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소리를 듣는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듣는 것은 사실 소리가 아니라 물체에서 발생한 진동이고, 그 진동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동이 누군가에게는 언어로, 또 다른 이에게는 감정이나 음악으로 인식된다는 것은 언제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소리가 뇌로 가기까지 에는 수많은 관문이 존재합니다. 고막을 울리는 공기의 진동부터 뇌 피질까지의 긴 여정. 그 모든 단계 중에서 저는 가운데귀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실 많은 청각학자들 중, 귓구멍과 달팽이관 중간에 있는 가운데귀, 즉 가운데귀를 특별히 좋아하고, 관심을 두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청각 신경에서 대뇌로, 또 대뇌에서 내려오는 시스템에서 벌어지는 화학적, 생리학적 변화들, 그리고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들에 매혹됩니다. 그에 반해 가운데귀는 비교적 단순하죠. 구조도 명확하고 기능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원한다면 눈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설명이 끝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겨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가운데귀는 우리의 신체 중 가장 작은 이소골 (ossicles)이라는 물리적 장치를 갖고 있습니다. 불과 수 밀리미터밖에 되지 않는 이 뼈들은 외계의 공명을 신체 내 진동으로 바꾸고, 이것을 달팽이관이라는 비선형 기관으로 보냅니다. 이 작은 뼈들은 원래 턱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뼈들은 식사 대신 청취를 선택했고, 더 이상 음식을 씹는 대신, 세상의 소리를 해석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퍼즐을 맞춰 나가다: 진화의 기억
인류는 오래전부터 이 작은 뼈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이 작은 뼈들이 가운데귀 안에 마치 퍼즐처럼 완벽하게 들어맞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수백 년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가운데귀의 진화는 포유류 진화 연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 중 하나로 꼽힙니다. 가운데귀를 이루는 뼈들의 복합체가 아래턱에서 뇌기저부로 옮겨진 과정은 오랜 시간에 걸친 진화의 결과입니다. 이 극적인 변화는 초기 턱관절의 구조 변화와 이소골의 위치 이동을 동반했습니다. 화석 자료들은 초기 포유류의 가운데귀가 현재와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중요한 단서는 바로 유대류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캥거루나 포섬 같은 유대류는 미숙아로 세상에 조금 일찍 나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손가락보다 작은 새끼가 눈도 뜨지 못한 채 스스로 움직이기도 어려운 상태로 태어나는 것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숙함이, 진화의 오래된 비밀을 들춰내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체 포유류는 아래턱뼈와 옆머리뼈 사이의 단단한 턱관절로 입을 벌리고 음식을 씹습니다. 하지만 유대류 새끼는 아직 이 관절이 만들어지지 않았기에, 출생 직후 몇 주 동안은 아주 다른 방식으로 턱을 움직이게 됩니다. 이 작은 생명체는 가운데귀의 망치뼈와 모루뼈를 임시 턱관절처럼 사용합니다. 또한 고막 뼈와 고막은 처음에는 아래턱 안쪽 홈에 거의 수직으로 붙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과정 중 뇌와 머리가 커지면서, 가운데귀 요소들은 점차 아래로 이동하여 뇌기저부 아래의 거의 수평인 위치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젖을 뗀 후 입술이 떨어지면 아래턱은 원래의 수직 위치로 돌아가고, 가운데귀 요소들은 인대에 의해 뇌기저부에 고정된 채 남게 됩니다. 독일의 진화생물학자 마이어(Maier)는 이러한 유대류의 발생 과정이 가운데귀가 아래턱에서 뇌기저부로 이동한 진화 과정을 반영할 수 있다고 추측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태아 속에 숨겨진 진화의 과거 장면을 들춰보는 듯합니다.
