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가 깊은 마음과 통찰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매우 사소한 일이나 자연적인 현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첫 시간인 만큼, 이건 채점도 점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Q1. 청각학은 과연 어떤 학문일까요?
이 질문에 성급히 답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역시 졸업 후 임상 현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그 답을, 아니 어쩌면 질문의 의미조차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으니까요. 솔직히 말해 지금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답을 하려면 한참을 더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 질문은 이 책을 시작부터 끝까지 관통하게 될 것이에요. 청각학이라는 학문과 직업의 본질에 다가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청각학자라 하면 흔히 귀를 검사하고 보청기를 조정하는 전문가를 떠올립니다. 때론 클리닉을 찾아와 그 모든 과정을 직접 보고 겪은 분들도 계실 것일 같네요. 위키백과에 따르면, 청각학은 '청각, 균형, 또는 그와 관련된 질병을 연구하는 과학의 한 분야'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 청각학자가 하는 일은 이 정의만으로는 설명이 살짝 부족합니다. 많은 직업이 그렇듯, 실무는 의외로 임상 외적인 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볼까요?
환자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하고, 끊임없이 진료 노트를 정리하고, 전화 상담을 하고, 복잡하게 엉킨 선들을 풀어야 합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블루투스 전문가가 되기도 하죠. 요즘 보청기들은 블루투스를 통해 스마트폰이나 태블릿과 연동되는 모델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아, 그리고 가정 방문 서비스를 한다면 운전도 잘해야 합니다. 클리닉에 내 이름으로 벌금 고지서가 나오는 일은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약 10여 년 전만 해도, 청각학자들은 위키백과나 교과서에 정의된 직무 설명에 적혀 있는 분야에만 집중하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특히 저처럼 정년퇴직까지 수십 년이 남은 사람이라면, 전공 외의 분야들에 얕게나마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분야 든 상관없다고 봅니다. 인문, 예술, 심리학, 경영학, 생명공학, 언어학, 인공지능 등등,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만큼 많습니다. 전공만 파고드는 것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된 것이죠. 한 분야에 깊이 뿌리내린 전문성과, 여러 다른 분야에 걸친 폭넓은 지식이 함께할 때, 그것은 단지 경쟁력을 높여줄 뿐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는 본전공마저 더 흥미롭고 살아 있는 분야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삶과 전문성의 전반적인 해상도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직업을 재정의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희망회로를 돌려보자면, 앞으로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도 청각학에 대해 얕게 나마 이해하고 있어야 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봅니다. 청각학은 더 이상 청각학자들만의 언어로 머물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첫 번째 수업에서는, 왜 우리가 청각학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려 합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이렇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청각의 의미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소리라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야기를 함께 탐험해보려 합니다. 어려운 공식과 이론은 최대한 지양하겠습니다. 복잡해 보이는 명칭들이 가끔 나올테지만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됩니다. 원래 첫 번째 수업은 오솔길을 산책하는 것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이 학문의 맛을 본다는 생각으로 들을 때가 가장 좋다고 보니까요. 이제 소리의 세계로 떠나는 첫 번째 지적 여정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감각의 오케스트라
눈을 감고, 오케스트라를 감상한다고 상상해 볼까요? 처음엔 모든 악기가 하나씩 또렷하게 들립니다. 플루트의 맑은 선율, 오보에의 유려한 흐름, 바이올린의 떨림과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울림. 소리는 층층이 겹쳐고, 전체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입니다. 개별 악기의 소리는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서 우리는 '듣는 행위'가 단순한 감각을 넘어선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처음엔 플루트가 사라지고, 이어서 오보에, 첼로, 팀파니가 하나씩 무대에서 퇴장하듯 자취를 감춥니다. 눈을 떠보니 무대에는 지휘자의 손짓만이 남았네요. 소리는 사라졌지만, 지휘는 멈추지 않습니다. 연주는 더 이상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이어지는 듯한 환상이 공간을 채웁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소리를 듣고 있나요? 그리고 혹시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숨겨져 있을지 생각해 본적이 있나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으라. 그리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라." 아마도 그는 청력이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청력의 저하는 고립이 시작되는 문턱이며, 그 이동을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보건기구 WHO의 테드로스 아드하놈 사무총장은 2024년 세계 청력의 날에 난청을 “보이지 않는 장애”라고 정의했습니다. 청력이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는 능력이라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통찰은, WHO가 난청을 '보이지 않는 장애'라고 정의한 이유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난청은 단순히 물리적인 감각을 잃는 데만 그치지 않습니다. 소리가 사라지는 것보다 더 빨리 사라질 수 있는 것은 바로 관계죠. 평소라면 웃으며 넘어갈 수도 있는 대화를 오해해 누군가와 언쟁할 수 있고, 대화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쳐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난청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에도 미묘하고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감각의 커튼콜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다면 누구나 손쉽게 자신의 청력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앱들은 아주 높은 주파수에서부터 소리를 재생하고, 사용자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들을 수 있는 주파수의 범위가 화면에 표시됩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주파수의 한계점이 낮아지는 것을 볼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수치로 나타나는 결과가 전부는 아닙니다. 측정 결과를 마주한 순간, 어떤 이들은 어딘가 낯선 당혹감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문제 없다고 느끼는데 왜 정상이 아니지?’ 그 질문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감각의 시간성을 깨닫는 자각의 순간입니다.
