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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숨결보다 먼저 온

by Dr Ryan

우리는 언제 처음으로 소리를 들었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청각의 생리학적 시작점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세상과 처음으로 관계를 맺고, 자극을 해석하며,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듣기’라는 행위의 본질에 접근하는 질문입니다.

어릴 적의 강렬한 경험이나 오래된 기억은 비교적 쉽게 떠오를 수 있지만, 내가 처음 들었던 소리를 떠올리는 일은 쉽지 않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듣는다’는 행위는 너무나 익숙해서, 그것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 적조차 없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청력은 우리가 환경을 인지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가장 근본적인 도구 중 하나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 번 쯤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생애의 첫 소리를 듣는 시점은 동물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쥐 같은 동물들은 미숙하게 태어나 출생 후에야 비로소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상당히 발달한 달팽이관을 가지고 있어요. 이 달팽이관의 크기가 궁금하다면 새끼손가락의 손톱을 들여다보면 됩니다. 대략 그 정도 크기입니다. 이렇게 작고 연약한 기관이 외부의 소리와 우리의 인식을 이어주는 연결점이 되는 것입니다. 경이롭지 않은가요?


이번 장에서는, 우리가 처음으로 세상의 소리를 인지하게 되는 그 출발점, 청각 시스템의 형성과 발달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첫 번째 소리의 기억


우리가 처음 들었던 소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그 순간이 기억을 형성하기 어려운 태아 시절에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각은 태아가 가장 먼저 발달시키는 감각 중 하나입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우리 몸은 이미 소리를 들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속귀의 달팽이관은 임신 중후반부터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해, 엄마의 심장 박동, 장의 움직임, 바깥세상의 희미한 소리를 포착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기억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소리의 세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죠.


단순히 달팽이관만 작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꾸는 털세포와, 이를 뇌로 전달하는 청각 신경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정교하게 뻗어 나갑니다. 이 모든 연결은 속귀 형성과 거의 동시에 시작됩니다. 초기의 뇌 신경세포들은 작은 가지처럼 뻗어 나가며, 뇌간의 주요 청각 영역과 연결됩니다. 이때 형성되는 신경망은 달팽이관의 털세포와 청각 피질 사이의 구간들을 정확히 매칭시켜, 나중에 우리가 고유한 음높이를 구별할 수 있도록 주파수 지도(tonotopic map)를 미리 만들어 놓습니다. 놀라운 점은, 이 정교한 연결 구조가 외부 자극 없이도 자발적인 신경 활동에 의해 스스로 형성된다는 사실이에요. 태아가 실제 소리를 듣기 전에도, 청각 세포들은 이미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죠. 그리고 일단 연결이 완성되면 신경망이 유지되고,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선 자극이든, 자발적 활동이든 지속적인 활동이 필수입니다. 누워서 숨만 쉬고 있으면 근육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의 달팽이관은 임신 약 2개월 무렵, 털세포가 분화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발달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에는 소리를 수용하는 시냅스 구조가 형성되며, 몇 주 안에 털세포와 청각 신경 간의 연결도 만들어집니다. 이처럼 태아기의 청각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정밀한 신경 조직과 자발적 리듬의 협연으로 시작되는 생명의 첫 번째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임신 약 25주 차쯤 뇌간의 청각 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부터 태아는 자궁 속에서 소리를 듣기 시작합니다. 뇌파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의 태아는 반복되는 소리에 반응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시기 이후의 태아는 주로 어머니의 목소리나 신체 내부의 소리, 예컨대 심장 박동과 같은 저주파음을 뼈 전도 (bone conduction)를 통해 듣습니다. 반면 500 헤르츠 이상의 외부 고주파수 소리는 양수와 산모의 신체 조직을 통과하면서 대부분 감쇄됩니다. 이 현상을 체험해 보고 싶다면, 수영장에 들어가 얕은 물 속에 조용히 잠수해 보면 됩니다. 웅웅 거리는 저음은 약간이나마 들리지만, 사람의 말소리처럼 고주파가 포함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죠. 태아가 경험하는 세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 이전의 태아가 소리를 명확하게 ‘듣는다’라고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신중한 해석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소리를 감지하는 부동섬모와 덮개막이라는 중요한 구조들이 아직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지만, 소리를 완전히 듣기 위해서는 이 덮개막이 제자리를 잡아야 바깥 털세포가 소리를 증폭하고, 안쪽 털세포가 소리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임신 후기가 되어서야 아주 작은 소리도 감지하고 특정 주파수를 구별하는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태교 음악이나 소리 자극이 아기의 두뇌 발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지만, 앞서 살펴봤다시피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근거는 아직 제한적입니다. 다만, 태교 음악이 태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산모의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교감을 증진하는 긍정적인 측면은 존재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과의 첫 접촉을 듣는 경험을 통해 시작하고, 이후 청각에 관련된 신경계는 우리가 태어남과 동시에 폭발적으로 성장합니다. 비온 뒤, 죽순이 자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청각이 시각보다 먼저 발달하는 것은 단순한 진화적 우연만은 아닐 것 같네요. 왜냐하면 시간과 주파수 정보를 처리하는 능력은 신경망 발달과 인지 구조 형성에 필수적이기 때문이죠.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청각적 변화를 감지하고 그 패턴을 예측할 수도 있는 고차원적인 정보 처리 과정입니다. 뇌의 청각 영역은 언어 중추뿐 아니라 해마(기억), 편도체(감정), 전전두엽(집중과 의사결정)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복합적인 신경 네트워크 덕분에 우리는 단지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서, 그 안의 의미를 해석하고, 맥락을 파악하며, 감정을 읽어내는 타고난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타인의 말에서 의도를 추론하고, 미묘한 어조에서 감정을 감지하며, 심지어 침묵 속의 긴장마저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이러한 것들은 청각이 뇌의 다른 영역과 시너지를 일으킬 때, 감각 그 이상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첫 숨결과 고고성