화석 증거는 이 이야기에 더욱 확실한 증거를 더합니다. 약 2억 년 전 트라이아스기-쥐라기 경계에 살았던 초기 포유류형 동물인 시노코노돈과 모르가누코돈의 화석을 보면 가운데귀가 아래턱에 붙어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운데귀가 뇌기저부로 이동하는 과정이 쥐라기와 백악기 이후에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죠. 이러한 가운데귀의 분리는 여러 포유류 계통에서 독립적으로, 그러나 유사한 방향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마치 여러 길이 결국 로마로 통하듯, 서로 다른 종들이 비슷한 환경이나 필요에 직면했을 때 각기 다른 시작점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비슷한 해결책을 찾아 발전하는 현상을 수렴진화라고 합니다.
임피던스와 공명의 미학
우리 귓속에는 아주 작은 뼈 세 개가 줄지어 이어져 있습니다. 이름도 참 재미있습니다.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 부릅니다. 각각 망치, 모루, 그리고 말을 탈 때 발을 올리는 발받침(등자)을 닮았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이 작은 뼈들은 소리의 진동을 고막에서부터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치 소리의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릴레이 선수’처럼, 진동을 받아 다음 뼈로 넘기며 점점 강하게 만들어 달팽이관까지 전달합니다. 먼저, 망치뼈는 이름 그대로 망치 모양의 뼈로, 고막에 딱 붙어 있습니다. 공기를 타고 온 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키면, 그 진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 망치뼈죠. 다음 순서는 모루뼈입니다. 망치뼈 옆에 연결되어 진동을 받아 등자뼈로 넘겨주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등자뼈는 말 탈 때 쓰는 등자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 뼈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하며, 진동을 달팽이관이라는 우리 귓속 청각 기관으로 전달하는 ‘마지막 관문’입니다. 이 뼈들에는 또 작은 근육 두 개가 붙어 있습니다. 하나는 망치뼈에 붙은 고막긴장근(tensor tympani), 다른 하나는 등자뼈에 붙은 등자근(stapedius muscle)이 그것입니다. 참고로 등자근은 우리 몸에서 가장 작은 근육이기도 하죠. 이 두 근육은 소리가 너무 크거나 갑자기 크게 들릴 때, 뼈들의 움직임을 줄여 고막이 너무 심하게 진동하지 않도록 돕습니다. 쉽게 말해, 소리를 완충해 주는 일종의 에어백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될 것 같네요. 그래서 씹는 소리나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지 않도록 조절해 주기도 합니다. 가끔 갑자기 한쪽 귀가 약 30초 정도 먹먹해지면서 큰 이명이 들릴 때가 있는데, 대부분 이 고막긴장근이 잠시 이상 작동해서 생기는 현상일 때가 많습니다. 특별한 병 때문이 아니니까 안심해도 좋아요.
가운데귀는 단순한 수용체가 아니라 들리는 것과 의식하는 것 사이에 놓인 구조적 협곡이며, 물리적인 감각이 의미로 전환되는 임계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동이 정보가 되는 순간의 가장 조용한 중재자라고도 할 수 있겠죠. 만약 가운데귀가 없다면, 고막을 통해 들어온 소리의 고작 3퍼센트 정도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운데귀 덕분에 우리는 약 65퍼센트의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임피던스 정합(impedance matching)이라는 정교한 메커니즘 덕분입니다. 임피던스 정합은 에너지가 한 매질에서 다른 매질로 전달될 때, 반사를 최소화하고 전달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두 매질의 임피던스를 일치시키는 과정입니다. 이전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물속에 있을 때 물 밖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임피던스 차이 때문입니다. 공기와 물은 서로 다른 물리적 특성을 가지므로, 음파는 거의 반사되어 버리죠. 인간의 청각 시스템 역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바깥귀로 들어온 소리는 공기 중을 지나지만, 속귀는 림프액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약 가운데귀 없이 직접 음파를 속귀로 전달한다면, 대부분의 에너지는 손실됩니다. 그리고 가운데귀는 이 간극을 효과적으로 메웁니다.
