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은 유쾌한 상태가 아니지만, 확신은 불합리하다
Uncertainty is not a pleasant condition, but certainty is absurd”
-볼테르
인간은 미래를 상상하는 유일한 동물인 것 같습니다. 동물마다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인식과 준비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능력처럼 보입니다. 반려동물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안 좋으니 내일 산책하자’라고 말해봐도 그 말에 반응하는 반려동물은 없습니다. 오히려 ‘산책’이라는 말을 알아듣고 더 나가자고 조르지 않으면 다행일테죠. 예방접종을 미리 해두자고 설득하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에게 내일이나 모레, 혹은 몇 시간 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후를 걱정하며 재테크를 하고, 직업 하나로는 부족하다며 N잡을 고민하죠. 때로는 불확실한 미래를 엿보기 위해 갖가지 점을 보거나 불안을 달래기 위해 신앙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에서 미래를 계획하고 불안을 줄이기 위한 인간만의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무리 미래를 대비해도 어떤 변화는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특히 감각의 상실은 그 변화 중 가장 근본적이고 충격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시드니 시내에는 ‘Three Wise Monkeys’라는 이름의 펍이 있습니다. 도시의 소음 한가운데 우뚝 선 이 3층짜리 건물은 이름처럼 세 가지 감각을 차단한 세 마리 원숭이를 상징합니다. 눈을 가린 원숭이, 귀를 막은 원숭이, 그리고 입을 다문 원숭이. 일본 속담에 뿌리를 둔 이 상징은 ‘악을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격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자의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말하지 못하게 된다면, 감각의 차단은 더 이상 상징이 아니라 현실이 됩니다. 앞선 장에서 다룬 청각의 점진적인 변화와 달리, 이번에는 더 급작스럽고 충격적인 청력 상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상징에서 현실로: 감각의 상실
돌발성 난청은 삶의 소리를 예고 없이 앗아가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청각 장애 중 하나입니다. 매년 인구 10만 명당 약 5명에서 20명꼴로 발생하며, 의학적으로는 72시간 이내에 세 개 이상의 연속된 청력 주파수에서 30 데시벨 이상의 손실이 갑작스럽게 시작되는 경우로 정의됩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한쪽, 드물게는 양쪽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대낮의 일상에서, 갑자기 소리가 끊긴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죠. 대개 이명(耳鳴)이 함께 나타나며, 경우에 따라 어지러움이나 귀 안의 압박감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청력의 갑작스러운 저하는 다양한 병리적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 감염, 급성 중이염, 뇌종양, 자가면역 질환, 혹은 메니에르병의 일환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돌발성 난청’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외부적 또는 기계적 원인이 없이, 속귀(內耳)의 청력 기능이 갑작스럽게 저하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돌발성 난청 발생하는 이유의 대부분은 ‘원인 불명 (idiopathic)’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ἰδιο (idios)’는 ‘자신 고유의’를 뜻하며 πάθος (pathos)는 질병을 뜻합니다. 직역하자면 개인 고유의 질병이라는 뜻으로, 외부적인 원인 없이 발생한 병이라는 것이죠.
그나마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혈류 차단 이론입니다. 달팽이관은 그 크기에 비해 놀라울 만큼 혈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기관입니다. 인터넷에서 ‘달팽이관’을 검색하면 눈알만큼 커다란 일러스트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제 달팽이관의 크기는 그보다 훨씬 작습니다. 실제로는 작은 콩알, 혹은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크기에 불과하죠. 그처럼 작은 구조 안에는 수많은 미세한 세포들과 복잡한 청각 회로들이 정교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그 모든 세포와 신경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혈류 공급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단 몇 분간이라도 혈류가 차단되면 청각 세포들은 급속히 기능을 잃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일부 돌발성 난청이 매독이나 라임병과 같은 감염성 질환과 연관되어 보고된 바도 있죠. 또한 자가면역 질환이나 갑상선 기능 이상과 같은 전신 질환이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원인을 종합하더라도, 대부분의 환자에게서는 여전히 명확한 원인은 밝히기 어렵습니다. 그 누구도 내일 아침 돌발성 난청으로 잠에서 깨어날 줄은 모릅니다. 우리가 감각을 예측하지 못하는 바로 그 점에서 돌발성 난청은 극단적인 불확실성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예방할 수 없는 이 질환에 대한 치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요? 치료 방식은 국가나 기관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대부분은 고용량 경구용 스테로이드제가 1차 치료제로 사용됩니다. 만약 이에 반응이 없으면, 고막 내 스테로이드 주사(intra-tympanic corticosteroid injection)가 구제 요법으로 시행되기도 합니다. 돌발성 난청은 발견과 치료가 빠르게 이루어질수록 청력 회복 가능성은 높아지지만, 완전한 회복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청력 회복의 예후와 관련된 변수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인과관계가 없으며, 여전히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만났던 많은 환자들 중 상당수가 재빠른 치료를 통해 청력을 일부, 혹은 전체 회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경우에는 청력 회복과 동시에,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토로하는 때도 많았죠.
