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II. 갈라진 시장이라는 무대
멕시코 국기, 캘리포니아 하늘을 가리다
2025 년 6 월 7 일 토요일 저녁, LA 다운타운 101번 프리웨이 진입 램프 난간에 멕시코 국기가 걸렸다. “Sin fronteras!”― '국경은 없다'는 구호와 함께 시위대는 유리병에 불을 붙여 거리에서 던지거나, 근처 나이키 매장에 뛰어 들어가 운동화 박스를 품에 안은 채 골목으로 달아났고, ICE(미국 이민세관단속국) 로고가 붙은 밴에 돌을 던졌다, “미국은 이민자의 땅!”이란 스페인어 구호가 그 뒤를 이었다.
현장을 지나는 미국인 운전자는 휴대전화로 그 장면을 찍어 올렸다. 불과 18초 길이의 휴대폰 영상은 업로드 직후 X(트위터) 타임라인에 떠올랐고, 해시태그 #NoICEinLA는 빠르게 복제됐다. 미국인들은 해당 상황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자신들의 땅이 멕시코 국기로 덮이고, 연방 법집행관이 ‘외부인’에게 둘러싸여 돌에 맞는 장면을. 곧바로 달린 댓글은 간단했다. '우리 땅에서 우리가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그날 밤, 같은 영상을 되돌려 본 사람들 대부분은 CNN, NBC와 같은 레거시 뉴스 매체에서 관련 소식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주류 매체가 전한 '대체로 평화로운 시위'라는 텍스트 자막 아래 30초짜리 뉴스 클립보다, 트위터 실황 포스팅이 자세하고 빨랐다. 정보 신뢰의 무게추가 순식간에 바뀌는 장면을 미국인들이 실시간으로 목격한 순간이다.
주방위군 투입 — 그리고 주지사의 반란
밤 9시 18분, 캘리포니아 주방위군 배치 명령이 전자 결재로 떨어졌다. 브리핑에 선 스콧 셔먼 소장은 “우린 연방 법을 집행하는 ICE 요원을 보호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벽 2시 30분, 주지사 개빈 뉴섬은 급히 마련한 기자회견에서 연설문을 꺼냈다.
“대통령은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을 불법·무단으로 동원했습니다.
우리는 주권을 지키기 위해 연방법원에 즉각적인 차단 명령을 요청합니다.”
주지사는 성조기를 배경으로 서 있었지만, 그 발언이 겨냥한 상대는 역설적으로 성조기였다. '누가 국민을 대표하느냐'라는 물음이 하루 새 연방 對 주 갈등으로 비화했다.
미국인이 받은 세 겹의 충격
- 국기 역전의 충격 : 자국 땅에서 멕시코 국기가 성조기보다 높게 휘날리는 장면.
- 언론 침묵의 충격 : 화면을 자르거나 자막만 내보내는 방송사. 사실을 찾으려면 트위터로 가야 했다.
- 주권 혼란의 충격 : 연방 명령을 가로막고 '불법'을 외친 주지사. ‘우리 편’이라고 믿은 제도가 우리를 대표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낯선 공포.
정체성 프리미엄 — 숨어 있던 비용의 이름
이틀 뒤, 도심 곳곳에는 임시 합판이 유리창을 대신했고, 보험사는 파손·상해 청구 접수를 시작했다. 물리적 손실이 얼마였는지는 뒤늦게 공표되겠지만, 미국인이 먼저 감지한 손실은 ‘믿음이 깨진 값’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내가 나고 자라온 땅에 살면, 국가가 나를 지켜 줄 것이다'라는 무언의 기본값(Default) 위에서 살았다. 미국인들은 그 전제가 거리에서 산산조각 났음을 확인했다.
- 나는 누구의 보호를 받는가?
국가가 아닌 깃발, 언론이 아닌 타임라인에서 답을 찾게 된 현실.
- 정보는 어디에 있는가?
방송이 가린 빈칸을 SNS에서 메워야 하는 역전된 구조.
- 내 권리는 유지되고 있는가?
법·경찰·언론이 동시에 약속을 어길 수 있다는 깨달음.
