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귀에 평소에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면, 우리의 뇌는 즉각적으로 그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청각에서는 이명이나 환청이 바로 그런 현상을 대표하죠. 조용한 공간에서 갑자기 귀 안에서 울리는 삐- 소리나 윙윙거림은 때로는 불안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또한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나 음악이 들린다면 누군가에겐 전능자의 콜링 Calling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겐 끔찍한 경험이 될 수도 있겠죠. 공포 영화에 나오는 천사나 악마의 속삭임 같은 극단적인 장면은 아닐지라도, 길을 걷다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아 무심코 뒤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던 일은 아마 많은 분들이 한두 번쯤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청각계의 문제가 아니라, 뇌 안에 여러 메커니즘의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것에서 비롯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미래를 어렴풋이 그려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향해 축구공을 찬다면, 나는 몇 초 뒤쯤 발을 뻗어야 공을 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그 공이 머리 위를 넘어 이웃의 창문을 깨뜨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그 장면을 대략 그려보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시뮬레이션합니다. 청각도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감각은 뇌 속 여러 신경회로가 얽히고설켜 만들어내는 복합 현상입니다. 뇌는 감각 정보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합니다. 이런 예측시스템은 여러 감각을 통합합니다. 눈앞 음식을 보면 맛과 향까지 떠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문제는, 뇌의 예측이 틀리면 큰 충격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야생과 더 밀접한 생활을 했던 우리의 조상들 시절에는 뇌의 예측시스템은 생존에 직결된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뇌가 진화를 거듭한 끝에 나온 자손이 우리일테니까요. 공포영화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에 뇌가 놀라는 게 그런 이유입니다. 예측 체계를 교란될 때 뇌는 순간적으로 그 예측 실패를 위협으로 받아들이며 강한 공포 반응을 일으키죠. 그 결과, 어떤 이들은 공포 영화를 통해 현실에서는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강렬한 감각과 각성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미지의 소리는 영화처럼 분명한 시작과 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 수 없는 소리가 계속 반복되고 지속되면 뇌는 이 소리를 위협으로 인식해 점점 더 민감해집니다. 이명 환자가 “신경 쓰면 더 크게 들린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뇌가 그 소리를 무시하지 못하고 계속 감지하고 분석하려 하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결국, 머리 안에 갇힌 소리에 스스로가 잠식되어 보이지 않는 상자 안에 갇히게 됩니다.
이 장은 우리 머릿속에 갇힌 소리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물론,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기엔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학술적 세부 사항보다는, 그 현상 뒤에 놓인 감각과 인지의 흐름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또한 타인이 들을 수 있는 객관적 이명 (Objective Tinnitus)과, 신체 감각 이상에서 오는 체성감각성 이명 (Somatosensory Tinnitus)은 다루지 않을 예정입니다.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들은 참고 문헌들을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머릿속에 갇힌 소리, 그 첫 번째: 이명
일단 이명에 대해 알아봅시다. 이명은 단일 질병이 아니라, 다양한 질병이나 건강 문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입니다. 수많은 이비인후과적 문제, 신경학적 장애, 약물 부작용, 턱관절 또는 치과 관련 문제 등 여러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으며, 이 중 청력 손실이 가장 흔하고, 과도한 소음 노출이 두 번째로 흔한 원인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약 40 퍼센트의 환자는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합니다. 특히 주관적 이명은 외부 음원이 없음에도 청자가 소리를 지각하는 현상으로, 전 세계 성인의 약 14퍼센트가 경험하며, 그중 2.7퍼센트는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받을 정도인데도 말입니다. 비율만으로는 실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14퍼센트를 전 세계 인구에 적용하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이명으로 고통받는 셈이죠. 또한 이 수치는 주로 유럽 국가 데이터에 기반한 것으로, 아프리카·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의 미보고율이 반영되지 않아 실제 숫자는 더 높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제 이명의 생리학적 측면을 간략히 살펴볼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제시하는 내용은 최신 연구와 검증된 학술 자료를 토대로 한 것이며, 이명은 아직 활발히 연구 중인 분야이므로 앞으로의 연구 결과에 따라 수정될 여지가 있음을 미리 밝히고 들어가겠습니다.
