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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쉼표 하나로도 말할 수 있다면

by Dr Ryan













앞서 우리는 의지와 무관하게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환청처럼 병리적인 소리일 수도 있고, 일상의 소음처럼 너무 익숙해서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소리에 대한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소리가 의식에 닿지는 않습니다. 들리는 것과 듣는 것 사이에는, 앞서 말했듯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침묵과 고요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진정한 침묵은 과연 존재할까요? 그 물음에서부터 출발해야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고요를 찾아 헤맸습니다. 진리를 갈망하거나, 혼란스러운 세상과 거리를 두고자 했던 이들을 우리는 흔히 ‘은둔자’라 부릅니다. 바닷가에서 소라가 스르륵 움직이는 듯하다면, 잠시 조심스럽게 지켜보세요. 주변이 고요해지면 소라의 입구에서 작은 다리들이 나와 모래 위를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소라게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영어로는 이 생물을 Hermit Crab이라 합니다. 은둔자라는 뜻이에요. 소라 껍데기 안의 살은 극도로 부드럽기에 껍질을 잃어버린 소라게는 야생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래서 탈피할 때마다 몸에 맞는 새로운 집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소라게들처럼 굳이 은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은 요가와 명상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 합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노이즈 캔슬링 해드폰으로 듣고 싶은 소리만 들을 수도 있겠죠.


쉼을 찾는 여정


만약 여러분이 진정한 무음의 세계를 찾는다면 무반향 체임버 (Anechoic Chamber)를 가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방에서는 자신의 눈 깜박임도 들을 수 있다 (In the Earth’s Quietest Room, You Can Hear Yourself Blink)>라는 제목의 스미스소니언 매거진 기사는 미국의 올필드 연구소(Orfield Laboratories)에서 2021년 11월, 무려 마이너스 24.9 데시벨이라는 소음 최소치를 기록했다고 전했습니다. 이것은 한 공간에서 가장 예민한 마이크로 겨우 측정이 가능한, 무음(無音)에 가까운 수치입니다. 자신의 눈 깜박임을 들을 수 있다는 기사의 헤드라인은 아마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고요를 추구한다면, 이 장소를 그리 추천하지는 않습니다. 외부와 주변의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겠지만, 대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명 소리를 들을 확률이 굉장히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 장에서 살펴봤듯이, 갑자기 사라진 청각자극을 갈구하는 뇌의 절규입니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떨까요? <인터스텔라>는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본 인생 영화 중 하나입니다. 블랙홀과 외계 행성, 실감 나는 우주선 도킹과 우리가 사는 차원을 초월한 고차원 공간까지, 이 영화는 수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죠. 하지만 제 기억에 가장 깊게 남은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인듀어런스호가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진입하는 그 순간이죠. 그 장면엔 어떤 배경음악도 없습니다. 소음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소리가 사라진, 깊은 공명만이 남는 장면은 아직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엔 별로 눈을 돌려볼 때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입니다. 그 중심부에서는 아인슈타인의 공식 E = mc²에 따라 수소 원자핵이 헬륨으로 바뀌는 핵융합 반응이 끊임없이 일어나죠. 이 과정에서 질량 일부가 에너지로 전환되는데, 우리는 이 에너지를 ‘빛’이라 부릅니다. 수십억년을 소모할 수 있는 핵융합과 대류 현상이 만들어내는 엄청난 에너지 방출, 그리고 진동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어떤 우주비행사도 태양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주에는 공기나 물처럼 소리를 전달해 줄 매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혹 ‘태양의 소리’라며 공개되는 영상들은 모두 태양 탐사선이나 인공위성이 수집한 전자기파 데이터를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가청 주파수로 변환한 것이죠.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엑스레이 영상을 보고 뼈의 형태를 상상하는 것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태양이라는 별은 적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침묵을 유지하는 천체입니다.


소리를 전할 매질이 없다는 이유로 침묵을 강요당한 별과 달리, 지구상에는 고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소리로 가득한 공간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심해입니다. 혹시 마음의 평안을 위해 깊은 바닷속을 찾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분이 있다면 미리 유감을 표해야 할 것 같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은 적군의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하이드로폰(hydrophone)’이라는 수중 청음 장치를 개발했습니다. 맨처음 이 장치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구조물에서 나오는 신호가 아니면 전부 무시했죠. 그저 쓸모없는 잡음일 뿐이라고 여긴 것이죠.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과학자들은 이 ‘잡음’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소리는 단지 배경 소음이 아니라, 다양한 출처에서 비롯된 중요한 소리였다는 것이죠. 이 소리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자연 현상에서 비롯된 소리, 예를 들면 파도 소리, 지진이나 해저 움직임 같은 물리적 현상에서 발생하는 소리입니다. 이를 '지음(geophony)'이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는 생물들이 내는 소리, 즉 고래나 새우처럼 해양 동물들이 서로 소통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내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건 '생물음(biophony)'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소리(anthrophony)입니다. 배가 지나가는 소리, 해양 개발이나 공사에서 나는 소음 등, 사람이 바다에 남긴 흔적이죠. 이 세 가지 소리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바닷속의 소리 풍경, 즉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입니다.