깃발·언론·주권이 동시에 빈칸으로 변한 순간, 미국인은 두 가지 숨은 비용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 심리적 비용 — 내 나라가 나를 대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공포
- 사회적 비용 — 법·치안·정보 시스템 전체에 대한 급격한 불신
이 복합 비용을 우리는 정체성 프리미엄(Identity Premium)이라 부른다. 정체성 프리미엄은 숫자로 환산하기 전에 마음속 합의를 무너뜨린다. 프랑스 파리에서도 2023년 여름, 같은 틈이 벌어졌다. 단 이틀 만에 보험 청구액이 7억 유로를 넘겼다.(French Insurance Federation, July 2023 riot report)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통계에 잡히기 전에 마음속 합의를 무너뜨리고, 합의가 무너지면 시장은 그 공백만큼의 가격을 즉시 요구한다.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하다. 이는 언제, 어떤 계기로든 국민적 권리가 흔들릴 때 튀어나오는 ‘예측 불가 세금’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체제가 보장한다 믿었던 권리가 하루 아침에 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지난 30여 년 동안 거의 무의식적으로 의지해 온 세계관이 있다. 나는 이를 Default Thinking 2.0이라 부른다. 이 관점은 국가는 배경이고, 시장은 중립이라는 단순 구호로 요약되지만, 안쪽을 들여다보면 네 겹의 층으로 단단히 지지되고 있었다.
첫째는 다자 규칙이다.
1995 년 출범한 WTO 체제 이후, 국경을 넘어 상품이 오가도 ‘하나의 룰북’만 알면 된다는 확신이 자리 잡았다. 기업이든 소비자든, 분쟁이 생기면 최종 심판은 관세보복이 아니라 협정과 패널 판정이라는 절차가 대신해 줄 것이라 믿었다. 덕분에 우리는 계약서를 쓰면서도 “어차피 무역 규칙은 같아”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수 있었다.
둘째는 달러의 무경계성이다.
브레턴우즈 이후 달러는 단순한 통화가 아니라 국제 결제의 공용 OS 역할을 해 왔다. SWIFT 망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낯선 국가의 거래처라도 결제 위험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달러 유동성이 곧 보험증서였기 때문이다.
셋째는 공공 안전 공식이다.
도시 치안은 경찰 예산과 숫자가 결정한다는, 매뉴얼처럼 반복된 행정 가설이다. 예산이 늘면 범죄는 줄고, 순찰차가 많으면 신뢰도는 높아진다는 공식. 우리는 밤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 모델이 돌아가고 있다고 가정했다.
넷째는 무경계 공급망이다.
컨테이너, GPS, 실시간 재고 시스템이 결합되면서 부품과 원자재는 손가락으로 지도만 튕겨도 이동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가장 싼 곳에서 조달해 가장 비싼 곳에 판다”는 공식은 마치 자연법칙처럼 받아들여졌다.
이 네 겹의 층이 동시에 작동할 때, 기업과 개인은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위험은 예측 가능하고, 안전은 자동으로 공급된다.'
그래서 우리는 카드 결제도, 재고 발주도, 심지어 정치적 뉴스 소비조차 자동 모드(autopilot)로 설정해 두고 살아왔다. 그러나 2025 년 6 월 LA 다운타운에서 멕시코 국기가 성조기보다 높게 펄럭인 순간, 전 세계는 네 겹의 층이 한꺼번에 금이 가 있는 작금의 현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연방과 주가 서로 다른 룰북을 꺼내 들었고, 달러 결제는 망설였고, 경찰과 주방위군이 동시에 거리에서 밀려났으며, 프리웨이 한 줄이 막히자 공급망은 숨을 헐떡였다.
Default Thinking 2.0 — 안전이 자동으로 제공될 것이라는 이 오래된 기본값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소프트웨어가 되었음을 확인한 또 하나의 사례다. 그리고 그 오류 메시지가 바로 정체성 프리미엄이라는 새로운 비용 청구서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사라진 Default Thinking 2.0을 확인해야 할 때
'보이지 않는 전쟁'이 거리에서 시작된 후 48시간. 국민이 ‘정상’이라 부르던 무대가 한순간에 뒤집혔다.
낯선 국가의 깃발은 국경을 넘어섰고, 불안정한 국경은 국가 정체성의 벽을 흔들었고, 불안해진 국가 정체성은 국민의 국가에 대한 믿음을 부쉈다. 그리고 멕시코 국기와 주지사의 반란이 동시에 화면을 채우자, 시장은 그 이유를 묻기 전에 스스로를 방어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창문을 막고, 누군가는 배송을 늦추고, 누군가는 투자를 보류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안전버튼이 작동하리라 믿을 수 없다.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편을 고를 것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빨리 대응할 것인가.
미국 도시에서 휘날리던 멕시코 국기가 보여 준 것은, 국경·언론·정부라는 기본값이 한꺼번에 빈칸으로 변한 새로운 버전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용을 가장 먼저 청구받는 이는, 항상 마지막에 상황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Source:
LIVE: Los Angeles anti-ICE protests | FOX 7 NEWS
Governor Newsom prevails in blocking Trump’s militarization of Los Ange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