이제 이명 발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초 기전’과 ‘중추 기전’ 두 가지 큰 틀로 이명을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말초 기전을 알아볼까요? 달팽이관 손상과 이명 사이에는 강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시끄러운 공연장이나 폭음을 들은 뒤 귀가 먹먹해지고 하루나 이틀 정도 이명이 들리는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것입니다. 반복적 소음 노출은 달팽이관 내 모세포 손상을 누적 시키고, 이는 일시적 혹은 영구적 이명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간단히 살펴본 내용을 다시 떠올려 볼 시간입니다. 달팽이관의 바깥 털세포는 작은 증폭기처럼 소리를 키움과 동시에 주파수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안쪽 털세포를 거쳐 청신경으로 전달된 신호가 뇌에서 처음 만나는 곳이 ‘와우핵’이고, 이곳은 등쪽과 배쪽 두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은 바깥 털세포 손상이 안쪽 털세포에서 등 쪽 와우 핵으로 가는 신호를 감소시키고, 이에 따라 뇌에서 신경이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자발 신경 발화’ 현상이 생긴다고 봅니다. 이런 신경 활동이 ‘소리’로 해석되면서 이명이 발생한다는 이론입니다.
그러나 말초 기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례도 많습니다. 1980년대 연구에서 청신경과 전정신경을 절단한 환자의 절반이 여전히 이명 증상을 호소한 것이 대표적인 예죠. 이와 유사한 현상으로 ‘환상지통(Phantom Limb Pain)’이 있습니다. 절단된 신체 부위가 아직 존재하는 듯 느껴지는 통증인데, 뇌가 실제 없는 신체 부위에서 오는 신호를 기대하며 비정상적 신호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중추 기전 이론에 따르면, 청력 손실로 말초 신경 입력이 줄어들면 주변 신경의 억제 신호가 사라지고, 뇌는 마치 환상지통처럼 이명을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청력에 문제가 없는 환자들 중에도 심각한 이명이 보고되므로 말초 기전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죠. 실제로, 최근 연구는 안쪽 털세포-신경 시냅스 문제, 대뇌피질, 시상과 대뇌피질 등, 예전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기관들을 이명의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직 100점짜리 해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이 모든 이론이 거의 공통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기억과 감정 등을 담당하는 변연계 (Limbic System)의 역할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이명을 심각한 고통으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하나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봅시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청력 상태도 비슷하고, 지적 수준이나 교육, 성별, 나이, 그리고 이명을 경험한 시간까지도 흡사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이명 때문에 일상생활이 힘들다며 괴로움을 호소하고, 다른 사람은 “그냥 소리 하나쯤”이라며 덤덤히 받아들입니다. 도대체 이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요?
여기서 잠깐, 내가 대학원생 시절 실습에 나갔을 때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려 합니다. 당시 저는 난청과 이명이 있는 한 할머니를 담당한 선생님 밑에서 실습 중이었습니다. 그날은 보청기 착용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추후 점검 방문이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난청과 함께 동반된 이명은 보청기를 사용하면 예후가 좋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선생님은 할머니께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하고 나서도 이명이 들리시나요?”
할머니의 대답이 정말 인상 깊었습니다. 보청기를 착용한 첫 2주 동안은 이명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약 바로 전날, 그러니까 어제, 남편이 무심코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당신, 아직도 이명이 들려?”
그 순간 할머니는 무심결에, 귀에 손을 가져가 이명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그때부터 다시 조금씩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고 하셨습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
르네 마그리트는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작품으로 지각과 해석의 간극, 즉 현상 그 자체와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의 차이를 다뤘습니다. 이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뇌가 해석하고 감정이 반응하며 몸이 받아들이는 ‘의미’의 집합입니다. 결국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그 소리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 소리에 어떤 이름을 붙이고 어떤 정서를 부여하는가입니다. ‘이것은 단지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이명은, 감각의 그림자를 타고 마음의 실체가 되어갑니다.
