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1. 소리를 잇는 생명들

by Dr Ryan

문해력은 문화적 산물이며, 우리가 읽기를 배움에 따라 서서히 분명한 모습을 갖추는 뇌의 특정 영역에 의해 뒷받침된다. 언어 역시 문화적으로 진화된 하나의 능력이다. 언어 기능에 특화된 기존 신경 기관에 의지해 말하기나 수어를 배울 때, 우리는 비로소 언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다…

모텐 H 크리스티안센 & 닉 체터 <진화하는 언어>






예전에 반려견과 함께 집 근처 숲을 산책한 적이 있습니다. 산뜻하면서도 차가운 공기를 머금은 이른 오전의 숲은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어 조용했습니다. 빽빽하게 하늘을 가린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을 즐기며 걷다 보니, 문득 수렵채집을 했던 우리 선조들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저는 작은 몰티즈를 산책시키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지만, 고대 인류는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늑대에서 분화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의 선조와 함께 사냥감을 찾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겠죠.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주변 풍경이 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도 짐작하기 어려운 위치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소리, 풀숲 너머에서 나는 바스락거림, 저 멀리서 냇물이 흐르는 가녀린 소리 등, 평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던 소리들이 갑자기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문득 숲 어귀에 붙어 있던 '여우를 잡기 위해 약을 놓는다'라는 공고문도 떠올랐습니다. 분명 안전한 동네 숲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긴장감이 높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과연 우리 조상들, 그리고 고대 인류는 이런 긴장감 속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냈을까?


인간과 다른 동물의 차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언어라고 답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 몸을 덮고 있는 털이나 비늘처럼 겉으로 쉽게 구별되는 요소들은 상대적으로 덜 언급됩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은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동물들은 잠시 논외로 하겠습니다). 아니면 다른 종들과의 차이, 예를 들어 악어와 인간의 차이는 너무나 명백해서, 굳이 언어 외의 다른 요소를 강조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죠. 혹은 '언어'라는 특별한 능력을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으로 간주하고픈, 호모 사피엔스의 자존심이 반영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현생 인류는 자신을 스스로 ‘호모 사피엔스,’ 즉 ‘슬기로운 사람’이라 칭합니다. 학명의 타당성은 차치하고라도, 스스로를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해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발음할 수 있는 소리를 조합해 규칙을 만들었고, 이는 공동체의 공유된 약속으로 자리 잡으며 언어와 문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인류로 하여금 과거를 보고 미래에 정보를 전달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법칙 안에서 소통하고 반목하며 역사를 써간다. 이제 우리 인간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두 발로 걷는다는 것


두 발로 걷는 종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나무에서 살던 호미닌들이 여러 환경 변화와 선택압에 의해 땅으로 내려왔을 때, 아마도 그들은 세상을 인식하는 모든 것이 바뀌었을 것입니다. 수풀 너머로, 조금 더 멀리 보기 위해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든 순간, 그들에게는 숲에서와는 다른 청각적 자극이 시작되었을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많은 연구들에 의하면, 초기의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에 나타난 것은 약 20만 년에서 30만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정장을 입히고, 우리가 사는 도시의 중심부에 놔둬도 어색하지 않은 행동 양식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약 5만에서 10만 년 전 쯤이라고 합니다. 이쯤의 인류는 인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현대의 우리와 동일한 능력을 갖췄으며, 집단을 이루고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만 년 전의 동굴에 그려진 작품들은 그 당시에도 예술혼 (혹은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태울 정신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들의 파라다이스는 알다시피 점진적으로 사라졌습니다. 많은 연구들은 호미닌, 특히 6만 년 전부터 시작된 호모 사피엔스의 대규모 이동은 그 당시 일어난 급작스러운 기후변화에 의한 결과를 가리킵니다. 타고난 모험심이 아닌, 아마도 생존을 위한 이동은 호모 사피엔스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는 결과를 낳은 것이죠.