고막에서 가운데귀의 첫 번째 뼈인 등골 판으로 전달되는 압력 증가는, 마치 넓은 주사기의 피스톤을 눌러 좁은 끝으로 압력을 집중시키는 원리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면적 차이에 의해 압력은 약 17배까지 증폭됩니다. 여기에 더해, 가운데귀 안의 뼈들은 마치 시소처럼 레버 역할을 하면서 고막의 미세한 진동을 더 큰 기계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기능을 합니다. 이 두 가지 기전이 결합해, 아주 작은 공기 진동도 속귀로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죠
또한 가운데귀는 내부와 외부의 균형자이기도 합니다. 비행기를 타거나 산에 올라갈 때 귀가 막히는 것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죠?. 이는 가운데귀와 외부 사이의 압력이 갑자기 달라질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고막은 매우 얇은 막이기 때문에 압력 차이가 생기면 안쪽으로 밀리거나 당겨지며 진동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유스타키오관이랍니다.
유스타키오관은 평소에는 닫혀 있지만, 하품하거나 침을 삼킬 때 일시적으로 열립니다. 이때 외부 공기가 가운데귀로 들어가 압력이 조절되며 고막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침을 꿀꺽 삼키거나 물을 마시는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귀가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 드는 것이죠. 이런 압력 조절 능력은 어른들에게는 꽤 안정적으로 작동하지만, 어린아이들의 유스타키오관은 아직 짧고 거의 수평에 가까워 압력 조절이나 분비물의 배출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염도 잘 생기고, 먹먹함이나 통증도 오래 지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소아 중이염은 이 구조적인 이유로 유독 흔한 질환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가운데귀는 단순한 기계적 매개체가 아니라, 외부 세계와 내면세계를 연결하는 관문입니다.
이런 매개체의 중요성은 원자 단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파이온, 혹은 파이 중간자 (π-meson, pion)는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에서 강한 핵력을 전달하는 입자입니다. 두 입자는 너무 가까워지면 융합하거나, 너무 멀어지면 결속을 잃습니다. 이 간격은 계산된 거리이자, 우주가 허락한 안정의 조건인 것이죠. 제가 좋아하는 비유는 김상욱 박사의 저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 있습니다. 여기서 파이온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에게 던지는 농구공으로 비유됩니다. 공을 계속 주고받기 위해 두 입자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고, 덕분에 원자핵은 붕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하죠. 리처드 파안만의 말처럼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 안에서는 안정을 위한 끊임없는 교류가 반복됩니다. 보이지 않는 양자 세계의 입자들이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온 우주를 붙들고 있습니다. 이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세계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중간지대
우리는 지금 정보를 실시간으로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손 안의 화면을 몇 번만 넘기면 뉴스도, 해설도, 누군가의 의견도 순식간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보는 넘쳐나는데도 우리는 점점 더 ‘무엇이 진짜인지’ 헷갈립니다. 이것은 정보를 전달해 주는 매개 구조, 그러니까 설명해 주고 연결해 주는 중간자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많은 언론은 속도와 자극을 좇느라 본질적인 해석보다 자극적인 제목을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때로는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그럴듯한 권위의 이름을 빌려 설명을 대신하려 하기도 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중간자가 아니라, 정답만 빠르게 유통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쉽죠. 정보를 왜곡 없이 전달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을 더 부각하려 들면,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흐려집니다. 결국 남는 것은 과장되고 반복되는 증폭뿐입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점점 지치고, 어느 순간엔 소리만 들리고, 의미는 사라집니다. 우리는 분명히 뭔가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기존의 매개체를 점점 우회합니다. 정답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스스로 질문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말이죠. 누군가 정해준 길보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 것입니다. 높은 교육 수준과 기술의 발전은 이 변화를 더 가속화하고,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 커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넥서스>에서 매개자의 위치를 잃어버린 알고리즘에 대해 비판합니다. 알고리즘의 본래 목적은 정보의 개인화와 필터링, 그리고 이로부터 파생된 긍정적 효율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편향과 왜곡, 그리고 혐오를 심화시켜 사용자에게 편협한, 그리고 일방적인 정보만을 제공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하라리는 주장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객관성을 잃어버리고, 자기 확증적인 정보의 굴레 속에 갇혀 진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정보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런 고찰은 기술 그 자체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기술은 중립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인간의 의지와 선택, 그리고 가치 판단을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정보의 흐름을 어떻게 매개하느냐는, 결국 인간의 태도와 책임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잘못된 정보나 편향된 주장이 특정 집단 내에서 강한 공감을 얻으며 확산할 때,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학습할 수 있습니다. 