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더 행복해질 거야. 네 시가 되면 나는 벌써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될 거야."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위의 인용문은 <어린 왕자>에서 나오는 여우의 대사입니다. 이 짧은 고백은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여우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보여줍니다. 이는 비단 어린 왕자와 여우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 역시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온 신경을 기울이기 마련입니다. 택배를 배달하는 기사의 발걸음, 익숙한 자동차의 엔진소리, 혹은 대문을 여는 열쇠소리 등을 생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이런 익숙한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혹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짐작할 수 있죠. 소리를 통해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시간보다 앞서는 듯한 착각마저 듭니다. 우리는 시각 없이도 소리만으로 주변 공간을 인식하고, 그 안에 있는 사물이나 사람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귀로 보이지 않는 공간의 지도를 그리는 능력과 같습니다. 공간 자체의 특성을 파악하는 능력도 있다. 눈을 가려도 우리는 텅 빈 강당과 카펫이 깔린 방을 구분해 낼 수 있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면 많은 애호가들이 '공간감'을 이야기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소리만으로 ‘누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 수 있는 걸까요? 또, 소리만으로 어떻게 공간의 크기와 형태까지 짐작할 수 있는 걸까요? 이번 장에서는 소리를 통해 방향과 공간을 인지하는 놀라운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 보겠습니다.
방향 찾기
우리 인간을 비롯한 많은 동물은 양쪽 귀를 활용하는 ‘양이(binaural) 시스템’을 통해 소리의 방향을 감지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귀가 두 개인 덕분에 가능한 일이죠. 이유는 모르지만, 이왕 가지고 태어난 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시각이 제한되는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 동물들을 관찰하면, 이 능력이 얼마나 정교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쥐나 올빼미 같은 종들은 눈앞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장애물을 피해 날아다니며, 움직이는 먹잇감의 위치를 놀랄 만큼 정확하게 파악합니다. 또한 많은 동물은 소리를 통해 짝을 찾습니다. 몸길이가 불과 몇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개구리나 곤충들에게는 넓은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면서 짝을 찾는 것보다, 비록 천적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할지라도, 상대방이 들을 수 있는 특정 주파수로 위치를 알리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동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방향을 익히기 시작합니다. 겨우 목만 가누는 아기들이 소리가 들리는 쪽을 정확하게 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능력은 많은 동물의 유전자 레벨에 적혀 있고, 또한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너무나도 당연한 감각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리의 위치를 파악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한 경로를 거칩니다. 이를 한번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방향: 시간과 차이를 읽다.
첫 번째는 ‘양이 시간차(Interaural Time Difference, ITD)’입니다. ITD는 소리가 양쪽 귀에 도착하는 시간 차이를 뜻합니다. 소리는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전달되는 진동이라, 어느 한쪽에서 소리가 나면 가까운 귀에 먼저 도착하고 반대쪽 귀에는 아주 미세하게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걸 쉽게 이해하려면, 물이 담긴 대야를 떠올려보면 됩니다. 한쪽 수면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면, 물결은 손 가까운 쪽부터 먼저 퍼져 나가고 아주 잠깐 뒤에 반대편까지 도달합니다. 공기의 파장인 소리도 이와 비슷하게 전달됩니다. 우리 뇌는 이 아주 작은 시간 차이를 감지해서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냅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시간 차이는 약 10마이크로초 내외로, 즉 십만 분의 1초에 해당하는 아주 짧은 시간이죠. 이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능력 덕분에 동물들은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나는지 구분할 수 있습니다. ITD는 특히 1,500헤르츠 이하의 낮은 주파수 소리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며, 연구에 따르면 1,000헤르츠 대역에서는 약 3~4도 정도의 작은 오차로도 소리 방향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각도기를 떠올려 보면, 2도에서 4도라는 각도는 정말 작죠. 예를 들어, 정면을 0도라고 했을 때, 3도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아주 살짝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돌린 정도입니다. 이 작은 차이까지 우리 뇌가 구분해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덕분에 우리는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아주 정밀하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주변 환경 속에서도 원하는 소리를 정확히 찾아내고, 그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죠.
두 번째는 양이 강도 차(Interaural Level Difference, ILD)입니다. 이번에는 소리의 크기 차이에 주목합니다. 소리가 옆에서 들려올 때, 우리의 머리는 하나의 걸림돌이 되어 그림자 효과(Head Shadow Effect)를 만듭니다. 그 결과, 소리의 방향 쪽 귀에는 더 강하게, 반대쪽 귀에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소리가 닿습니다. 뇌는 이 미묘한 강도 차이를 단서로 삼아 소리의 방향을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 효과는 단순히 소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에만 달린 게 아닙니다. 머리 크기, 소리가 오는 방향, 그리고 소리의 높낮이인 주파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히 소리의 음이 아주 높을 때, 즉 ‘고주파’ 소리일수록 ILD 효과가 더 뚜렷해집니다.