사실 우리는 ‘완전한 침묵’을 듣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청신경은 자발적으로, 많게는 초당 10회 이상의 발화를 일으키기 때문이에요. 이는 털세포가 소리 자극 없이도 소량의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내재한 리듬인 것이죠. 또한 자극이 가해졌을 때 전체 발화 빈도가 꼭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화 패턴이 재조정된다는 점도 침묵의 부재에 한몫합니다. 이는 ‘얼마나’가 아니라 ‘언제’ 발화하는지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렇듯 온전한 침묵, 혹은 정적을 상상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부 소리가 사라질수록 내면의 소리가 선명해질 때도 많죠. 특히 청각적, 시각적, 정신적 노이즈가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개개인의 경험은 철저히 주관적이며 맥락적입니다. 어떤 이는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또 다른 이는 불안을 마주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침묵을 원한다면, 그 안에서 무엇이 들릴지, 또는 무엇에 집중할지를 먼저 자문해야 하지 않을까, 반추해 봅니다. 어쩌면 침묵은 어떤 것이 결여된 상태가 아니라,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순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죠.


비움으로써 고요를 찾다


비움으로써 고요를 실천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일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과 직면하기 위해', 그리고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이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월든 호숫가로 향했습니다. 소로는 자연이 주는 고요 속에서 단지 외부 세계를 끊어낸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월든에서의 생활은 단순한 은둔이 아니라, 침묵이 어떻게 사유의 공간이 되고 존재의 뿌리를 탐색하는 출발점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었던 것이죠. 소로가 실천했던 삶은 필요를 줄이면서 비롯된 풍요였고, 불필요한 소음을 줄이며 깨달은 고요였습니다. 이러한 시간은 그에게 내면의 자율성과 사고의 자유를 선물했습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단순한 삶 속에서 맞이한 고요는, 자연의 변화와 순환의 본질을 깨닫게 해주었고, 무엇보다 그가 추구하던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가능하게 했다고 합니다. 소로는 이 시간을 담은 장에 <고독>이라는 부제를 붙여 헌정했습니다. 다음은 그 일부입니다.


"조용히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갑자기 대자연 속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빗속에, 또 집 주위의 모든 소리와 모든 경치 속에 진실로 감미롭고 자애로운 우정이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공기 그 자체처럼 무한하고도 설명할 수 없는 우호의 감정이었다.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여러가지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두 번 다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좋다. 나는 고독만큼 친해지기 쉬운 벗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얼마나 대담한 선언인가요?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소로가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처럼 침묵은 그에게 말이 줄어든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고요 속에서 더 선명해지는 내면의 목소리를 더 깊이 듣는 법을 배우는 순간이었을 것이라 봅니다. 소로의 저서를 보면 그는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뜨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인지, 그가 찾은 이 고요는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禪定)’과도 닮은 점이 많습니다. 선정은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하나의 대상에 깊이 머무는 상태, 즉 산만한 감각을 가라앉히고, 내면의 중심으로 가라앉는 집중의 경지입니다. 소로에게 침묵은 공동체와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뿌리에 닿기 위한 몰입이었다는 점에서, 동양의 수행자들이 말하는 선정과 구조적으로 놀라울 만큼 흡사합니다. 말이 멈춘 자리에 의식은 더 선명해지고, 외부의 자극을 내려놓은 그 고요한 공간에서 그는 ‘자유’라는 내면의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은둔의 산물이 아니라, 깨어 있는 고요 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자유였습니다.


공간 안의 숨은 소리를 찾다

이런 소로의 대칭점에는 존 케이지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연주하기 쉬운 곡을 말하라면 아마 존 케이지의 <4’ 33”>가 손에 꼽힐 것입니다. 이 곡은 태어나서 한 번도 음악을 연주한 사람도 연주할 수 있는 곡입니다. 그냥 시계 하나를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가 피아노 위에 놓고 4분 33초만 기다리면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박수를 받으며 예술가들이 할 법한 담대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면 끝. 참고로 케이지에 따르면 이 곡은 세 개의 악장으로 나뉘며, 각각 30초, 2분 23초, 1분 40초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연주자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연주하기 편한 곡이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이같이 듣기에 곤혹스러운 곡이 없을 것 같네요.