조악한 비유지만, 다음을 상상해 보면 그 의미가 조금은 전달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어느 날, 언제나 흐릿하게나마 보이던 먼 풍경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보이기 시작한다고 상상해 볼까요? 하루이틀, 시간이 흐르면서 그 어둠은 조금씩 가까이 다가옵니다. 계속 무시하고 현실을 외면하다 보면, 언젠가는 푸르른 하늘의 절반이 검게 물든 광경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죠. 마치 눈앞의 책상은 선명하게 보이지만 그 너머 세상이 점차 어둠으로 잠식되는 것처럼, 우리의 청력도 세포 단위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감각의 침식은 대개 우리 몸속의 작은 변화에서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청력 저하는 달팽이관 내의 세포들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은 세포는 다시 재생되지 않으며, 이 과정은 아무런 자각 증상 없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진행됩니다. 우리의 삶이 지나는 하루하루, 일 년 이년 사이에 우리의 작은 달팽이관 안에서는 소리 없는 죽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단지 생물학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아요. 이것은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침식이며,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감각이 조용히 퇴장하는 과정이죠.
이러한 난청을 극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는 보청 기기들을 사용합니다. 가장 흔히 사용되는 보청기는 소리를 증폭하고 특정 음에 대한 민감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는 바깥쪽 털세포의 역할을 일부 수행하기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그러나 청력 저하가 가운데귀를 통과한 신호를 전기 신호로 바꾸어 청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시키는 역할을 하는 안쪽 털세포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소리를 증폭하는 보청기의 기능만으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소리를 키운다고 해서, 안쪽 털세포가 생성하는 신경 신호의 질이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보청기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인공 달팽이관, 즉 인공와우가 개발되었습니다. 이는 청각 재활 분야의 혁신이고 많은 이들의 삶에 소리를 찾아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정상적인 청력으로의 복귀를 가능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청각 경험
클리닉을 찾는 환자들 가운데는, 청력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크고 간절한 희망을 품고 오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희망은 종종, 지금 당장 어떤 조처를 취하면 청력이 회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청력 손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천천히, 그리고 오랜 시간에 걸쳐 진행됩니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게 하거나, 기대치에 대한 상담 없이 검사 결과를 모호하게 전달한다면, 그만큼 환자의 실망도 클 수밖에 없겠죠. 모건 하우젤이 <돈의 심리학>에서 말했듯, “행복은 단지 결과에서 기대치를 뺀 것”일지도 모릅니다. 기대가 클수록, 결과가 같아도 그 만족감은 줄어들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희망을 꺾지 않으면서도, 환자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의 정보와 정확한 검사 결과, 그리고 현실적인 향후 조치에 대해 친절하고 투명하게 안내해야 합니다. 환자가 그 설명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필요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청력 회복’이라는 모호한 말보다는, ‘청각 경험(listening experience)의 회복’이라는 접근을 더 선호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 논쟁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이 표현이 환자의 현실과 우리의 역할을 더 정직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장애'에 대해 충분히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난청은 외형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오해되고, 때로는 간과됩니다. 누군가가 대화를 놓쳤을 때, 그것은 단순한 부주의로 여겨지기 쉽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점점 작아지는 소리와 함께, 점점 작아지는 삶의 자리가 있습니다. 관계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조금씩 밀려나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늦게 발견되고, 더 천천히 인정되며, 더 조용히 고립됩니다. 소리가 사라지는 것만큼이나, 이해도 사라지고, 공감도 멀어집니다. 그저 조금 덜 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삶의 중심에서 한 걸음씩 멀어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은 단순히 '소리'일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기술은 날마다 발전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기술을 사용하여 소리를 더 정교하게 분석하고, 잡음을 걸러내며, 마침내 인공와우로 청신경을 직접 자극하는 시대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술이 회복시켜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각'이지, 그 감각을 통해 연결되는 삶의 결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들리는 범위가 확장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이 오가는 자리로 들어설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하며, 누군가의 한마디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여유를 되찾는 일입니다. 대화를 놓치지 않고, 그 맥락을 따라가며, 말이 아닌 마음을 듣는 능력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언젠가, 멈췄던 음악이 다시 천천히 흐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예전처럼 모든 악기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더라도, 그 음악 속에 다시 '내가 있다'는 감각.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단절을 넘어선 회복을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연주자들이 사라진 오케스트라의 무대는 고요하지만 조명은 여전히 밝습니다. 지휘자의 손짓은 멈추지 않고, 언젠가 돌아올 연주를 준비하겠죠. 사라진 소리 사이에서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 나는 정말로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은,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에게 조용히 되묻습니다.
소리는 무엇이며, 듣는다는 것은 누구와 연결되는 일일까요?
참고 문헌
Marcus Aurelius, Meditations 6.53
Housel, Morgan. The Psychology of Money: Timeless Lessons on Wealth, Greed, and Happiness. Pan Macmillan,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