왜 그럴까요? 소리는 파동인데, 파동에는 길이가 있습니다. 이 길이를 파장이라고 부르죠. 파장은 소리의 높낮이, 즉 주파수가 높으면 짧아지고, 낮으면 길어지는 속성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온도 20도일 때, 500Hz라는 낮은 소리는 약 68센티미터나 되는 긴 파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4,000Hz라는 높은 소리는 겨우 8.5센티미터 정도의 아주 짧은 파장입니다. 파장이 길면 소리가 머리를 쉽게 돌아 반대쪽 귀까지 갈 수 있기 때문에, 저음 소리에는 양쪽 귀 크기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반대로 고음 소리는 파장이 짧아 머리에 가로막히기 쉽고, 그래서 한쪽 귀가 더 크게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 덕분에 우리 뇌는 고음에서 소리가 어느 쪽에서 오는지 훨씬 더 잘 알아차립니다. 특히 쥐 같은 작은 동물들은 머리가 워낙 작아서 들어야 하는 파장이 머리둘레보다 훨씬 깁니다. 그래서 소리 도착 시간 차이 같은 단서를 이용하기 어렵고, 대신 ILD 같은 크기 차이 단서를 더 극단적으로 활용해 방향을 감지하는 것이죠. 소리는 물리의 언어로 퍼지지만, 동물들은 저마다의 귀로 그 뜻을 번역하는 것이죠.
소리의 착각, 방향의 진실, 그리고 뇌가 만드는 소리의 입체감
하지만, ITD(양이 시간차)와 ILD(양이 강도차), 이 두 가지 단서만으로는 소리의 방향을 완벽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소리는 단순한 ‘점’이 아니라, 파동 즉,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진동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양이 위상차(Interaural Phase Difference, IPD)’입니다. 말 그대로 소리의 파동이 양쪽 귀에 도달할 때의 위상 차이, 즉 파동이 얼마나 ‘빠르게’ 또는 ‘느리게’ 도달했는지를 뇌가 비교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방식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습니다. 파동은 주기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에, 뇌는 위상 차이를 보고 그것이 첫 번째 파동의 차이인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파동의 차이인지 혼동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죠. 마치 시곗바늘이 12시에서 3시로 옮겨졌을 때, 한 번만 움직인 것인지, 한 바퀴를 돌아 다시 3시를 가리키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에 비유하면 되겠네요. 이런 모호성 때문에 뇌는 때로 소리의 실제 방향을 혼동하게 됩니다. 이를 ‘혼동의 원뿔(cone of confusion)’이라 부릅니다. 예를 들어, 특정 조건에서는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동일한 ITD와 ILD를 만들어낼 수 있어서, 두 소리를 구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현상은 특히 저주파보다 고주파에서 더 두드러집니. 왜냐하면 고주파는 파장이 짧아 동일한 거리 차이에서도 위상 변화가 더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뇌가 정확히 ‘몇 번째 반복’인지 추적하기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청각 시스템은 마지막 단서를 하나 더 활용합니다. 바로 ‘단일 귀 스펙트럼 단서(monaural spectral cues)’, 또는 더 전문적으로는 ‘머리 관련 전달 함수(Head-Related Transfer Function, HRTF)’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름은 복잡하게 들리지만, 원리는 놀랄 만큼 직관적입니다.
앤디 위어의 SF소설 <프로젝트 헤일메리>에는 에리디언이라는 외계 종족이 등장합니다. 지구의 심해와 유사한 극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빛 대신 소리로 세상을 인식합니다. 책에서 그들의 언어는 음표로 표기되며, 지구인에게는 마치 음악처럼 들리는 독특한 형태로 소통합니다. 이는 마치 수어가 시각에 의존하는 언어이듯, 특정 감각 수단이 언어와 인지 방식을 지배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에리디언 로키의 온몸이 마이크처럼 작용한다고 표현하는데, 이는 이들 종족이 소리를 듣는 것 뿐만이 아니라 음파가 몸의 각기 다른 부위에 도달하는 시간차를 감지하여, 사물의 위치와 환경을 탐색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러한 감각 방식을 상상하기 어렵게 느껴진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에리디언들 역시 지구인이 ‘빛을 본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도 어떤 관점에서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단지 한 방향에서 날아온 소리가 직선으로 귀에 꽂히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죠. 소리는 공기 중을 파동 형태로 퍼지며, 머리, 어깨, 바깥귀의 구조에 부딪히고, 이때 생기는 반사와 굴절은 소리의 주파수 성분을 아주 미세하게 바꿔 놓습니다.
