오는 눈이다. 새벽, 가장 추운 시기에 지휘통제실로 부터 제설작업 지시가 떨어진다. 아직 눈도 못뜬 부대원을 흔들어 깨워 옷을 차려 입히고 제설작업을 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해가 뜨면 작업을 하라는 지시가 오기도 하는데 한두 시간의 차이만 날뿐 작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당직사관을 서면서 새벽 제설작업을 지시할 때는 아무리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고는 하지만 인간적인 미안함이 앞선다. 말은 안 하지만 작업을 나서는 병사들의 볼멘 얼굴에서 모든 심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신속히 부대 내 제설작업을 마치면 또 다른 지시가 내려온다. 바로 대민지원. 삽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다시 들고 육공트럭 뒤에 오른다. 이런 날은 하루 종일 눈만 치우게 된다. 관공서에서는 으레 눈이 오면 군부대로 제설작업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한다. 이 요청을 받는 부대도 특별할 사유가 아니면 지원에 응한다. 평소 관공서와 많은 협조관계가 구성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장병들의 복지를 위해 시청이나 군청에 손 벌리러 가는 일도 많기에 일언지하 거절할 수가 없다. 또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국민의 곤궁을 모른 척한다는 것은 사회적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병사들은 같은 제설작업이라도 부대 내 작업보다 대민지원을 더 선호한다. 조금이라도 사회 공기를 마셔보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제설 작업은 추억 속으로
맨 땅에 삽질 연습을 하는 평창 제설 부대 / 출처 : 연합뉴스


평창 올림픽에 제설 전문 부대가 운영될 정도로 군인은 제설작업의 스페셜리스트로 인식된다. 자주 하니 잘한다는 생각일까? 군의 임무는 제설이 아니다. 작전 수행 간 필요에 의해서 일정 부분 제설작업이 이뤄질 수는 있지만 당연히 군인이 해야 할 본분이 아니다. 군은 온전한 전투력을 보전해서 전시에 승리하는 것이 목적이지 눈과 싸우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주한미군이 제설작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미군은 대부분의 작업을 외부 용역으로 해결하고 군은 온전히 전투에만 매진토록 한다.


우리 군도 이러한 흐름을 이어받아 병사들을 제초와 제설에서 해방시키고자 새로운 정책과제를 발표했다. 2021년까지 전 군에 제설과 같은 사역 업무를 미군처럼 민간인에 위탁하는 외부 용역으로 운영하겠다는 복안이다. 10년 뒤면 평창 제설 부대는 역사 속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특수부대로 남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길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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