우리가 소리를 듣기 위해 직립보행을 시작한 것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나무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청각계를 비롯한 우리의 감각계는 점진적으로 변화해 왔습니다. 우리 인간의 머리뼈는 척추 맨 위에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이건 대후두공이라는 구멍의 위치와 방향 덕분인데, 이 구멍은 머리뼈 밑에 있어 척수가 나가는 통로 역할을 하죠. 사람의 경우, 이 대후두공은 수평으로 되어 있고 얼굴 쪽에 가까이 붙어 있어요. 우리는 완만하게 굽은 척추와 넓고 컵 모양의 골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골반의 위쪽 날개뼈는 짧고, 엉덩이 관절은 큽니다. 이러한 특징들 덕분에 우리는 몸통을 똑바로 세우고 지탱하며, 가만히 서 있거나 걷고 달릴 때 체중을 다리로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발로 서서 걷는 직립 보행은 매우 정교한 균형 감각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인간과 유인원의 귀 안에는 이러한 균형을 감지하는 핵심 센서인 전정기관이 있습니다. 이 전정기관 속에는 반고리관이라는 세 개의 작은 관이 들어있는데, 이 관들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앞쪽과 뒤쪽의 반고리관은 위에서 보았을 때 서로 직각으로 교차해 있고, 옆에 있는 관은 우리가 정면을 바라볼 때 약 30도 기울어진 각도로 놓여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개의 관이 각기 다른 방향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우리가 넘어지지 않고 똑바로 설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인간의 뒤쪽 반고리관은 약간 뒤로, 그리고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옆쪽 반고리관은 가장 바깥 부분과 안쪽 끝 부분 사이에 곧게 뻗은 구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 덕분에 옆쪽 반고리관이 전체적으로 앞쪽과 안쪽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는 관상 면에 대한 (coronal plane- 인체를 앞뒤로 나누는 평면) 몸의 기울기를 훨씬 더 잘 감지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두 발로 서는 직립 자세를 취하는 인류에게 특히 중요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반고리관의 특징은 주로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유인원이나 원숭이들과는 다릅니다. 인간의 반고리관은 길이에 비해 통통하거나, 전체 부피에 비해 짧은 경향을 보이는 반면, 긴팔원숭잇과 동물들은 앞쪽 반고리관과 뒤쪽 반고리관이 이루는 각도가 거의 180도에 가깝습니다. 또한, 긴팔원숭이의 뒤쪽 반고리관은 앞쪽이나 옆쪽 반고리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고 뒤로 기울어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가늘고 길쭉한 형태를 띠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로 인해, 인간의 반고리관은 크기는 다른 유인원과 비슷해도 균형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공간이 더 넓습니다.


인간이 두 발로 걷게 되면서 갖게 된 중 하나는 조금 더 일정한 리듬의 발걸음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간처럼 규칙적으로 이족보행을 하는 포유류는 흔치 않습니다. 우리와 가까운 침팬지나 고릴라도 우리처럼 규칙적인 걸음을 자연적으로 취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과일을 딴다거나 하는 특별한 목적 없이는 굳이 직립보행을 하지 않죠. 음악과 춤에 대한 한 연구는 인류의 이족보행은 발걸음에 더 일정한 리듬을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규칙적이고 예측이 가능한 이 발소리는 주변 세계를 더 잘 듣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 사람이 발을 맞춰 걷는 경우, 발걸음 사이에 짧은 정적이 있습니다. 이 짧은 정적은 숨어있는 포식자나 뒤따라오는 적, 혹은 멀리 떨어진 거리의 사냥감 등을 더 빨리 알아챌 수 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실험 결과에 따르면 두 사람이 보폭을 맞춰서 걷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은 외부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춤이나 종교의식 등 여러 사람이 움직임을 서로 맞출 때 생기는 동기화는 사람들이 관계를 유지하게 해 주고 공동체를 형성, 유지하는 것에 크게 이바지를 했을 것이라 봅니다. 같은 집단 안에서 의도된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공감과 연결의 감각이 생기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이는 모든 인류의 문화에 춤이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태초의 음악