처음 이명을 인지한 사람 중 80퍼센트 이상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불쾌한 기억이나 스트레스, 힘든 시기와 맞물리면 이명은 내면의 긴장과 불안을 되살려 더 크게 들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변연계가 위협으로 인식하면 무의식이 과민해지고, 자율신경계가 활성화되어 신체는 긴장 상태에 돌입합니다. 이명은 단순 신호를 넘어 신체 전체가 감각하고 반응하는 고통으로 변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변연계’가 개입합니다. 변연계는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중심 구조입니다. 불쾌한 감정이 이명에 연결되면, 번연계는 그 소리를 위협으로 인식하고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의식적으로는 그냥 귀에서 나는 소리라 여길지 모르지만, 무의식은 점차 과민해지고, 자율신경계까지 활성화되며 신체는 지속적인 경계 상태에 들어섭니다. 그 결과, 이명은 단순한 신호를 넘어 신체 전체가 감각하고 반응하는 실질적 고통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명은 단지 ‘무엇이 들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달라지는, 심리와 생리의 경계선에서 작동하는 현상인 것이죠.
한 가지 자주 듣는 질문 중 하나는 이명에 안 좋은 음식이 뭐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그렇다면 이명에 안 좋은 음식은 무엇이냐,’라고 되묻는 것인 것 같습니다.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이나 미네랄이 부족해져서 이명이 더 예민하게 들리는 경우는 아주 간혹가다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정 약물의 부작용으로 일시적인 이명이 생기기도 하고, 체내 균형이 깨졌을 때 소리가 더 도드라져서 들릴 수도 있어요. 실제로 꽤 많은 사람들이 특정 물질을 섭취한 후 이명이 심해졌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다수의 연구는 섭취 가능한 성분들과 이명 사이에 명확한 인과관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의학적인 이유는 예외다). 일부 사람들에게서 주관적인 증상 악화가 보고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러한 성분들이 이전에 없던 이명을 새롭게 유발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심리적, 환경적 요인이 작용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볼까요? 커피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래도 숙면을 잘 못 하는 편인데, 커피까지 마시면 밤을 완전히 새우게 되는 분이죠. 그런데 어느 날 중요한 미팅에 참석했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진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셨습니다. 공교롭게도 회의는 기대만큼 잘 풀리지 않았고, 그는 평소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날 밤, 그는 새벽이 되도록 잠들지 못합니다. 때마침, 주변은 아주 고요합니다. 그 정적 속에서, 그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고막 속 소리를 인식합니다. 그가 처음 경험하는 이명입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 소리를 '커피 때문'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커피, 수면 부족, 스트레스, 조용한 환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명을 ‘의식하게 된’ 것일 수도 있는 것이죠. 커피를 마신 순간과 그 이후의 사건들은 기억에서 흐릿해졌지만, '이명은 커피 때문'이라는 인식만은 강하게 남습니다. 일종의 인지 편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명 치료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이명이 들린다고 해서 섣불리 걱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는 말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까요. 옛 문헌들을 보면 이명을 치료하는 시도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던 듯합니다. 이집트 제18 왕조의 초기인 기원전 16세기의 파피루스 기록에도 ‘마법에 걸린 귀 (bewitched ear)’를 치료하는 방법이 나와 있고, 기원전 700년 전의 메소포타미아, 혹은 아시리아의 점토판에서도 아편, 벨라도나, 그리고 대마 등을 사용한 이명 치료법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대부분의 방식은 이런 물질들을 직접 귀 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정말 이명 치료에 도움이 되는지까지 적혀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이명 치료에 대해 말할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대개의 경우 이명이 '호전되었다'라는 것은 더 이상 이명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게 되었을 때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환자의 기대치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1장에서 언급했듯이, 행복은 결과에서 기대치를 뺀 것이라는 말처럼 환자가 현실적인 기대를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조언과 더불어, 환자가 궁금해하는 점이나 이명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상세하고 정확한 검사와 진단 결과, 그리고 환자의 성격 등에 맞춰 알맞은 치료법을 사용하고, 무엇보다 이명 개선에 대한 환자의 동기 부여를 이끌어내야 하죠. 