바로 이 주파수 왜곡 패턴을 분석해 뇌는 ‘소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추론합니다. 이것이 바로 ‘머리 관련 전달 함수(Head-Related Transfer Function, HRTF)’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왼쪽 귀, 오른쪽 귀로 방향을 구분하는 게 아닙니다. 소리가 머리와 어깨, 그리고 복잡한 모양의 귓바퀴를 통과하면서 생기는 미세한 반사와 굴절, 그 작은 차이까지도 뇌는 놓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단일 귀만으로도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는 메커니즘을 우리는 ‘단일 귀 단서(monaural spectral cues)’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소리를 듣는다는 건, 마치 눈을 감고도 세계를 그려보는 일과도 같습니다. 단지 ‘음량’이나 ‘음높이’만이 아니라, 그 소리가 어떤 길을 돌아왔고, 어떤 표면에 부딪혔는지, 몸이 그 흔적을 읽어내는 것이죠. 인간의 귀는 곧 작지만 정교한 레이더입니다.
소리의 지도
우리의 청각계는 단순히 소리를 듣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멀리서, 어느 방향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가오는지를 실시간으로 분석합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공간 지도를 그리는 듯한 작업이죠. 이는 GPS와도 비슷합니다.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위성 신호를 받아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계산하듯, 우리의 뇌 역시 양쪽 귀에 들어온 미세한 시간차와 음색 차이만으로 머릿속 공간 지도를 그려냅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는 구글 맵, 내비게이션, 위성사진 같은 정교한 지도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지만, 인간의 뇌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지도 제작자의 역할을 해왔습니다. 과거의 뱃사람들이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고, 유목민들이 지형과 바람, 냄새를 따라 길을 찾았던 것처럼, 우리의 청각도 주변 세계의 소리를 단서 삼아 스스로 길을 찾아왔습니다.
심지어 눈을 감은 채로도 우리는 소리만으로 방의 구조를 짐작하거나, 누군가의 발소리가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있어도 우리는 주변 소음 속에서 친구의 목소리를 구분해 내고, 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의 방향을 예측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지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도는 단지 소리의 크기나 높낮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 공간, 방향성이라는 세 가지 차원을 모두 아우르는 살아 있는 지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간다 해도, 그것을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아차리는 일은 오직 뇌만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마치 흩어진 점들을 선으로 이으며 하나의 지도를 완성하듯, 우리의 뇌는 소리라는 단서를 하나하나 모아 공간 속 풍경을 재구성합니다. 그 여정은 귀에서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작업은 뇌 깊숙한 곳에서 이루어집니다. 바깥귀와 가운데귀를 거쳐 달팽이관에 도달한 소리는, 그곳에서 전기 신호로 바뀌어 청신경을 타고 뇌간으로 향합니다. 첫 번째 관문은 ‘와우핵’이라는 구조다. 여긴 단순한 중계소가 아니라, 오히려 전문적인 분류 센터에 가깝죠.
들어온 소리는 이곳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서로 다른 신경세포에 전달됩니다. 어떤 세포는 소리의 높낮이를, 어떤 세포는 소리의 시작 시점이나 세기를 포착합니다. 이는 마치 하나의 음악을 수십 개의 트랙으로 나누어 각각 분석하는 과정과도 비슷합니다. 그다음 단계는 ‘상 올리브핵 복합체(Superior Olivary Complex)’입니다. 이곳은 특별한 기능을 담당하는데, 청각 경로 중 처음으로 ‘양쪽 귀에서 동시에 들어온 소리’를 비교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비교는 생각보다 정밀합니다. 좌우 귀에 도달한 소리의 시간차(ITD)나 강도차(ILD)가 고작 몇 밀리초, 몇 데시벨밖에 나지 않아도 뇌는 그 작은 차이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누가 뒤에서 이름을 불러도 곧장 방향을 파악할 수 있고, 소리만으로도 공간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 시스템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상 올리브핵에서 정밀하게 인코딩된 정보는 하구(Inferior Colliculus)라는 중간 관문을 거쳐, 대뇌의 청각 피질로 도달합니다. 이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는 비로소 소리를 단순한 음파들의 하모니가 아니라, 공간에 대한 정보로 경험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정밀한 시스템이라도 오류는 생길 수 있다. 예컨대 뇌졸중이나 알츠하이머 같은 뇌 질환이 생기면, 뇌가 소리의 방향을 제대로 계산하지 못할 수 있다. 반대로 뇌가 멀쩡하더라도, 환경 자체가 방향 인지를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동굴처럼 잔향이 많은 공간에서는 소리가 반사되어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들리는 듯한 착각을 줍니다. 직접 소리와 반사음이 뒤섞이기 때문이죠. 비슷한 현상은 음향 설계가 부실한 강당이나 콘서트홀에서도 발생합니다. 특정 벽면에서 반사된 소리가 유독 강하게 들리면, 우리는 그쪽에서 소리가 난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또한, 도시의 시끄러운 소음처럼 배경 소리가 너무 크면, 우리 뇌가 소리의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결국 청각도 맥락의 예술이기 때문입니다. 뇌와 환경, 소리 사이의 절묘한 조율이 깨질 때, 우리는 방향을 게 됩니다.