단절에서 회복으로
그렇다면 청력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어떤 선택지가 남아 있을까요? 청력이 일부 남아 있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보청기를 사용해 청각을 보완하는 것이 가장 정석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말초 청각계의 손상이 심해 보청기로도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경우, 인공와우라는 대안도 고려할 수 있죠. 한편, 청력이 한쪽 귀에만 남아 있는 경우에도 모든 보청기 적 접근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에요. BICROS 시스템이라는, 손실된 쪽 귀의 소리를 반대쪽 귀로 무선 전송하여, 여전히 기능하는 청각 경로를 활용하는 방식을 쓸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감각의 우회로’를 설계하는 방식과도 닮았습니다.
보청기는 그 장점과 한계가 명확한 기기입니다. 소리를 증폭하는 바깥 털세포의 기능을 주로 보조하기 때문에, 만약 돌발성 난청 등이 안쪽 털세포를 비롯한 다른 청각 기관을 손상했다면, 남아 있는 청력과 관계없이 보청기의 효과는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환자들은 일반적으로 ‘소리는 크지만 명확하지 않고, 말소리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스피커의 선이 끊긴 상태에서 아무리 고성능 마이크를 써도 소리가 나오지 않듯, 인공와우는 이 ‘끊어진 회로’를 우회하여 신호를 뇌로 직접 전달합니다. 털세포를 거치지 않고, 청각 정보를 전기 신호의 형태로 달팽이관 내부의 청신경에 직접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인공와우는 소리를 증폭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직접 코딩해서 뇌에 보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전통적인 청각 보조기와 인공와우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이 됩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감각과 통념이 제시하는 '진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고, 필요할 경우 ‘아니오’라고 말할 줄 아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이런 통찰은 청각 보조 기기, 즉 보청기와 인공와우를 이해하는 데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흔히 청력 상실을 결핍으로 보고, 보청기와 인공와우를 이 결핍을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스러운 청각이라는 개념을 일종의 우상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르죠. 즉, 청력 상실을 정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고, 보조 기기가 그 정상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행위지만, 동시에 많은 환자들에게 실망감을 줄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보청기와 인공와우는 단순히 생물학적 결핍을 보완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의 감각을 다시 쓰고, 전혀 새로운 청각 체계를 작성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태어난 생물학적인 언어로 쓰인 것이 아니라 기계가 새로 작성하는 언어입니다. 귀에 있는 작은 보청기는 실시간으로 물리 세계의 음파를 0과 1의 디지털 신호로 변환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기계적 언어에 익숙해지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진리라고 받아들였던 원래의 청력이라는 우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감각적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청력 상실을 단지 ‘잃은 것을 되찾는 여정’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을 배우고 적응해 가는 여정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처럼 기술은 감각의 단절을 우회하고, 완전히 새로운 청각을 만들어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만들어진 감각'에 어떻게 익숙해져야 할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청각 기기의 효용성을 넘어서, 감각이라는 것이 과연 '타고나는 것인가, 아니면 학습되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문제로 이어집니다. 예전에 읽은 책 중 1990년대 초에 나온 케빈 캘리의 <통제 불능 Out of Control>이라는 제목의 두꺼운 책이 있습니다. 다소 미래학적 내용이지만, 그중에는 이미 현실이 된 기술들도 많고, 한 번쯤은 읽어볼 책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의 한국어판 뒤표지에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적혀 있습니다. “태어난 것과 만들어진 것이 결합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 문장이 기술이 지향하는 방향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고 봅니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사변하고 성찰해야 할 주제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쓰는 기계들은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인공지능은 우리의 사고와 이어지고 있고 보청기나 인공와우는 물리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인 경계는 아직은 확실하지만, 노을이 질 때 낮과 밤이 만나는 지점처럼 희미해지는 부분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술이 진보할수록 그 경계는 더욱더 희미해질 것 같습니다.