또 이명을 겪는 환자들 역시 빠르게 전문가에게 찾아가 상담하길 권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이명을‘자가치료’한 사례들이 나오지만 이 방법들이 당신에게도 적용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저는 이런 자가 치료의 결과를 비난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 클리닉에서 누군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명이 줄었다고 말한다면, 제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축하해주는 것일테니까요. 어떤 특별한 운동을 했든, 기도나 명상을 했든, 그 방법 자체는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명 치료에는 결국 효과만 있으면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Whatever works, works라는 마인드죠. 다만, 주변 사람들이나 온라인으로는 전파하지 말라고만 귀띔해 줍니다. 당신에게는 우연히 맞아떨어진 그 방법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사실 더 걱정스러운 건 이명이라는 한 가지 증상에만 집중한 나머지 진짜 중요한 다른 질병의 신호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이명을 듣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이명을 들으려고 하면 고주파수의 소리가 마치 뇌를 점령하는 듯이 들립니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제가 이명을 다루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그냥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그래도 해결이 잘 안되는 날에는 조용한 음악을 몇 분간 틀어 그 소리에 주의를 옮깁니다. 너무 쉬워 보이는가요?
사실 이것이 이명 재훈련 치료(Tinnitus Retraining Therapy와 인지행동치료(Cognitive Behavioural Therapy)의 핵심 기조입니다. 무슨 성분인지도 모르는 음식이나 건강기능식품에 돈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머릿속에 갇힌 소리, 그 두 번째: 환청
환청의 기조는 이명과 다릅니다. 환청은 청각계의 문제가 아니라 측두엽의 뇌전증, 조현병, 알츠하이머 같은 신경퇴행성 질환, 뇌졸중, 양극성 장애 등등, 기저에 있는 신경학적 또는 정신 병리적 이상들에 의해서 발현될 수 있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측두엽 뇌전증에 의한 환청만 가볍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측두엽의 뇌전증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뉘는데, 환청과 같은 청각적 증상은 주로 바깥쪽 측두엽에 문제가 생겼을 때 나타납니다. 실제로 과거에 진료했던 환자들 가운데는 누가 하루 종일 라디오 토크쇼를 튼 것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호주 퀸즐랜드 시골 산속에서 혼자 사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누가 집 근처에서 라디오를 튼 줄 알고 하루 종일 집 주변을 뒤졌다고 했습니다. 결국 가족을 불러 확인한 끝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주치의와 상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이 천사들의 합창 같은 노래를 듣는다는 환자도 있었습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이제 천국으로 가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웃어넘기기엔 어딘가 슬프고, 씁쓸한 이야기들 입니다.
신경학 전문의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박사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제가 좋아하는 책입니다. 그 안에는 환청과 관련된 인상 깊은 사례 하나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O.C.라는 이니셜로만 소개된 노년의 여성입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요양시설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난청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건강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1979년 1월의 어느 밤, 그녀는 이상하고도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부르고 춤추던 아일랜드 민요가 꿈속에서 울려 퍼진 것이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는 그 노래가 여전히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단순한 꿈의 여운이라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한 소리였습니다. 처음엔 누군가가 라디오를 틀어 놓은 줄 알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만이 아는 그 옛 노래를 하루 종일 틀어주는 라디오 주파수가 있을 리 없었죠. 결국 그녀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추천을 받아 색스박사에게 검사를 받게 됩니다. 검사결과 그의 예상대로 측두엽의 뇌전증이 발견되었고, 뇌졸중에 의해 갑자기 환청이 일어났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환청은 뇌졸중이 해결되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이후 박사와의 인터뷰에서 오래전 노래들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안심이 됨과 동시에 약간의 상실감이 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아름다운 어린 시절의 노래들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이에 대하여 색스 박사는, 음악처럼 감정이 풍부하고 개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얽혀 있는 경험조차도 뇌전증처럼 무질서하고 비감정적인 뇌의 작용으로 촉발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합니다. 이 이야기가 담긴 장의 제목은 '회상(Reminiscence)'입니다.
