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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를 하며

새로운 것들로 채우기 위한 선택

by Ryan Choi

틈틈이 짐 정리를 하고 있다. 방 구석구석에 묵혀둔 짐들을 꺼내어 버릴 것들을 확인하다 보니, 어느 한쪽에서 그동안 적어뒀던 메모 뭉치들이 잔뜩 나왔다. 빽빽하게 채워진 수첩들 속에는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적어두었던 사소한 일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찾아보지도 않을 메모들에 그때는 왜 그렇게도 집착했었는지. 이제 와서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이번에는 결국 전부 버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그토록 집착했던 기록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소중했던 순간들이 지금의 내게는 더 이상 같은 무게로 다가오지 않았다. 예전에는 추억이 깃든 물건들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나는 물건을 모으는 것을 좋아했고, 언젠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아껴두면 똥 된다는 옛말처럼, 결국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만 집 안에 쌓여갔다.


서랍 속 꼭꼭 숨겨두었던 편지, 기념품, 사용하지 않는 전자기기, 그리고 이젠 쓸모없어진 책장들이 공간을 차지하며 내 삶을 비좁게 만들었다. 결심을 하고 당근에 물건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조금 망설였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달한다는, 그 물건의 생명을 연장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판매했다. 내게는 더 이상 필요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할 수 있는 물건들이 각자 맞는 새 주인을 찾아 하나둘 떠나갔다.


이제 와서 깨닫게 된 것은 이 쓸모없어진 물건들이 단순한 물질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형태를 바꾸어 추억, 불안감, 그리고 손실 회피라는 심리적 부담으로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불확실한 일상이 만들어낸 안정에 대한 갈망, 무언가를 소유함으로써 얻는 일시적인 안정감, 그리고 이별의 순간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 물건으로 구체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은 단순한 공간 확보가 아닌, 내 마음의 정리 과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쌓아온 물건만큼 그 안의 이야기와 기억은 내 마음속에 간직하면서도 실제 물리적 공간은 비워가는 법을 배웠다. 군대 시절 추억이 담긴 작은 수첩들과 지난 회사들에서 썼던 다이어리들이 사라져도 그것들이 만들어준 추억과 경험은 여전히 내 일부로 남아있게 되었다.


짐 정리는 단순히 버리는 일이 아니라 더 소중한 것을 채우기 위한 선택이다. 공간의 여백이 주는 평온함,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진 가벼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이다. 버림으로써 오히려 얻게 된 것들도 있다. 짐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집착에서 벗어나 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물건을 보내며 그 시절의 나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넸다. 감사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겠다고.


짐을 정리하며 얻은 것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무엇이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지, 무엇이 의미 있고 의미 없는지 구분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물건에 대한,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과거의 무게를 내려놓는 용기를 배웠다. 짐 정리를 했던 시간들은 삶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재정립할 수 있었던 소중한 여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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