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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욱 Apr 11. 2019

인간다움의 길.

미래를 계획하는 창조적인 힘에 대하여.

두뇌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뉜다.


파충류 뇌는 본능의 영역이다. 먹이를 찾고, 싸우거나 도망가고, 번식하는. 생존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들이 처리된다.

포유류 뇌/번연계는 감정의 영역이다. 자극에 대한 신체의 반응은 기억이 된다.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은 반복한다. 나쁜 기억으로 남은 것은 피해간다.

영장류 뇌/대뇌피질은 지능의 영역이다. 파악하고 계획한다. 이해하고 창조한다. 인간을 특징짓는 능력들은 이 대뇌피질에서 비롯된다.



 두뇌의 뿌리에 파충류 뇌가, 줄기에 포유류 뇌가, 잎사귀에 해당하는 곳에 영장류 뇌가 존재한다. 이 아래에서 위로 자라나는 모양새에서 유추할 수 있듯, 진화의 과정에서 보다 원시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뇌가 먼저 발생했다. 대뇌피질은 가장 최근의 진화적 결과물이다.


 이 영장류의 두뇌, 대뇌피질의 활동은 사회에서 가장 선호되는 형질을 담당한다. 정교한 신체 능력,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의력, 패턴을 파악하고 이를 개념화하는 이해력, 사회적 공감과 의사소통의 능력, 충동을 억제하고 보류하는 자제력. 모두 대뇌피질의 활동이다.


 하지만, 본능의 두뇌는 우선권을 지닌다. 생존의 욕구, 자극 대한 반응을 대뇌피질의 의지력으로 잠시동안은 억제할 수 있지만, 본능의 작용은 더 힘이 세다. 또한, 긴급하다. 보다 원시적인 두뇌의 목소리는 언제나 우선권을 지닌다. 의지는 좀처럼 본능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본능과 의지가 서로 불화한다면? 끝나지 않았던 인간의 딜레마일 것이다.


그 예는 끝이 없을 것이다. 
 건강에 해로운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끊을 수 없다. 악덕인 줄 알면서도, 질투와 분노를 삭힐 수 없다. 미래를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 즐거운 행위를 멈출 수 없다.



미래를 계획하는 힘.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러한 인간의 능력을 ‘자기투사’라 명명했다. 이는 다른 존재와는 구별되는 인간의 능력이다. 빔 프로젝터가 은막을 향해 빛을 투사하는 것처럼, 인간에게는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선택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다. 이에 비해, 다른 존재들 – 동물들, 도구들… 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없다. 환경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짓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렇게 환경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존재양식은 ‘퇴락’이라 표현된다. 이러한 퇴락은 진부함, 분산된 주의, 거짓된 적극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퇴락은 자기투사의 실현을 가로막는 안개처럼 작용한다. 군중속의 일부로 살아지는, 의지 없는, 분주한. 인간이 지닌 고귀한 가능성이 바스러지는 모습인 것이다.

미래를 계획하는 힘은 대뇌피질, 그 중에서도 전두엽의 역할이다. 설정된 목적에 따라 필요한 행동을 계획하는 힘. 의지력을 통해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능은 이러한 계획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본능이 목적 설정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 해야겠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무의식이 욕망하는 일을 행한다. 목적을 자유의지가 지정한다기 보다는, 환경에 의해-욕망에 의해 ‘이미 결정된 목적’을 수행한다. 


 이러한 인간의 양태를 주의깊게 관찰한 철학자, 과학자들 중 어떤 이들은 자유의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기까지 한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러한 결정론적 의견의 대표적인 목소리 중 하나이다. 인간은 유전자가 명령하는 생존이라는 본능을 수행하는 중이며, 자유의지는 부산물이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재로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겨졌던 것이 어떠한 환경적 요인이나 트라우마와 같은 부정적 감정에 결정적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광고, 정치적 구호는 이러한 결정의 요인을 조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을 근원적 욕구와 발신자의 목적(지지, 구매)를 조건화하는 신경-프로그래밍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유의지란 없는 것일까? 자신의 꿈꾼 바를 이룬 사람들은, 그들의 환경과 목적이 우연히 일치했던 운이 좋았던 사람이었던 것인가?



질투는 나의 힘?


 편도체라는, 포유류 두뇌에 위치한 작은 기관이 있다. 이 편도체(Amygdala)는 감각들 중 부정적인 감각을 감지하는 역할을 맡는다. 외부에서의 자극이 불쾌한 기억을 남기면, 그 자극은 부정적인 것으로 학습/조건화된다. 차후에 그러한 불쾌한 기억이 반복되는 것을 피하려는 욕구가 본능에 각인된다.


 나쁜 기억에 연관된 것을 보거나, 듣거나, 떠올릴 때 스트레스가 느껴진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신호는, 호르몬 ‘코티솔’이 담당한다.

Cortisol


 이 코티솔은 각성호르몬인 아드레날린/노르에피네프린을 방출시킨다. 저장된 당분을 혈중으로 분사시킨다. 에너지의 러쉬. 스트레스의 대상을 제거하던지, 그 상황에서 도망치기 위해 에너지를 쥐어짜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레스의 대상을 떠올리는 것과 그 것을 경험하는 것의 차이를 두뇌는 구분하지 않는다. 부정적 생각은 짧고 강한 에너지로 각성감을 준다. 