또한 증오와 혐오의 감정이 온라인 공간에서 증폭되고 공명하며, 익명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조율되지 않은 악기들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듯, 건강하지 못한 공명이 개인과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문득 미하엘 엔데의 <모모>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이 책은 인간이 시간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다룬 철학적인 소설이죠. 작품 속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아가고, 사람들은 효율성과 성과에 쫓기며 진정한 삶을 잃어버립니다. 주인공 모모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어린 소녀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소통을 회복시키는 중재자 역할을 맡습니다. 모모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대신 조용히, 온전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마음을 열게 되며,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냅니다. 모모는 언어로 설득하기보다는 경청을 통한 내적 울림을 이끌어내는 중재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문제, 즉 알고리즘의 왜곡된 매개, 온라인에서의 편향과 혐오의 증폭,를 생각해 보면, 모모의 태도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진정한 중재자는 기술이나 제도가 아니라, 경청과 공감, 책임의 태도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인간의 실천 속에서 발견됩니다. 결국 ‘좋은 매개자’란 불협화음을 조율해 내고, 서로의 이야기를 울림으로 되살려주는 존재가 아닐까요?
스파게티 나무의 진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즐기는 만우절. 그중 가장 유명한 장난 중 하나는 1957년 영국 BBC에서 방송된 ‘스파게티 나무에서 면을 수확하는 가족’에 관한 뉴스입니다. 당시 방송은 스파게티 면이 나무에서 열리는 것처럼 묘사하며, 마치 전통 축제처럼 스파게티를 수확하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심지어 완벽한 스파게티 길이를 생산하기 위한 품종 개량에 대한 논의까지 덧붙여, 많은 시청자를 완벽하게 속였습니다. 분명 만우절이라는 사실과 약간의 상식을 떠올렸다면 웃어넘길 수 있는 해프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방송 다음 날, BBC에는 스파게티 나무에 대해 진지하게 묻는 수백 통의 전화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재미있는 만우절 일화로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무엇이든 전달하는 매체가 가진 강력한 힘과, 그 매체를 향한 사람들의 깊은 신뢰가 얼마나 큰 무게를 갖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귀는 소리를 아주 합리적이고 정교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작은 구조입니다. 과학적으로 완벽한 설계 아래 움직이는 이 구조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학적 해답이자 모델이기도 합니다. 저는 특히 가운데귀라는 존재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매개자라는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공적 영역’을 사람들이 모여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함께 문제를 고민하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이 공간은 단순한 말하기 장소가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이 부딪히고 조율되면서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무대를 말하죠. 그리고 이 무대에는 의미를 전하고 질서를 만들어가는 ‘매개자’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공적 공간이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자, 그 안에서 책임감을 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태도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꾸준한 배움과 경험, 그리고 자기 성찰을 통해 몸에 배는 지적 습관입니다. 다시 말해, 좋은 매개자는 좋은 가운데귀처럼 작동해야 합니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 휩쓸리지 않고, 과학과 상식이라는 기준으로 정보를 골라내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역할이 타인의 이해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끊임없이 돌아보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이런 리더들에게 끌리는 건, 아마 우리가 모두 그런 삶을 꿈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가운데귀는 스스로 듣지 않습니다. 감정을 느끼지도 않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가운데귀가 없으면 소리는 전달되지 않습니다. 왜곡 없이 세상의 소리를 이어주는 존재가 오늘날에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정보의 파도 속에서 서로의 귀가 되어주고, 서로의 목소리를 이어주는 매개자들의 연대가 필요한 시대인 것입니다. 그 연대를 통해 우리는 더 깊이 듣고, 더 정확히 전하며, 더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