아이가 태어나면서 처음 듣는 세상의 소리는 그 자체로 강렬한 자극일 것입니다. 자궁 안에서 들었던 둔탁하고 제한된 소리와는 전혀 다른, 선명하고 복잡한 자극이 한순간에 몰려들기 때문이죠. 그리고 공기를 처음 접한 청각은,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세상을 향해 확장됩니다.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히는 것 같이 말이에요.


그러나 이 감동적인 순간에도 청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가장 낮은 저음과 가장 높은 고음에 대한 감각은, 출생 직후부터 최종적으로 발달을 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청각 신경의 수초화(myelination) 과정, 즉 미엘린이라는 물질이 뉴런을 감싸 신경 전달 속도와 효율성을 높이는 발달은 생후 10년 이후까지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초기에는 시냅스 생성이 급격히 증가하고, 이후 성장과 경험에 따라 불필요한 시냅스는 제거(pruning)되어 뇌가 더 효율적으로 변합니다. 즉, 청각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학습의 통로로 작동하면서도,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감각인 것이죠.


우리가 어떤 소리를 의미 있게 인식하려면, 뇌까지 이어지는 청신경이 얼마나 정밀하게 소리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특히 저주파 소리의 경우, 신경은 마치 박자에 맞춰 춤을 추듯 소리의 리듬을 따라 움직입니다. 이를 ‘위상 잠금(phase-locking)’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음파의 박자와 패턴을 정교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공연장에 가서 가수의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박수는 치는 것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또한 뇌는 소리의 크기에 따라서도 반응 방식을 바꿉니다. 조용한 소리에 대해서는 신경이 특정 주파수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리가 커지면 더 넓은 주파수 대역을 포괄하면서 정보를 받아들이죠. 이렇게 조정된 반응 덕분에 귀는 마치 정밀한 주파수 분석기처럼 작동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듣는다’라고 느끼는 소리는 하나의 신경이 아니라, 수많은 뉴런이 함께 만들어내는 ‘떼창’에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아’ 소리를 낼 때는 그 소리에 해당하는 주파수들이 활성화되고, 다양한 신경들이 동시에 반응하면서 그 패턴이 뇌에 전달됩니다. 그런데 소리가 지나치게 크면 이 정교한 패턴이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콘서트장에서 스피커 바로 옆에 서서 있을 때보다, 약간 떨어져 들을 때 소리가 더 명확하게 느껴지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말소리처럼 빠르게 변하는 소리를 이해할 때는 ‘시간 정보(temporal coding)’가 중요합니다. 이 정보는 단순히 소리가 크고 작은 것보다, 말의 흐름과 문맥을 이해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라는 문장을 띄어쓰기 없이 말하면 “아버지가방에들어가신다”가 됩니다. 만약 시간 정보가 사라진다면, 우리는 소리를 듣고도 그 뜻을 즉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맥락을 고민하는 이 ‘몇 초의 지연’이 대화의 흐름 전체를 끊어버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미를 이해하는 사이, 화제는 이미 다음으로 넘어가 있던 적은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 같네요. 이처럼 시간 정보는 듣기의 정확도뿐 아니라, 대화에 머물 수 있는 능력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보청기가 아무리 소리를 키워준다고 해도, 이 시간적 정보를 잘 전달하지 못하면 말소리가 또렷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로 난청이 있는 사람에게는 크게 말하는 것보다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뇌는 소리의 크기를 한두 개의 신경 반응만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다양한 민감도를 가진 신경들이 각각의 구간을 나눠 맡고, 소리가 커질수록 더 많은 신경이 함께 작동합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여러 사람이 나눠 드는 것처럼, 이렇게 집단으로 반응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크기의 소리를 더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청각 발달의 과정은 단순히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라는 이분법적 기준이 아니라, 점진적 인지 기능의 개척을 보여줍니다. 어버 (Erber) 박사는 이를 청각적 위계 (auditory hierarchy)로 규정하며, 탐지 (detection), 분별 (discrimination), 인식 (identification), 이해 (comprehension)라는 네 가지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탐지는 단순히 소리의 존재를 감지하는 단계이며, 분별은 소리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 인식은 특정 소리나 단어를 식별하는 것, 그리고 이해는 해당 소리가 갖는 의미나 맥락을 파악하는 고차원적인 인지 능력을 말합니다. 이 위계는 청각이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학습과 발달을 통해 사회적 연결과 의미 해석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죠. 이렇듯 ‘듣는다’라는 것은 정보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사회적 연결을 위한 능동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통해 타인의 존재를 인지하고, 말과 음악을 통해 감정을 주고받으며, 침묵을 통해 상호작용의 여운을 감지합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의 첫 순간은 이렇듯 아주 작은 울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소통의 의미란