춤처럼 모든 문명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또 하나의 문화는 바로 음악입니다. 도심의 오케스트라나 밴드가 연주하는 웅장한 음악이든, 북이나 피리 하나로 반주하는 소박한 음악이든,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전 세계 모든 문명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음악 체계를 발전시키고 전승해 왔습니다. 그리스 신화에는 음악과 노래, 그리고 예술을 관장하는 신인 아폴로와 뮤즈들이 등장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헤르메스가 거북 등껍질에 줄을 달아 리라를 만들었고, 이를 자신이 훔친 아폴로의 소와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리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은 역시 아폴로입니다. 바위 같은 무생물도 감명시켰다는 그의 리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지혜와 중용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아홉 명의 뮤즈 여신들을 빼놓을 수는 없죠. 이들은 여러 종류의 예술과 악기를 상징하며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또한 성서에서 '음악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은 유발입니다. 창세기에서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수금은 현악기, 퉁소는 관악기를 의미하며, 성서에서의 유발은 처음으로 악기를 다루고, 음악을 만들었던 사람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음악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즉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등지에서도 중요한 역할들 했습니다. 이 문명들이 있었던 장소에선 귀금속으로 장식된 각종 악기들과 점토판에 적힌 음악 체계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우르(Ur) 왕릉에서 발굴된 기원전 2600년경의 황소 머리 리라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음악과 예술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음악은 예로부터 종교의식, 궁중 연회, 그리고 전쟁 등 다양한 사회 및 종교적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듯 오래된 음악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이제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악기는 독일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4만 년 전의 피리입니다. 뼈로 만들어진 이 피리는 네안데르탈인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은 음악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만 국한된 예술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피리는 자연의 소리, 아마도 새의 소리를 따라 하기 위해서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한 이 피리의 사용처 역시 궁금해집니다. 사냥감에 들키지 않게 말소리 혹은 외침 대신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 만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어떤 특별한 제례를 위해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겠죠. 하지만 또 한가지 떠오르는 질문은 음악이 호모 사피엔스를 비롯한 다른 호미닌들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에서도 다시금 떠오릅니다. 지구라트는 신들을 위한 제의 공간으로 지어진 거대한 계단형 신전이죠. 그중에서도 우르의 대지구라트는 달의 신 나나(Nanna)를 모신 성소로, 단지 시각적으로 웅장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의도된 음향 구조까지 품고 있었습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 건축물은 그 기하학적 구조로 인해 정재파를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즉, 특정한 음이 공간 안에서 증폭되거나 맴도는 현상이 일어나, 제사나 기도 의식 중 울려 퍼지는 소리를 훨씬 더 웅장하고 신비롭게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죠. 이것이 현대 종교 건축물에서도 음향 구조가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음악은 우리의 뇌에 다각적인 자극을 주며 옥시토신, 세로토닌, 도파민 등의 필수 호르몬들의 분비를 촉진합니다. 음악을 듣는 것 그 자체가 보상으로 변하는 것이죠. 우리의 보상 시스템, 특히 특핵(Nucleus Accumbens)과 전전두엽은 음악을 들을 때 활성화되며 우리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부분들이 활성화되면 익숙하지 않은 음악이라도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감정을 담당하는 뇌의 연계 역시 음악의 울림을 증폭해 줍니다. 변연계의 핵심 구성 요소인 해마와 편도체는 음악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고 그것에 얽힌 감정 처리를 도맡아 하죠.