감각을 이어가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는 완결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고 사랑하는 작품입니다. 천재 연금술사인 형 에드워드 엘릭과, 전신을 잃은 동생 알폰스 엘릭이 잃어버린 몸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 꾸준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는 ‘오토메일’이라 불리는 기술이 등장합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한 의수나 의족처럼 보이지만, 신경의 전기 신호를 받아 사용자의 의지대로 정밀하게 움직이는 경이로운 기술이요. 심지어 전투에 특화된 개조가 가능해 무기 기능까지 장착할 수 있으니, 현실의 기술 수준으로 보자면 거의 꿈의 기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원작의 핵심 개념인 '등가교환'을 빌리자면,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오토메일 역시 예외가 아니죠. 작품 속에서 표현되는 오토메일 이식 수술은 마취 없이 진행되기에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며, 수술 후에는 기계 팔과 다리에 몸을 적응시키는 재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통상적으로 이 적응에는 최소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묘사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많은 이들이 청각 보조기기를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소리를 다시 듣게 된다는 것은 단순히 청각의 회복을 넘어, 타인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세상과 다시 연결되는 경험이기도 하죠. 기술은 귀에 장착되지만, 그 영향은 마음 깊숙한 곳까지 닿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보청기나 인공와우를 통해 전달되는 새로운 소리에 적응하는 일은 종종 생각보다 더디고, 때로는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한 환자는 보청기에 익숙해지기까지 무려 18개월이 걸렸습니다. 초기에는 음량을 약 60퍼센트 수준으로 설정하고, 매달 조금씩 조절을 거듭해 마침내 100 퍼센트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소리를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 안에는 상호 간의 신뢰와 인내, 그리고 생물학적 수용력이라는 미묘한 조율이 숨어 있다거 생각합니다. 모든 이가 그처럼 도달점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한 조절과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도, 어떤 이들은 끝내 새로운 소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청각은 단순히 ‘듣는’ 능력이 아니라, 뇌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이기 때문이겠죠. 이처럼 복잡한 청각 적응의 배경에는 뇌의 신경 가소성과 감각기억, 그리고 들리는 소리를 내재화(internalisation)할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재화는 들리는 소리가 나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지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청각 분야에서는 조기 개입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특히 선천성 난청을 지닌 영아의 경우 최대한 빨리 보청기를 사용하고, 또한 필요할 때는 생후 12개월 이전에 인공와우 수술을 시행할 것을 권장합니다. 이 시기는 뇌 가소성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로, 이때 적절한 자극이 주어지면 뇌는 놀라운 속도로 청각 경로를 재형성하고 언어 습득을 시작합니다. 조기 개입은 단지 청각 기능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 능력을 구축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미 언어를 습득한 이후 청력을 상실한 성인의 경우에는 과거의 ‘청각 기억’이 새로운 소리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하기도 하죠. 익숙한 침묵에 적응한 이들은, 다시 들리기 시작한 세계의 낯선 소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편함을 호소합니다. 저는 임상 현장에서, 오랜 난청으로 인해 조용한 세계에 익숙해진 이들이 보청기나 인공와우 착용 후 갑작스레 유입되는 소리를 힘들어하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우리가 타고난 감각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순간부터 감각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통해 세상에 대한 경험을 확산시키며 자신을 정의해 나갑니다. 청력은 잃는 것도 충격이지만 되찾는 과정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뿌리내린 감각을 잃었을 때, 그 상실이 남긴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듯하죠. 기술이 개입하여 감각을 만들어주는 경우, 즉 인공 와우나 보청기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는 걸까요? 만약 손에 큰 상처가 나서 상처를 봉합하면 그것은 복원된 감각에 가까울 것이지만, 인공와우나 보청기는 복원하지 못하는 기존의 감각을 넘어서 새로운 감각을 구성해 버립니다. 저는 여기서 새롭게 이식된 감각이 반드시 열등하거나 지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자연주의적 오류일 것이죠.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감각의 반복인지, 아니면 해석의 재구성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변화의 중심에서 감각의 파편을 잇다
이 장의 처음에 인용한 볼테르의 말을 다시 반추해 봅니다. 우리는 확실한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 같습니다. 불확실성은 확실히 불쾌합니다. 마치 미지의 숲길을 걷다가 풀숲의 미세한 흔들림에,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는 맹수일까, 라며 의구심을 품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 삶에서 확실성 또한 때로는 폭력적인 면모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미래를 통제하려는 확실성의 추구가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 예를 들어 감각의 상실, 앞에서 무력해지거나, 새로운 감각에 적응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익숙하게 쓰던 감각을 통해 세상과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보청기를 처음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계와 컴퓨터에 의해 증폭된 소리를 들을 때, 또 인공와우 사용자들이 처음 전기 자극을 통해 ‘소리 비슷한 무언가’를 듣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분명 우리가 흔히 아는 청각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결국 적응합니다. 처음에는 불확실하던 소리들이 시간이 지날 수록 점차 이해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한 돌발성 난청 같은 감각의 단절은 무작위적이고 불확실하지만, 그 이후를 살아가는 방식, 즉 끊어진 감각의 끈을 이을 방법을 우리 각자가 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감각의 파편을 손에 쥔 채, 다시 세상과 이어지는 법을 배워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