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연군 Feb 16. 2019

[ROTC 장교 한 번 해볼래?]
맥주 한 캔 500원

그 스물 한 번째 이야기. 군납의 추억.

355ml 맥주 한 캔에 500원. 


아버지 세대에서 군납이라는 표시는 품질보증 마크다. 지금도 종종 뉴스를 장식하는 가짜 양주 때문이다. 당시 시중에 가짜 양주가 너무도 많았기에 군납 표시는 정품의 또 다른 말이었다. 군 생활하면서 가끔 구매했던 양주를 아버님께 드리니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었다. 친형의 결혼식에 친척들이 우리 집 거실에 둘러앉았을 때 아버지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주방에 가서 내가 사 왔던 양주를 두 손에 들고 개선장군처럼 걸어 나왔다. 기분 좋게 마개를 개봉해 강한 알코올 향이 거실을 끝에 앉았던 나에게 다다랐을 즈음 모두의 잔이 채워졌다. 건배사를 하기 전에 아버지는 이 말을 잊지 않으셨다. 


"야 이게 군납이야 군납!"


가장 귀한 것을 내왔다는 말을 에둘러 군납으로 표현하시고는 그날 밤 잔치에 내가 군생활 내내 사모왔던 양주들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뒤 물이 채워져 군납 표시를 전면에 내세우고서 진열장 자리를 차지했다. 

 


군납 담배의 추억


아직도 군에는 군납 주류가 있다. 예전에는 군납 주류와 양대 산맥을 이루던 군납 담배도 있었다. 담배도 전체 장병에게 제공하던 보급품의 한 종류였다. 예전에 전쟁을 다뤘던 영화를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담배를 쉽게 권하는 모습은 바로 보급품이기에 가능했다. 담배 한 갑에 4,000원이 훌쩍 넘는 지금에서는 보기 힘든 훈훈(?)한 장면이다.  


<군납 담배의 역사 / 출처:한국담배인삼공사>


군납 담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보면 이름도 생소한 화랑에서부터 지금까지 현역으로 편의점에서도 판매되는 디스까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0년까지 보급품이었던 담배는 군대 담장까지 넘은 금연 열풍을 이기지 못하고 2001년부터 전량 판매로 전환되었다. 대신 병사 월급을 대폭 인상했다. 보급이 되지 않는 만큼 구매해서 피울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래 봤자 병장 월급이 채 5만 원이 되지 않아 삽질 한 번에 10원을 매길 수 있었던 시기였다. 지금은 그 열 배인 40만 원을 받으니 당시 군 복무했던 이들에게는 격세지감이다.



간부에게만 허락된 복지. 군납 주류

 이렇게 군납 담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지만 군납 주류, 특히 군납 양주는 아직도 군 복지 한켠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군납 주류는 군 간부를 대상으로 한 복지다. 담배처럼 병사에게까지 돌아가는 혜택은 아니다. 간부들에게 연간 구매 가능한 개수가 정해졌다. 맥주 여섯 박스, 소주 한 박스, 양주 2병. 맥주도 병맥주, 페트맥주, 캔맥주 등 다양한 종류가 군납용으로 PX에 당도한다. 그러면 PX 관리관이 간부들 대상으로 공지를 한다. 언제부터 판매를 시작하겠노라고. 


군납 맥주는 시중의 1/3가격이다. 


판매 당일 일찍 가서 사지 않으면 캔맥주는 구매하기 힘들다. 그나마 당일에는 2박스 정도는 확보할 수 있는데 하루 이틀 지나면 인기 없는 병맥주나 페트맥주만 남는다. 계급이 깡패인 군대에서 영관장교 이상의 지휘관이나 상사 이상 소위 짬이 되는 이들은 사전에 인기 있는 캔맥주를 다량 선점한다. "지휘용" 또는 "행사용"이라는 타이틀을 붙여놓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양을 확보해 둘 수 있다. 계급이 낮으면 여러모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가장 인기있는 군납양주 중 하나인  스카치 블루


맥주 말고 양주의 세계도 피 튀기는 전쟁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미 결과가 정해진 전투다. 지휘관이 아니면 모두 패자인 게임인 것이다. 모든 것이 위스키 쟁탈을 위함이다. 우리나라에서 양주라는 단어는 위스키로 대체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위스키가 아닌 술은 양주로 대접을 못 받는 것이다. 군에서 군납 주류 중에서 양주로 푸는 술은 위스키와 브랜디 두 종류다. 양주는 12년과 17년이 주류를 이루고 브랜디도 XO, VSOP 등 다양한 등급을 구비해 놓는다. 하지만 인기있는 양주인 '스카치 블루'같은 경우엔 구매 안내가 나가기도 전부터 이미 매진이다. 사전에 "지휘용"으로 모두 배정되어서 짬이 안 되는 말단 간부들까지 순번이 돌아오지 않는다. 가끔 임페리얼이나 윈저 12년산 같이 비인기 위스키가 초급 간부들에게까지 구매 기회가 오는 위스키다. 


이상하게도 브랜디는 판매 마지막 날까지 항상 많이 남는다. 양주로 대접받지 못하기 때문에 인기도 없다. 실제로 면세점에서 20만 원에 판매되는 브랜디를 2만 원대에 판매하는 데도 사려는 이들이 없다. 이럴 때 PX 관리관과 친분이 있으면 대량으로 브랜디를 구매할 수 있다. 형이 결혼할 때 아버지가 자랑했던 군납 양주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다. 6개 들이 한 박스를 사면 한 달 월급의 10% 이상을 소비하게 되지만 방에 갖다 두고 바라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횡재를 한 기분이 든다. 병에 붙어 있는 '군납'은 저렴한 가격에 진품을 구매했다는 증거인 것만 같았다.


군납 주류가 판매되는 시기에 동기들 방에는 다들 맥주 박스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내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맥주에 더불어 양주까지 더해졌으니 그 부피가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이때의 구매패턴 때문인지 아직도 마트에 가면 맥주를 한 두 박스씩 카트에 담아야 성이 찬다. 아무래도 매일 야근의 피로를 맥주 한잔으로 풀던 버릇은 여기에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매거진의 이전글 [ROTC 장교 한 번 해볼래?] 설원 위의 군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