그래서 특정한 음악을 들으면 기억 속 한 시점이나 장소로 이동한 듯한 생생한 감정적 경험과 기억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또한 뇌는 밝은 음악과 슬픈 음악도 구분합니다. 어두운 분위기의 단조 음악을 들으면 해마 곁이랑 (right parahippocampal gyrus)과 전방 대상회가 슬프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단조가 주는 슬픈 느낌과 연결해 줍니다. 이렇듯 음악과 기억은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특정한 노래 하나로 우리는 과거와 연결되고, 그때의 감정을 되살리며 다른 사람들과 추억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음악이 유발하는 자전적 기억, 즉 음악이 기억 형성 시의 강렬한 감정을 담아두었다가 나중에 그 감정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능력 덕분이겠죠. 마치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녹화했다가 나중에 다시 틀어서 보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은 우리의 작업 기억과 장기 기억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음악의 힘을 활발하게 연구하는 곳은 치매나 알츠하이머처럼 기억 상실이 나타나는 질병 분야입니다. 과거의 익숙한 노래나 음악이 환자의 기분과 사회성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하는 보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지 능력이 저하된 상황에서도 음악을 기억하는 뇌 영역, 예를 들어 안쪽 전전두엽 피질은 비교적 나중에 퇴화하기 때문이라는 설 역시 유력하죠.


이러한 사실들은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한 고대 인류 역시 우리처럼 음악을 즐기고 사용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만약 이러한 신경학적 보상이 없다면, 4만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은 귀한 에너지를 들여 가공하기 힘든 단단한 뼈를 깎아 피리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지적 노동은 생각보다 많은 칼로리를 소모하기 때문이죠. 결국 음악은 단순히 듣고 즐기는 행위를 넘어, 인간의 뇌와 신체에 깊이 관여하며 감정, 기억, 그리고 사회적 유대감 형성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힘을 지닌 문화적 도구였던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인류와 함께 진화해 온 음악은 앞으로도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태초의 대화

두 인격체 사이에 최초의 대화는 어떻게 이루어졌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혹은 그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해 봤을지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상상이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최초의 대화는 같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호미닌 사이에서 일어났을지 누가 알까요? 현재 지구에는 약 7천 개 이상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언어가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여러 가지 설이 있죠. 가장 널리 알려진 이론 중 하나는 '몸짓 우선 (Gesture-first)' 가설인데, 이는 언어가 처음에는 손짓과 같은 몸짓에서 시작되어 점차 소리가 더해졌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반대로 '음성 우선 (Speech-first)' 가설은 처음부터 소리가 먼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언어가 소리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정보, 즉 몸짓과 소리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라는 '다중 양식 (Multimodal)' 이론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거울 뉴런 시스템'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는 모방 능력이 언어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손을 이용한 모방이 수어 같은 언어로 이어졌고, 이것이 나중에 음성 언어로 확장되었다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유아기에 물건을 잡거나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처럼 사회적 기술 공유가 언어보다 훨씬 오래전에 존재했음을 전제로 합니다.


