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경을 넘던 자본, 막아서는 국가

Part II. 갈라진 시장이라는 무대

by Ryan Son

당신의 계약서는 어느 국기에 서명되어 있는가


새벽 3 시였지만, 서한은 해변의 모래 알갱이처럼 빠르게 복제됐다.

Truth Social에 떠오른 PDF—“THE WHITE HOUSE · July 7 2025”—는
적잖은 한국 기업인들에게 졸음이 아닌 전율을 선물했다.


“8월 1일부로 한국산 모든 제품에 25 % 관세를 부과한다.

무역 적자는 국가 안보 위협이다.”

이제 기업들은 단순 세율을 넘어 두 가지를 확인했다.


첫째, 관세가 더 이상 '가격 싸움'이 아니라 질서 선택의 기준이 됐다는 점.
둘째, 편을 고르지 못하면 비용이 자동 결제된다는 점.


달러가 ‘글로벌 중립 화폐’라 믿었던 사람들, WTO 룰북이 판정승을 약속해 줄 거라 확신했던 이들은
다시 확인했다. 자본이 넘나든 경계 위에, 국가가 다시 철조망을 두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유무역 신화의 세 개의 맹점


우리는 지난 30 년을 '경제가 정치보다 똑똑하다'는 주문으로 보냈다. 비용, 생산성, 안정성에 대한 과신의 결과였다. 그리고 확률 분포의 꼬리인 극단의 위험이 서서히 꿈틀댔다.


첫째, 가장 싸고 효율적인 곳에서 만들어도 괜찮다.

둘째, 데이터는 클라우드로 올리면 국경이 사라진다.

셋째, 달러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중립 통화다.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잇따른 해킹 사고가 이 세 전제를 차례차례 무너뜨렸다.


국경을 넘은 자본이 남긴 빈틈을 안보 비용이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관세, 질서 재편 참여의 초대장


트럼프 서한은 관세를 두 가지 문구로 묶었다.
'Balanced Trade' 그리고 'National Security'.


예컨대 반도체·배터리 투자 인센티브는 ‘미국 내 설비’라는 안보 조건이 붙어야만 개방된다. 미국 질서에 머무르려면 관세를 면제받는 대신 미국이 요구하는 조세·데이터·공장 규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 자유무역이 항해용 나침반을 빼앗겼다면, 이제 국가는 관세와 보조금으로 새 위도와 경도를 긋는다. 한국·독일·멕시코 같은 수출국은, 말 그대로 편을 골라야 하는 시험대에 올라섰다.


이미 이를 예상한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 시장 관련 계약 주체를 싱가포르 법인 등으로 바꾸어왔다. 그렇게 관세를 숫자로만 보던 기업 실무자들은 단숨에 국적 변경 의뢰서를 찍어냈다.


이제 편을 고르는 것이 아닌, 편을 증명하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시대다.


기업, 포괄적 안보 개념의 전략적 자산


무대가 바뀌면 배역도 바뀐다. 기업이 '자본의 최적화 기계'였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정부는 기업을 '방패' 혹은 '창'으로 대한다.


- 반도체 한 파운드리가 타이완 방어선이 되고,

- SNS 알고리즘이 여론전의 포병대가 되며,

- 배터리 공장이 동맹국 주둔지처럼 관리된다.


유명한 딜레마인 '금리를 올리면 기업이 망한다.'는 이제 '기업이 망하면, 국경이 무너진다'로 그 방향성을 역으로 확장한다. 그동안은 자본이 국경을 지워왔으나, 앞으로는 국경이 자본을 붙들기 시작함을 의미한다.


관련해 기업의 앞에는 이제 세 가지 시나리오가 놓여 있다.


A. 동화(Accommodation)

한 체제 규칙에 전면 귀속되는 선택을 하면, 관련 체제 내 보조금 및 규제에 예측 가능한 기회를 얻는다. 단, 다른 체제에서의 시장은 포기해야 한다. 동화 전략은 관세 면제 대신, ‘침묵 시 동맹국 관세‑보복이 동시에 실행된다’는 조건을 품는다.