청각의 기억법
우리의 뇌는 단지 방향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어디서 들었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를 함께 저장하는 것 같습니다. 청각은 공간을 기억하는 감각이며, 기억은 소리를 따라 길을 내죠. 똑같은 방에서 똑같은 음악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그 기억을 따뜻하고 포근한 감정으로 기억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지루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기억하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청각계는 이렇게 물리적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것을 넘어서 감정과 기억을 수반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오디세우스가 긴 모험 끝에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오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는 상황 파악을 위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몰래 잠입하기에 이릅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늙고 병든 충견 아르고스만은 주인을 알아보는 장면이 나오지요.
“오랫동안 보지 못하던 오디세우스가 나타나자 세웠던 귀를 늘어뜨리고 기쁜 듯 꼬리를 흔들었으니 일어서서 전처럼 주인에게 접근할 기력은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그를 보고 남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20년 만에 주인과 만나자마자 늙은 아르고스는 저세상으로 떠났다."
토마스 불핀치 <신화의 시대: 그리스로마 신화>
이 이야기는 주인을 향한 아르고스의 충성심과 사랑을 넘어, 소리가 물리적인 정보 전달과 함께 전달하는 기억의 울림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오디세우스의 목소리는 긴 시간을 지난 기다림의 의미였고, 주인의 존재를 확신하게 하는 단서였습니다. 시각적인 정보로는 알 수 없었던 주인의 존재를 아르고스는 청각의 힘을 빌려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청각적인 정보를 통해 누군가의 존재를 확인하고, 특정 공간에 대한 인상을 형성하며, 때로는 잊었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소리는 매질 분자들의 집단적인 진동, 즉 압력의 파동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동에 불과한 소리는 어떻게 우리 같은 생물의 감정과 기억에 깊게 개입할 수 있는 것일까요?
프루스트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시는 순간,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냄새나 맛 같은 감각 자극이 오래된 기억을 단번에 불러오는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릅니다. 원래는 후각과 미각을 중심으로 정의된 개념이지만, 익숙한 음악이나 소리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기억과 감정을 일깨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뇌는 소리를 듣는 것을 넘어 소리를 일시적으로 기억하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청각적 작업 기억 (Auditory Working memory)이라고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누군가에게 무작위적인 숫자 (예를 들어 12, 3, 5, 2, 11) 등을 주고 그것을 큰 숫자부터 나열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측두엽에 있는 청각 피질은 소리가 갖고 있는 정보를 분석합니다. 그리고 청각 피질은 대화처럼 의미 있는 소리와 단순한 소음을 구분하고, 음악의 음정이나 박자를 파악하는 등 소리의 핵심 정보를 처리하죠. 이와 동시에, 청각 피질은 기억, 감정, 언어 등 다양한 인지 능력과 관련된 다른 뇌 부위들과 유기적으로 연계합니다. 우리 뇌에서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경로 중 청각 경로는 해마(Hippocampus)와 편도체(Amygdala)와 같은 감정 및 기억 관련 영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해마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고 저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편도체는 감정, 특히 공포나 즐거움과 같은 강한 감정을 처리하고 기억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소리가 이러한 뇌 영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 소리를 들었을 때 의식적인 노력 없이도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비자발적으로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아르고스에게도 오디세우스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강렬한 감정과 기억의 촉매제이지 않았을까요?
이번 장 도입부에 인용했던 <어린 왕자>의 여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만약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하게 될 거야. 그러면 나에게 너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될 거고, 너에게도 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여우가 될 거야.”
여우의 이 말처럼, 소리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지를 넘어 관계와 유대감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강력한 매개체가 됩니다. 아르고스가 오디세우스의 목소리를 통해 주인을 알아보고, 충성을 재확인했듯이, 우리 역시 다른 이들과의 대화 혹은 함께 듣던 음악 등을 통해 친밀감을 느끼고, 관계의 깊이를 더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심장을 울리고, 친구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 시절의 추억을 생생하게 되살립니다. 소리는 이처럼 우리에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가 어디서 오는지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소리는 타인과 나 사이를 연결하고, 마음의 거리를 줄이며,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믿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