인간 언어의 기원은 단순히 문화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뇌 구조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봅니다. 뇌의 특정 부위, 특히 브로카 영역(Broca's area)과 베르니케 영역(Wernicke's area)은 언어의 생산과 이해에 필수적인 역할을 하며, 이러한 뇌 영역의 진화 또한 언어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브로카 영역은 주로 좌측 전두엽에 위치하며, 언어의 생산, 즉 말하기와 발음, 그리고 복잡한 문장 구조를 조직하는 데 관여합니다. 이 영역에 손상이 생기면 말을 유창하게 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죠. 브로카 영역에는 거울 뉴런이 있는데, 이 뉴런은 동물이 어떤 행동을 수행할 때와 다른 동물이 동일한 행동을 수행하는 것을 관찰할 때 모두 활성화되어, 행동을 이해하는 데 역할을 합니다. 반면 베르니케 영역은 주로 뇌의 왼쪽 후상 측두엽에 위치하며, 언어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들리거나 쓰인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며, 이 영역이 손상되면 유창하게 말하지만, 내용이 비논리적인 베르니케 실어증이 나타나며 언어 이해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개인적인 임상 경험에서는 주로 관련 부분 근처에서 뇌출혈이 있었던 환자들이 이러한 증상들을 보였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자동차’라고 하면 환자는 머릿속에서는 자동차라고 이해하지만, 입으로 나오는 말은 ‘아이스크림’ 같은 식인 것이죠. 그에게 글로 쓰라고 하면, 그는 ‘자동차’라는 단어를 씁니다. 하지만 자신도 제어할 수 없이 다른 단어를 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두 영역은 신경 다발로 연결되어 하나의 언어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이 복잡한 신경망은 인간이 언어를 효율적으로 듣고 이해하며 말할 수 있게 합니다. 브로카 영역에 상응하는 브로드만 영역(Brodmann’s area)과, 인간의 브로카 영역에서 나타나는 좌측 편향의 비대칭성 역시 유인원의 상동 기관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됩니다. 이러한 비대칭성은 인간 언어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초기 호미닌뿐만 아니라 현대의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에서도 좌반구 우세성의 증거가 확인됩니다. 이와 같은 좌반구 우세성은 오른손잡이 경향, 가리키는 몸짓, 그리고 발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는 언어 이전의 더욱 일반적인 운동 조절과 공간 조직화 기능과 연관되어 있었음을 시사하죠. 또한, 많은 척추동물에게서 발견되는 FOXP2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말하기가 매끄럽지 못하고, 문장을 문법에 맞게 구성하기 어려워집니다. 연구에 따르면, 이 유전자의 이상은 브로카 영역과 뇌 속 다른 부위 사이를 연결하는 회백질 경로의 발달 이상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FOXP2는 우리가 말할 때 입과 얼굴을 정교하게 움직이고, 말소리를 순서에 맞게 조율하는 데 꼭 필요한 유전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유사성에도 인간의 브로카 영역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음성 언어 생산이라는 고유한 의사소통 기능을 추가로 발달시켰고, 베르니케 영역 역시 음성 언어 이해에 특화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뇌 기능의 발달과 함께, 언어의 기원은 인구 분산과 유전적 다양성이라는 광범위한 맥락에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찰스 다윈은 인류의 계통과 언어 분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으며, 이후 언어 확산이 인류 집단의 분산을 나타내는 좋은 지표라는 주장과 그에 대한 반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렇듯, 청각이 우리가 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생리적 능력을 의미한다면, 언어의 진화는 우리의 청각 능력을 형성하고 또 그에 의해 영향을 받았음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끝말잇기

사랑이라는 것은 정의하기 어려운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이것은 철학, 심리학, 종교, 사회학 등의 영역에 걸쳐 있으며, 대부분 내면의 상태라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파악하거나 측정하기 어렵죠. 그래서 저는 이런 사변에 포용(Inclusion)과 배척(Exclusion)이라는 개념을 대입하길 선호합니다. 포용은 상대를 받아들이는 행위나 태도이고, 배척은 상대를 거부하거나 소외시키는 행위를 뜻합니다. 물론 이 두 지표가 사랑의 모든 정의에 부합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윤리적, 정책적 수준에서 관찰, 분석,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 개념들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와 '타자' 사이의 경계선을 설정하기에, 사랑과 미움의 작용이 실제로 사회적 관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주는 틀 역할을 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는 이 포용과 배척의 양면성을 어떻게 보여줄까요?

이번 장의 도입부에 이런 상상을 대입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6만 년 전, 소규모 공동체와 함께 미지의 땅으로 들어서는 최초의 인간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석기 도구를 움켜쥔 채 걷는 발걸음은 산뜻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른 아침의 숲을 가릅니다. 인기척은 없고, 나무들은 빽빽이 하늘을 가리며 햇빛은 그 사이로 조용히 스며들 뿐입니다. 그런 숲길을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바나로 내려오기 전, 나무 위에서 살던 우리 조상들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다릅니다. 저는 이제 나무 위의 삶에 적합하지 않은 몸을 갖고 있고, 이 낯선 세계를 스스로 개척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풍경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평소라면 흘려보냈을 소리들이 귀에 꽂힙니다.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어려운 거리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울음, 풀숲 너머의 바스락거림, 멀리서 가느다랗게 흐르는 냇물 소리까지. 하나하나가 제 감각을 깨우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저 멀리서 우리와 닮은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크고 건장했으며, 털빛도 달랐습니다. 순간적으로 서로를 탐색하는 눈빛이 오고 갔고, 마침내 그들이 입을 열었습니다.