B. 교량(Bridge)

두 체제 사이 완충자로서의 역할로 시장의 이중 확보가 가능했으나, 이제 규제·데이터에 이중 부담을 져야만 한다. 테슬라가 상하이와 베를린에서 동시에 배터리를 찍어내지만, 데이터 국적인증서를 매 분기마다 맞춰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 이에 속한다.


C. 분할(Split)

법인·데이터·회계의 절연으로 정치 리스크를 격리할 수 있으나 이 같은 분할의 길은 비용이 눈덩이다. TikTok은 미국 IPO를 위해 법인도, 코드도, 서버도 절연하려 든다. 그렇게 비용은 상승하고 시너지는 잃지만, 어느 쪽도 쉽게 회사를 ‘인질’로 삼을 수 없게 된다.


기억해야 하는 건 세 길 중 무엇을 고르든 첫 단추는 반드시 같다는 점이다.

바로 '어디에 설 것인지'에 대한 선언이다.


‘조금 더 지켜보자’가 가장 비싼 실수

경고 → 제재 → 철수. 이 세 번의 계단을 밟으면 무엇이 사라지는가


① Bud Light : 72 시간의 ‘묵묵부답’


2023 년 4 월 1 일,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 딜런 멀베이니가 협찬 캔 사진을 올렸다. 48 시간 뒤 보수 인플루언서들이 ‘#BoycottBudLight’를 달았고, 해시태그는 440 만 건으로 순식간에 폭증했다. 하지만 버드 라이트는 이에 대해 첫 72 시간 동안 어떠한 공식 입장도 내어 놓지 않았다. 그리고 소매 체인들은 관련 제품의 진열을 줄이기 시작했고, 소비자는 경쟁사 맥주로 갈아탔다. 열흘 만에 나온 사과문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때, 시가총액은 이미 70 억  달러 이상 줄어 있었다.

교훈 — SNS 해시태그는 ‘정치 광고’보다 빠르다. 3 일 간의 침묵이 브랜드 평판의 착륙 고도를 결정했다.


② NBA‑중국 : 40 시간 뒤의 '해명'


2019 년 10 월 4 일, 휴스턴 로키츠 단장이 'Hong Kong Freedom'이라는 트윗을 날렸다. 중국 CCTV와 텐센트는 '모든 중계 중단'을 예고했지만, NBA 사무국은 사건을 ‘개인 견해’라며 넘어가려 했다. 문제는 그 ‘움직이지 않겠다’는 내부 이메일이 다시 중국 SNS에 노출된 것. 이후 40 시간 만의 뒤늦은 해명이 오히려 '사과를 거부했다'는 새로운 불길을 키웠다. 결과는 중국 매출 약 4억 달러(-15 %), 회복까지 18 개월.

교훈 — 제재는 순식간에 연쇄 계약을 끊어 낸다. 24–48 시간의 공백이 한 시즌 전체를 공백으로 만들었다.


③ Shell‑러시아 : 7 일의 ‘질서 정연한 철수’


2022 년 2 월 24 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BP·Equinor는 나흘 만에 철수를 선언했다. Shell은 '조심스럽게 절차를 밟겠다'며 일주일을 더 썼다. 그 일주일 사이 루블 표시 자산은 반 토막이 났고, 러시아 정부는 국유화를 언급했다. Shell은 결국 40 억 달러를 ‘충당금’으로 적어야 했다.
교훈 — 전쟁·제재 국면에서는 현금흐름보다 시간의 가치가 크다. 지연 시 자산은 국경과 함께 얼어붙는다.


이처럼 ‘경고→제재→철수’는 계단이 아니라 기울기가 기하급수로 커지는 곡선이다.

즉, Negative Optionality(지연이 곧 손실이 되는 구조) — '기다림'이야말로 악성 옵션이다.


지연 곡선이 ‘기하급수’가 되는 물리적 이유


- 디지털 여론은 로그스케일: 해시태그·밈은 첫 24 시간 안에 총노출의 70 %를 만든다.