스마트폰은 아침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우리를 타인과 연결하고, AI는 실시간으로 배우지 않은 언어를 번역하며, SNS는 지구 반대편 사람의 생각마저 눈앞에 펼쳐놓습니다. 기술적으로는 '최고의 소통 시대'가 도래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이 불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단어는 넘치는데 이해는 부족하고, 연결은 쉬워졌지만, 공감은 멀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정작 나의 생각에는 확신하기 어려운 세상인 듯합니다. 존 스튜어트 밀이 그의 저서 <자유론>에서 동시대 사람들을 "신념이 결여되었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확신은 못 하지만, 무엇인가 자신의 의견을 갖고 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 줄을 알지 못한다"고 비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결국 우리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방식으로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연결은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할까요? 단순히 '우리'라는 말을 쓴다고 해서 그것이 곧 공동의 의도를 공유한다는 뜻은 아닌 것 같다. 철학자 존 설이 말했듯이, "우리가 A를 하자"는 식의 표현은 집단적 의도의 표현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봅니다. 서로의 의도를 인식하지 않거나, 그 의도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공유된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공유된 주체성은 구성원 간의 기호들이 동일한 맥락과 의미로 해석되며, 상호 이해 속에 작동할 때 성립하는 것입니다.


소리는 들리지만, 의미는 스쳐 지나가는 시대


유발 하라리는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류 문명 발달의 핵심 동력으로 '상상된 질서(imagined orders)'를 주목합니다. 인간은 허구를 믿는 능력과 이를 퍼뜨리는 언어를 통해 현실 너머의 세계를 약속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대부분의 동물이 할 수 없는 큰 규모의 협력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국가, 인권, 돈의 가치 등이 실체가 없는 이야기임에도 우리가 그것을 실제처럼 받아들이기 때문에 현실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하라리는 이것이 인간이 '소통하고 연결되는 존재'로 진화해 온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회를 이어주는 연결의 위기는 단순히 말과 글이라는 매개체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듣는 능력에도 질문이 던져질 수 있습니다. 단순히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과 누군가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특히 청력 손실을 겪는 사람들에게 진짜 소통은 여전히 어렵습니다. 많은 이들이 상대의 말을 진짜로 듣지 않습니다. 귀는 열려 있어도 마음은 닫혀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고도 합니다. 스마트폰 알림에 정신을 빼앗기고, 대화 도중 머릿속으로 반박을 준비하는 우리는 듣는 대신 '대기'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릅니다.


대만 원작을 리메이크한 영화 <청설>은 ‘대화란 무엇인가’를 아름답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세 명의 주인공은 수어를 통해 즐겁게 대화를 나눕니다. 버스의 소음이나 떨어진 물리적 거리는 그들에게 아무런 장벽이 되지 않습니다. 오해도 없죠.

그 이유는 단지 수어가 시각적인 언어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가 말하듯, 겉보기에 멀쩡해도 말이 안 통해 답답한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단절의 결과는 분명하죠. 피상적인 관계, 끊긴 소통, 깊어지는 외로움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지 않기 때문에 고립됩니다. 소통은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일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음향, 보청 기술들은 우리의 귀를 대신해 수많은 소리를 증폭시키지만, 상대의 내면과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행위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행위가 사라질 때, 우리는 더 깊은 공감과 이해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진정한 소통의 회복: 경청의 힘


그렇다면, 피상적인 연결을 넘어 진정한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소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 속에서 인간 본연의 '듣는 능력'을 어떻게 되살리고 키워 나갈 수 있을까요? 어쩌면 해답은 우리가 처음 세상의 소리를 들었던 그 순간의 순수한 울림,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고 교감하려는 원초적인 욕망을 되새기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시작은 아마 순수한 의미의 경청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경청이 가진 힘은 많은 이들이 강조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빠르게 반응하도록 훈련받았고, 정적을 기피하며, 말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죠. 하지만,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언어와 침묵 속의 의미를 포착할 정도로 경청할 수 있다면 우리는 소음 속에서도 진실을 구별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소리를 흡수하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방의 세계에 몰입하는 능동적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 몰입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공감이 싹틀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청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관계를 회복하고 사회적 단절을 넘어서는 필수적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으로 남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경청의 힘을 되찾을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궁극적으로는 더 깊은 신뢰와 유대를 형성하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술의 발달 속에서도 인간 본연의 따뜻함과 연결성을 잃지 않고 더욱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믿습니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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