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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an Choi Feb 13. 2023

하드 SF의 세계로 떠났던 주말

경계 너머로, GEMAC +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1_다시 만난 소설의 세계


지난 주말, 하드 SF 장르의 소설 두 권을 읽었다.

전윤호, <경계 너머로, GEMAC>
심너울,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두 소설 모두 여러 경로로 추천받았던 것들이라 기대가 컸는데,  기대를 충분히 채워줬음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재미까지 발견할 있게 해 주었다.


이번에 이 소설들을 읽으며 '하드 SF'라는 장르에 처음 눈을 뜨게 되었다. '하드 SF'는 쉽게 말해, 소설의 내용이 실제 현재의 과학기술과 상충되지 않는 정합성을 추구하면서도, 소설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이과생들의 하드코어 SF'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예로 들자면, <인터스텔라>, <그래비티> 등과 유사한 느낌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실 난 대학 졸업 이후,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한 때는 문학소년이었다. 대학신문 문화부 기자를 하며 일반 대학생이라면 쉽게 만나기 힘든 유명 소설가와 시인들을 인터뷰하고 다녔다. 인터뷰하기 전에는 그 작가가 쓴 모든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모조리 읽고 가는 열정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있은 후 - 서글픈 일이지만 - 소설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낭만 같은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할 때의 선입견은 만만치 않은 장벽이었다. 심지어 그냥 소설도 아닌, 황당하기 그지없는 SF 소설이라니... 하지만 이 책들을 펼쳐 한 페이지씩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그동안 세워두었던 단단한 장벽에 깊은 금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툭 건드리면 여지없이 무너져버릴 정도로.


두 소설 모두,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더해지기는 하나, 내용 자체가 현재의 과학기술에 기반하고 있어 말도 안 되는 허황된 미래를 그리고 있지는 않다. 저자들의 전문적인 과학기술 지식과 기발한 상상력이 더해져 정말 가까운 미래에 '있을법한' 내용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



#2_<경계 너머로, GEMAC>


<경계 너머로, GEMAC>은 저자의 프로필이 소설의 재미를 더욱 높이는 요소이다. 전윤호 작가는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고 AI와 로봇을 연구했으며, SK플래닛에서 CTO로 일한 경력도 있는 찐 전문가이다. 그래서 이 분이 쓴 책들은 그분의 전공과 경험이 십분 발휘된 스토리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 제목에 있는 GEMAC이란 단어는 'Genetically Enhanced Machine Augmented Chimpanzee'의 약자로 침팬지를 유전적으로 개량하고 컴퓨터로 지능을 보완한 '증강동물'을 의미한다.


GEMAC은 침팬지의 뇌에 NEXUS라 불리는 뇌 확장 시스템을 연결한 개체로서, 인간 조련사가 GEMAC의 생각과 감정을 읽고 적절한 명령을 내린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또한 GEMAC을 훈련시키는 인간 조련사들도 GEMAC과 마찬가지로 아기 때부터 뇌에 컴퓨터와 연결한 채 조련사로 키워지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단연 이 책의 볼거리는 디테일한 IT 기술에 대한 설명들이다. NEXUS 간의 통신, 해킹, 악성코드 배포로 인한 GEMAC의 혼란 등의 장면에서 작가의 지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IT 기술에 대한 탄탄한 묘사들이 이 소설의 개연성과 핍진성, 설득력을 높여준다.


특히 이 소설에는 'HIVE'라는 집단지성 시스템이 등장한다. HIVE는 GEMAC 개체들이 공유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으로, GEMAC 개별 개체의 뇌에 연결되어 있는 뇌 확장 시스템 NEXUS에서 데이터를 전송받아 정보를 종합하고, 집단지성이 필요한 경우라 판단되면 모든 개체에 동일한 명령을 전달하여 이들의 뇌 활동을 동기화시키는 시스템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GEMAC끼리만 공유되던 HIVE에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인간 조련사 준우가 합류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실제 현실세계에서는 인간의 사고체계에 침팬지들의 사고체계를 넣는다는 설정이 윤리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고려해야 할 점이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악성코드로 인해 통제가 어렵게 된 GEMAC을 통제하기 위해 준우가 HIVE 네트워크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꿈을 실현하기 위해 GEMAC과 함께 우주의 새로운 거주지로 떠나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현실과 허구를 오가는 소설적 상상력에 짜릿함을 느꼈다.



#3_<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작가의 재기 발랄한 위트가 넘치는 단편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이 중 책 제목과 동일 제목의 단편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를 가장 재밌게 읽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20대가 몇십 년 후 70대 노인이 되었을 때의 미래를 그린다. 노인을 위한 에어팟과 HearU 기능(인공지능이 사용자가 필요한 소리만 받아 더 크게 들려주는 기능, a.k.a. 보청기)이 등장하고, 초음파 통신이라는 SNS를 쓰는 그 시대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실소가 나오는 장면은 주인공이 '에어팟 실버'를 사러 갔을 때의 모습을 그린 장면이었다.

"대화형 인터페이스. 기계랑 어떤 방식으로든 대화를 해서 가동하는 인터페이스. 젠장. 21세기 중후반을 살아가는 나 같은 노인네한테는 그것이 제일 적용하기 힘든 개념이었다. 아무리 현대 문물에 잘 적응하고 교양 있게 늙어가려고 해도 도저히 기계에 대고 말하는 건 자연스럽게 할 수 없었다."


 시대의 노인들이 키오스크 사용을 못하고, 스마트폰 사용에 서툴듯이, 지금의 20대도 노인이 되면 아마도 지금의 노인과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행상을 하는 노인이 냄새나는 생선을 가지고 버스에 오르려고 할 때, 버스기사가 일어나 카트를 밀치고 노인을 보도블록으로 집어던지다시피 했던 광경을. 그리고 박스에서 생선들이 쏟아지고 뜨거운 바닥에 앉아 곡을 하며 울던 노인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대학생 한 명이 지나가며 했던 말.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그리고 주인공은 시간이 흘러 노인이 된 지금,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친구와 술자리를 가진 후, 가상현실 캡슐에 들어가 가상현실을 즐기던 주인공은 심한 멀미를 느끼며 쓰러진다. 그리고 땅바닥에다 온갖 것들을 게워낸 주인공. 그때 가상현실 캡슐 가게의 점원 둘이 지나가며 지껄이는 소리가 들린다.

"술 먹고 가상현실 기계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딨어?"
"(아이폰 실버를 보며) 그 귀에 낀 것도 진짜 구식이야. 어쩜 그런 못생긴 걸 끼고 다닐 생각을 할까?"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맞아, 맞아, 나도."




감히 말하건대, 내가 그간 읽었던 몇 안 되는 SF 소설 중, 아주 오래전 읽었던 <퇴마록> 이후 최고의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최근 ChatGPT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이슈가 되고 있다. 이젠 AI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이런 시대에 걱정, 한탄, 조바심을 내기보다 미래에 있을법한 상상의 세계에 잠깐 빠져보는 여유를 가져보는 것이 어떨까.


이 책들로 인해, 무채색이었던 일상이 화려한 색상들로 빛날 수 있음을 깨달았던 지난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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