 이러한 느낌에 중독이 되기는 쉽고, 알아차리거나 되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부정적인 기억을 곱씹으며, 열등감을 연료로, 공포에 의해, 행동하는 모습은 일상에서도 역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장 즉각적인 동력을 얻어낼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 기형도가 썼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질투는 나의 힘> 中


 자신의(혹은 자신 같을 모든 이들의) 감정적 힘이 사실은 모두 부정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시인이 관찰한 것이다.



감정 중독


 이러한 부정적 감정으로 에너지를, 행동의 동력을 쥐어짜는 감정적 전략은 설탕과 카페인의 조합만큼이나 흔하다. 가장 효과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반복하는 것은, 그 회로를 점차 강화시킨다. 그러한 강화가 계속되다 보면, 다른 방식으로는 사고할 수 없게된다. 부정성이 체화된다. 더 나아가 부정적 판단을 담당하는 편도체가 과활성된다. 주변의 모든 자극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모든 일에 반사적 반응으로 대처하게된다. 애초에 스트레스에 의한 코티솔 반응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에너지 생산 수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리듬으로는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인간성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성은 이타적이다. 정교하다. 지혜롭다. 


 창조의 상태는 이완된 집중의 상태이다. 깊은 사고와 집중이 발생하는 시간이다. 외부의 자극을 대처하는 스트레스의 리듬으로는 수단적인 효율을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지 못한다. 창조는 미래를 향한 긴 호흡의 일이다.


 인간 사회는, 결과적으로 인간성의 발현에 가장 높은 보상을 부여한다. 명예나 부는 그 부산물이다. 자유롭고 싶다면, 인간적이고 싶다면. 더 나아가 위대해지고 싶다면. 부정적 감정에 기대는 중독적인 생각의 동작 회로를 새로운 회로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창조에 이르는 길.


하이데거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실현되는 ‘자기투사’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다.

 부정적 상황을 무시하는 것으로는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그 것은 도피일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살고싶은 삶을 선택하는 것은 생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삶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자신이 지닌 가능성을 실재성과 맞바꾸는 것. 세계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자진해서 맡아내는 것. 이러한 자발성이야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자유라는 것이다.


캐나다의 철학자 조던 피터슨은 이러한 논의를 이어받아, 성경을 해석한다.

 성경은 서양 문명이 역사를 통해 학습한 집단적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이야기에 표현된 신의 형상은, 역사에서 반복된 우수한 인간적 형질을 패턴화해 종합한 것이다. 즉, ‘본받을만한 인간’의 형상을 그 문명 구성원들 최대의 역량으로 종합해낸. 우수한 형상의 원형이 담긴 이야기라는 것이다.


 신의 아들. 신 자체인 그리스도. 인간의 몸으로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다. 피할 수도 있었던 고난을 자진해서 받아들인다. 그리고 죽은이들 가운데서 부활한다.



내면의 잡음을 잠재우는 법.


 인간다움과 창조성을 발현하기 위해서는 부정적 감정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끈질기고, 시도때도 없다. 내면의 잡음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집중을 방해하며, 생각과 신체를 긴장시킨다.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생각난다. 내 마음이지만 결코 자유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잠재우는 일은 결코 손쉽지 않다. 수행, 경험, 태도를 요하는. 귀한 결실일 수 있다. 이 결실에 이르는 길이 제시된 것이 종교와 철학의 참된 모습이다.


 명상은 마치 우리의 몸의 본래적 기능처럼 근본적인 실천이다. 외부의 신호를 멈추고, 의식을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 기억에 대한 감정적 반응, 욕구, 산만함이 일어나면 다시 하나의 대상과 현재로 마음을 집중하는 것. 단순한 정신의 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의 효과는 시도해본 모든 이들이 공감한다.


 누군가는 명상을 ‘정신의 웨이트 트레이닝’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힘’이 외부의 압력에 저항하는 능력을 말한다면, 명상으로 발달하는 정신의 힘이 설명 될 것이다.


 이해하는 두뇌인 대뇌피질은, 조건화된 습관대로 움직이는 마음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나’라 느껴지는 순수한 의식과 조건화된 습관은 다른 것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은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틈을 점차 넓혀준다.


 또 다른 실천으로는, 스토아 학파가 실천했던 정신적 수련법이 있을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수련법은, ‘외부의 압력이 클 때, 최적으로 동작할 수 있는 최고의 운영체제’에 비견된다. 실리콘벨리의 리더들은 스토아 학파의 훈련법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있다.


 짧은 글로 설명할 수 있는 두 가지의 실천을 적어보자면 이렇다.

 첫 번째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과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분별 후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것’에만 에너지를 집중한다.

두 번째는, 최악의 경우를 따져보고, 그 경우를 미리 상상하거나 자진해서 경험해본다.


 이러한 과정은 막연한 공포, 압도감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부정적 반응으로 낭비되고 있던 에너지를 계획적 에너지로 집중시킬 수 있다. 이러한 훈련을 반복하다보면, 이러한 사고 과정이 점차 효율성을 더해간다. 반복할 수록 늘어나는 기술이라는 것이다. 뇌의 동작 원칙. 사용하면 연결된다. 반복하면 강해진다.(Fire together, wire together!) 


좋은 오디오처럼.


 정신을 하이파이 오디오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하고 생생한 음의 기본 조건의 기본은 잡음이 없는 것이다. 잡음이 크면, 높은 볼륨으로 구동하는 것이 곤란해진다.


 정신도 이와 같지 않을까. 의도한 소리가 외부의 잡음에 가려져 버린다면, 음악을 즐길 수 없다.

 부정적인 감정의 중독적 회로의 동작을 소거하고, 자유롭고 인간적인 창조적 회로의 볼륨을 높혀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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