l'enfer c'est les autres
위의 유명한 문장은 흔히 "타인은 지옥이다," 또는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다"로 번역됩니다. 의미상 큰 차이는 없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Huis Clos)>의 분위기에 더 잘 어울린다고 느낍니다. 이 작품에는 세 사람(정확히는 급사까지 네 명)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지옥이라 불리는 공간, 그러나 유황 불이나 고문 같은 전통적 이미지가 전혀 없는 닫힌 방에 갇힙니다. 이 방에는 어떤 물리적 고통도 없지만, 그 대신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정죄하며, 각자의 과거를 들추어내는 곳입니다. 죽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공간에서, 타인의 시선이 고통이 되고, 피할 수 없는 감시와 판단이 각자를 진정한 지옥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 <닫힌 방>의 줄거리입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옥은 단순히 '타인이 불편한 존재'라는 소박한 인상을 넘어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내가 하나의 객체로 전락해 버리는 경험, 즉 자기 소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죠. 그는 인간이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지만, 그 시선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의 존재를 선택할 책임 또한 우리에게 있다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닫힌 방>은 어쩌면 우리 실존의 너무나도 솔직한 은유입니다. 우리는 결코 온전한 '나'를 정의할 수 없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거울 없이는 진정한 나를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오롯이 우리 자신의 몫이 되죠. 타인의 눈 속에 갇혀 허우적거릴 것인가, 아니면 그 시선 속에서도 나의 자유를 긍정하며 나아갈 것인가. 사르트르가 우리에게 던지는, 절대가볍지 않은 질문입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타인의 시선에 의한 지옥을 곱씹다 보면, 문득 그와는 다른 차원의, 그러나 유사하게 고통스러운 '닫힌 방'이 떠오릅니다. 바로 이명(耳鳴)이나 환청입니다. 이것은 외부가 아닌, 내면 깊숙한 곳에서 울리는 소리이자, 타인의 시선조차 닿지 않는, 철저히 고립된 경험입니다. 그곳은 내가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지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청력을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신에 대한 원망 등, 이런 생각들이 겹칠수록 소리는 점점 더 증폭됩니다.
이 소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나의 귓속을 맴돌고, 때로는 말을 거는 듯 다가옵니다. 그리고 어느새 내 생각과 행동을 은밀히, 그러나 깊이 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결국 그것은 내 안에 살면서 나를 끊임없이 동요 시키는 또 하나의 나, 혹은 나와 함께 사는 낯선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나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 고통을 한층 더 고립된 것으로 만듭니다. 내가 어떤 지점을 지나고 있는지,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스스로 설명하려 할 때마다 이 알 수 없는 소리에 방해받는 기분마저 듭니다.
이명이나 환청은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이지만, 그것을 듣는 이에게는 누구보다 선명한 현실입니다. 어떤 최첨단 기계로도 이 소리를 녹음하거나 공유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나처럼 이 소리를 명확하게 들을 수는 없습니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와 함께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용히 손을 내밀고자 하는 이들이 곁에 있다는 것 또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환청이나 이명은 신경학적 이상이나 생물학적 원인에서 비롯된 병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 소리를 듣는 이들이 겪는 실존적 고통과 고립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합니다. 이명이나 환청이 만들어내는 감각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인간 존재의 복잡하고 섬세한 모습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 고통을 단순한 병리로만 치부하지 말고, 그 속에 담긴 삶의 흔적과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