과연 새로운 대륙으로 넘어간 호모 사피엔스는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요? 자신과 비슷한 존재를 만난 반가움의 인사였을까요, 아니면 전쟁을 개시하는 고함이었을까요? 호모 사피엔스의 대규모 이주는 약 6만 년 전에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인 약 70만 년 전, 또 다른 고대 인류의 공통 조상이 아프리카를 떠났습니다. 이들은 유라시아로 퍼져 나가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으로 분화되었고, 각각 유럽과 아시아, 오세아니아에서 번성했지요. 오랫동안 우리는 이들을 호모 사피엔스와는 전혀 다른 별개 종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전자 연구의 발전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바로 이들이 먼 옛날 우리 호모 사피엔스와 직접 만났고, 심지어 서로 피를 섞으며 공존의 역사를 만들었다는 증거가 제시된 것이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호모 사피엔스의 인지 혁명을 이야기하며 다른 종들과의 경쟁에서 생존한 것을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는 피 튀기는 전쟁이 있었을 수도 있고, 기록되지 못한 종을 초월한 사랑과 우정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최근 연구에서는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에 청각의 민감도는 크게 차이가 없었으리라는 것이 중론입니다. 수렴적인 뇌 확장에 따른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호미닌 종의 바깥귀와 가운데귀는 유사한 특성을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죠. 이것은 그들의 소리 감각이 호모 사피엔스와 비슷했고, 우리와 같이 여러 소리를 구분하고 비슷한 음성 정보를 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합니다. 또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에서 FOXP2 유전자 역시 발견됨에 따라, 이들은 높은 확률로 우리와 비슷한 발성 기능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됩니. 나는 아마도 이러한 청각계와 언어사용이라는 공통점에서 포용과 배척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포용이 늘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배타성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닙니다. 특히 세계화가 시작되기 전에는 외부인을 배척하는 게 오히려 생존 확률을 높이는 방법의 하나였습니다. 알 수 없는 외부인의 유전자가 공동체의 유전자풀에 섞이거나 질병에 노출되는 건 당시로서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였을 테니 말이죠. 고대 로마나 그리스의 도시들도 개방성의 정도는 달랐지만, 시민권, 정치 참여, 그리고 거주권은 특정 집단에게만 허락됐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비관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인간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포용에 강한 생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역사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봐도, 아마 우리는 종교, 인종, 사상, 국가로 나뉘어 반목하고 배척했던 페이지를 읽을 확률이 더 높을 것이기 때문이죠. 누가 나를 좋아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갖기 어렵지만 누가 나를 싫어하는 것은 바로 캐치할 수 있는 눈치는 많은 이들이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랑의 구조를 ‘포용과 배척’의 양면성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단지 감정의 문제를 넘어, 인간 사회의 형성과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언어와 소리를 통해 상대방과의 거리, 태도, 혹은 그가 속해있는 집단의 경계를 정의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말 한마디로 다른 이들은 품을 수 있고, 말 한마디로 관계를 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손발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그라나다 파밀리아 성당을 중단한다면 대중의 반응은 어떨까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예만 봐도 공동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끼리는 더 쉽게 협력하고, 낯선 언어와 억양은 어쩔 수 없이 경계와 배제를 유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포용이란 결국, 나와 너를 구분 짓는 언어적·감각적·문화적 경계를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경험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배척이란, 그 경계를 더욱 선명히 긋는 방식이겠죠. 그렇기에 언어의 시작과 음악의 울림, 감정의 기억은 모두 ‘타자와의 거리’를 조율하는 도구였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 함께 노래하거나 춤을 추는 행위는 단순한 커뮤니케이션을 넘어선 공명을 이끌어냅니다. 이 공명은 서로 다른 개체가 일순간 하나의 리듬과 감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줍니다. 어쩌면 인류의 언어는, 최초의 악기는, 최초의 대화는 이런 순간들을 가능하게 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닐까요?



Gemini_Generated_Image_rou9smrou9smrou9.png









keyword
이전 10화10 소리를 가르는 생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