곡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침묵하면, 평소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던 수많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약 1분이 넘어가면 내 몸을 움직이는 것도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수도 있죠. 내가 평소에 머리를 어떻게 넘겼더라? 눈은 몇 초에 한 번 깜빡여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들 수도 있고, 평소라면 무심코 넘어갈 다른 사람의 몸동작이나 소리도 거슬릴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점잖은 옷을 입고 예술을 감상하는 공연장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4분 33초가 지나면 잠수를 마치고 올라온 잠수부처럼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칠 것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불편한 곡을 들으러 돈을 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여러이 오늘 감상한 <4’ 33”>는 우주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밖에 연주되지 못한 곡이고, 또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입니다. 같은 공연장, 같은 관객, 같은 환경을 완벽히 재현해도 그 ‘곡’은 결코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곡을 통해 그동안 ‘소음’이라 무시했던 것들이 곧 음악이었다고 케이지는 말합니다. 우리가 신경 쓰지 않는 순간에도 무언가는 항상 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 역시 말이죠.


이처럼 소로는 숲으로 들어가는 삶을 통해 인위적인 소리를 줄여나가는 삶을 택했고, 케이지는 <4’ 33”>라는 예술이라는 틀 안에서 멈춤을 나타냄으로써 공간 안의 모든 소리를 드러내었습니다. 소로는 자신이 추구하는 고요를 찾았고, 케이지는 대중 안에서는 진정한 고요가 없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는 케이지가 표현한 자연스러운 고요 이전에, 더 깊은 고요가 있을 수는 없을지 상상해 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귀로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감지조차 되지 않는 침묵일 것이겠죠. 시간조차 아직 시작되지 않은 지점. 물리학에서는 이 한계를 플랑크 시간(Planck time)이라고 부릅니다. 5.39x10⁻⁴⁴ 초의 무한히 짧은 순간. 음파가 통과할 수 없는 이 짧은 시간 간격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침묵’조차 성립되기 전의 상태입니다. 정상범위 안에 있는 청각 시스템은 고작 수 밀리초의 차이도 감지해 냅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화하거나 소리가 난 방향을 특정하는 데 필수적인 능력이죠. 우리는 어쩌면 이런 시스템을 가졌기에 대화 사이의 몇 초의 침묵도 어색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플랑크 시간의 침묵은 그런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침묵이 성립되기 위한 구조조차 존재하지 않던 상태로, 그곳에서는 공기 분자도, 진동도, 주파수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는 시간의 틈입니다.


쉼표 하나로도 말할 수 있다면

이 장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은둔자와 소라게에 이야기했습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신을 껍데기 안에 고립시킨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세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막에서 자신을 고립시키고, 후자는 누가 남기고 간 딱딱한 소라 껍데기 안에 자신을 숨깁니다. 어찌 보면 하나의 고독에서 다른 고독으로 숨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둘의 본질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은둔자는 세상을 거부해 자신만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한편, 소라게는 성장함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더 큰 껍데기를 찾아 나섭니다. 남이 남기고 떠난 빈자리에 자신을 끼워 넣는 것. 즉, 소라게는 고립이 아닌 ‘이동과 적응’을 실천하는 것 같습니다. 이 차이는 침묵이라는 행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다시 보게 합니다. 어떤 침묵은 은둔자의 고립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소라게처럼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일 수 있습니다. <4’ 33”>에서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처럼, 음악에서 쉼표의 역할은 중요합니다. 그 누구도 쉼표가 없는 음악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음악에서 쉼표가 연주의 끝이 아니라 클라이맥스를 위한 숨 고르기이듯, 침묵은 공허가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이 아닐까요?


소라게는 자신이 머무를 새로운 공간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은둔자와 소라게, 두 존재가 느끼는 침묵은 서로 다른 의미와 목적을 가집니다. 침묵이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세계와 그리고 근본적인 자신과 마주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비로소 ‘들림’의 의미를 재정의할 수 있습니다. 소리 없는 공간에서 울리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그 순간부터 침묵은 무(無)가 아닌 가능성의 장이 됩니다. 그러니 쉼표 하나로도 말할 수 있다면, 그 작은 틈에서 고요와 소리가 공존하는 미묘한 균형을 마주하길 바랍니다. 침묵은 우리의 귀를 위한 휴식인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시작이며,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는 가장 개인적인 우주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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