- 정치·규제의 ‘도미노’: 첫 보복 조치가 발표되면 뒤따르는 행정 명령·스폰서 해지가 한 줄로 묶인다.

- 브랜드·재무의 복리 손실: 주가·매출 감소는 다음 분기 예산 감소로 이어지고, 그 예산 축소가 다시 브랜드를 약화시킨다.


즉, 머뭇거림은 선형이 아니라 제곱으로 손실을 키운다.

하루 씩 늦어짐이 ‘손실 × 2’가 아니라 ‘손실 × 4’가 되는 구조다.


왜 ‘지체 없는 선언’이 세 길 모두에서 첫 버튼인가


- 동화 기업은 빠른 선언으로 ‘국가 방패’를 확인시켜야 관세·보복을 막는다.

- 교량 기업은 두 체제 모두에 자신의 중립 — 혹은 양면 책임 — 을 증명해야 도미노 제재를 피한다.

- 분할 기업은 법인·서버·회계를 절연하려면 첫 48 시간 안에 기술·회계 팀이 움직여야 한다.


선언은 해명이나 사과가 아니다. “우리는 이 편에 서 있다, 그래서 이렇게 움직인다”라는 최소한의 위치 확인일뿐이다. 이 짧은 문장이 없을 때 시장과 규제는 가장 비싼 해석을 자동으로 대입한다.


48 시간 레이더—선언·행동·조정을 돌리는 속도


때문에 비정상적 신호가 확인될 때 실무자에게 필요한 것은 거대한 전략 보고서가 아니다.

서한·제재·해시태그가 등장한 뒤 48 시간 안에 해야 할 세 단계만 기억하라.


A. 12시간 안에는 사실 확인, HS코드 매핑, 역외 청구 테스트를 끝낸다.
B. 24시간 안에는 손익 시나리오를 정리하고 편을 고를지, 다리를 놓을지, 회사를 쪼갤지를 예고한다.
C. 48시간 안에는 소비자 FAQ와 가격·재고 방어책을 발표해 정체성 프리미엄이 폭등하는 걸 막는다.

이 짧은 루프라도 돌려야 손실의 기울기가 완만해진다.


소비자가 먼저 알아챈다


국가 정체성은 국기보다 가격표에 먼저 새겨진다. QR 라벨 하나로 원산지와 관세 코드를 보여 주면 보이콧 해시태그가 절반 아래로 떨어진다는 데이터가 있다.(2024 년 Booth School 실험: 해시태그 보이콧 노출 빈도 47 % ↓) 반대로, 가격이 바뀌고 이유를 숨기면 트위터는 '배신'이라는 단어를 광고 예산보다 빠르게 퍼뜨린다. 기업이 어떤 길을 택하더라도, 최종 비용은 소비자 마음속에서 결정된다. 국가가 나를 지켜주는가, 기업이 내 편인가를 가격에 얹는 숨은 세금인 '정체성 프리미엄'은 기업의 투명·예측·참여가 클수록 느리게 부풀어 오른다.


Default Thinking 3.0, 배치를 시작하라


관세 서한은 자유무역 기본값의 사망선고이자, 국가 안보 기본값의 출생신고다. 의심이 확신보다 먼저 움직이는 시대에, 선언 → 행동 → 조정의 순서를 48 시간 안에 돌리는 능력은 동화·교량·분할 어느 길을 택해도 공통의 생존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기업은 이제 스스로를 국가 중심의 체제 간 전략적 자산으로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신속한 대응을 가능하게 하는 운영체제 Default Thinking 3.0, 신뢰·속도·감정 OS의 출발점을 고려해야 한다.



마지막 당부

시장은 확률보다 이야기를 더 빨리 소비한다. 서한 한 장, 관세 25 퍼센트, 트윗 280 자. 이야기는 즉시 가격이 되고, 가격은 곧 체제의 표지판이 된다. 지연은 복리로 비용을 키운다. 때로는 그 복리를 이겨낼 유일한 방법은 더 빨리 의심하고, 더 빨리 선언하고, 더 빨리 구조를 고치는 것뿐이다.


keyword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