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니스 뇌리마르크 외/이수영 역 | 자음과모음
※ 일과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관련 책들을 시리즈로 읽고 있습니다. (1)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줄곧 고민했던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내 삶의 의미를 되찾고 싶다는 것이었다.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의 일, 그리고 일상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새롭게 확인하고 싶었다. ≪가짜 노동≫은 그런 고민 끝에 읽게 된 책이었다.
이 책은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지적한다. 우리가 흔히 바쁘다, 열심히 일한다고 표현하는 많은 노동이 실제로는 의미 없는 활동에 불과한 가짜 노동이라는 것. 무의미한 회의, 불필요한 보고서, 보여주기식의 행정 업무. 저자는 이러한 노동이 단지 시간만 차지할 뿐 실질적인 가치나 성과를 남기지 못한다고 말한다.
(9p) "노동의 대부분이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없는 신기루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종 자기 노동의 허상적 본질을 부정한다. 코로나19 위기가 정상이라 여겨온 시기, 우리가 종일 하던 일을 재평가하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노동의 대부분이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 없는 신기루에 가깝다는 그 말은 너무나도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코로나19를 계기로 깨닫게 된 노동의 허상이었다. 관중이 사라지자 우리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너무 많았다는 그 말이 마음에 깊이 와닿았다.
(12p) "사람들은 갑자기 하루치 업무량을 단 두세 시간 만에 완수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모두 뭔가 하느라 늘 바빠 보여야 했던 일터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방종, 예컨대 창문을 내다보며 생각을 가다듬는 행동을 해도 괜찮았다. 즉, 가짜 노동에는 관중이 필요했던 것이다. 관중이 없을 때 우리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너무나 많다."
이 책은 점점 더 무의미해지고 설명하기 어려워지는 텅 빈 업무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를 지적하며, 텅 빈 노동의 4가지 유형인 '빈둥거리기, 시간 늘리기, 일 늘리기, 일 꾸며내기'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러한 텅 빈 노동은 결국 개인에게 '보어아웃(Bore-out)'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한다.
심한 지루함, 보람의 결핍, 타성에 젖은 무기력. 그것은 내 일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오는 공허함을 말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말한다. 사람들은 실제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하는 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며, 일이 꼭 필요한 이유를 꾸며대지만 그렇게 주변을 속이다 결국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는 것.
또한 이 책은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지적한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 문명의 발전과 효율화로 여유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시간과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고, 오히려 쓸데없는 일을 만들어내며 그 빈자리를 채웠다는 것. 현재의 노동이 과거만큼 사회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65p) "인류의 탄생 이래 노동의 여가를 연구해 보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은 재량 시간이 더 확보될 때마다 자신을 계속 분주하게 만들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 냈다. 심지어 실질적인 일에서 점점 멀어지면서도 노동의 속도를 늦추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주로 실내에 틀어박혀 앉아서 일하는, 더욱더 추상적이고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려운 유형의 일을 하느라 결국 더 바빠졌다."
'가속화의 역설'이라는 내용도 재밌게 읽었다. 분명 기술의 발전은 노동시간의 단축을 가져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동에서 인류를 해방시켜 주리라 기대했던 기술이 결국 더 많은 일을 만들어냈다는 것. 저자가 이야기한 이메일 노동의 예시는 기술이 왜 새로운 노동을 만들어냈는지 새삼 깨닫게 했다.
(108p) "편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신속한 온라인 이메일 덕분에 시간이 대폭 절약되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 과거에는 편지를 쓰기 위해 하루에 몇 분 내지 몇십 분을 썼다면 지금은 시시각각 이메일함을 확인하는 것이 하루 일과가 되었으며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런 쓸데없는 가짜 노동의 이유는 사회적인 현상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 바쁘지 않다는 말이 사회적인 금기라는 것. 노동을 더 많이 하는 것이 근면이나 책임감의 증거로 여겨지며, 조직 문화와 사회적 압력 때문에 많아진 여유 시간을 실제로는 쓸모없는 작업으로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79~80p) "파울센이 연구한 '텅 빈 노동'의 괴상한 점은 직원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엄청난 시간을 낭비해도 조직은 종종 그냥 잘 굴러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상호이득이라는 관점에서 설명된다. 굳이 현실을 들춰내서 이득을 얻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책임 회피를 위해 만들어진 많은 정책과 방침들이 더 많은 가짜 노동을 만들어낸다는 사실도 이야기한다. 면피 규정, 각종 규제와 감사 그리고 통제를 위해 고안된 도구와 기술들. 양심, 자존심, 직업의식, 의미 있는 노동에 대한 욕망이 순진한 것으로 간주되는 세상. 이 책은 바로 이런 씁쓸한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하는 것일까. 이 책은 노동의 동기에 대해서도 살핀다. 생존, 돈,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려는 인간의 본질, 적응의 방식, 타인의 인정, 자신의 인정, 청교도적인 직업윤리, 대안의 부재, 불안의 해소. 이렇게 다양한 이유들이 있지만, 결국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책의 마지막 장 '변화를 위한 우리의 전략'의 내용은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하기, 의미 있는 일을 위한 노력, 회의는 무조건 짧게, 불완전함을 감수하자는 이야기들은 실상 너무 당연한 것들이었다. 다만 하나 인상적인 말이 있었다. "신뢰는 복잡성을 줄이는 가장 중요한 방법들 중 하나다."
결국 어떤 조직이든 모든 걸 감시하고 끊임없이 보고서를 요구하며 쓸데없는 규정을 만들어서는 절대 신뢰를 쌓을 수 없다. 조직이 믿음을 줘야 개인도 신뢰가 쌓인다. 그리고 관리자는 규정으로 면피할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된다. 가짜 노동을 줄이는 첫걸음은 결국 상호 신뢰와 책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문득 내가 경험한 여러 직장 중 어느 한 곳에서 만난 선배가 과거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회사는 저렇게 맨날 월급만 축내는 사람이 많은데도, 회사가 잘 굴러가는 거 보면 참 신기해." 그때는 그냥 농담으로 넘겼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이제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가짜 노동이 이렇게나 많은데 신기했을 테지.
돌이켜보면 나 역시 가짜 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실질적으로 필요하지 않은데 '혹시 모르니까' 만드는 보고서, 결론은 이미 정해졌지만 형식상 거쳐야 하는 회의,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리를 지키던 시간들. 그런 순간마다 느꼈던 공허함이 이 책이 말하는 것들이었나보다.
이 책을 통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재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과연 가짜 노동을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에 집중해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불필요한 보고서나 형식적인 회의, 보여주기식 야근에서 벗어나 진짜 의미 있고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조직 내에서 업무의 진정한 목적을 되짚고 불필요한 업무를 제거하려는 노력, 그리고 개인도 가짜 노동으로부터 나의 시간을 해방시키고, 진정한 노동의 가치를 되찾으려는 시도. 이것들이 바로 저자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이자 내가 찾고 싶었던, 일과 삶의 의미에 대한 답이기도 한 것 같다.
올해는 일을 시작하기 전, 내가 하는 일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스스로 질문해보려 한다. 모든 가짜 노동에서 다 벗어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일의 의미를 묻고, 불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용기는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되찾은 시간은 진짜 의미와 여유로 채우고 싶다. 가짜 노동이 아닌 진짜 삶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