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생활2n년차 외국인의 추억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난 집에서 교육받았다. 집에서 교육받는 것을 Homeschooling(홈스쿨링)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Home(집)과 Schooling(교육)의 조합이다. 정식적으로 집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홈스쿨링을 통해 3학년이 되려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큰 결정을 내렸다.
'우리 집 뒤에 있는 초등학교 알지? 앞으로 거기서 공부하게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절망했다. 난 어린 나이에 외국인과 현지인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부담스럽고 긴장감을 느꼈다.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모이면 출석시간이 시작된다. 그 당시 나는 '차미화'라는 한국 이름을 쓰고 있었다. '차'는 차모스라는 성에서 나왔고 '미화'는 아름다울 '미'에 꽃 '화'의 의미를 담겨 있다. 신기한 건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이 한국인이 아닌 한국에서 유학한 외국인이 지은 이름이다.
난 원래 다른 나라의 현지인이라는 사실, 내가 밟고 있는 땅의 이방인이라는 사실, 외국인과 현지인이 똑같은 인간인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2살 때부터 한국에 살아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익숙한데 알고 보니 낯선 곳이다. 알고 보니 내 고향이 아니다. 익숙하게 썼던 한국어도 사실 내 고향 언어가 아니다. 차미화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 충돌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혼란스러운 정신세계 때문에 차미화라는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라일라가 아닌 차미화. 내 이름이 아닌데 그 이름대로 살아야 했다. 한국 사람들이 본명을 들으면 라일락 꽃 같다고 해서 쉽게 기억한다. 라일라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굳이 차미화라는 이름을 썼는가. 한국 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이름을 써야 한다는 말이 나와서 차미화로 살아야 했다.
어른들은 내가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난 어릴 때 학교 폭력에 휘말린 적이 없었고 직접 사고 치지 않았다. 그래서 유일하게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의 내성적인 성격뿐이다. 그런데 성격을 탓하기엔 부족하다. 내성적인 성격 하나 때문에 6년 동안 침묵할 리가 없다.
차미화라 이름을 소개할 때 내 정신세계까지 언급했다. 내 침묵의 답도 그 정신세계 때문이다. 난 내가 태어난 나라를 고향이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낯선 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일찍 시작된 이민 생활은 내 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본명이 아닌 차미화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너무 어렸던 내가 내면에 일어나는 자아 충돌을 마주하고 마음을 정리할 능력이 없었다.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잊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충돌이 조용히 사라지기 바라는 마음에서 6년 동안 침묵을 선택했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리면 그때 친구들에 분명 내게 이런 질문을 할 가능성이 높다.
'넌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
내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다.
초등학교 문집을 보면 장래 희망을 밝히는 페이지가 있다. 초등학교 때의 나는 꿈이 화가였다. 그리고 꿈이 화가인 어린이답게 그림을 많이 그렸다. 과거의 나는 단순히 색연필 잡고 끄적끄적하는 활동이 좋아서 그림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종이가 사람보다 인내심이 크기 때문에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았다. 사람은 날 보면 '언제 말할 거야?' 같은 반응으로 나와 소통하지만, 종이는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그림으로 하고 싶은 말을 표현했다.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면 상상하던 세계를 그리게 된다.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면 나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그렸던 것 같았다. 내가 그렸던 세상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도 다르고 결말도 다르다. 그런데 주제가 비슷하다. 모두 자유와 해방을 보여주고 있다. 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배경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른데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세계로 돌아가는 전개로 끝났다. 나는 그때 재밌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내 소원을 방출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소원은 당연히 낯선 세상에서 벗어나는 소원이다.
학교에서 낙서를 끄적끄적한 결과 미술 관련된 상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때 좋은 그림을 완성하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게 되는데 나는 3개 이상의 도장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반 친구들은 차미화 하면 '미술 잘하는 애'로 통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본 좋은 그림들은 모두 '보여주기식 그림'이었다. 3개 이상의 도장과 상을 받은 작품들은 모두 내 세계를 표현한 그림들이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에 간직하던 나의 세상을 표현할 용기가 없었고 그런 복잡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남들이 이해할만한 세상을 그렸다.
안타깝게도 미술 잘하는 차미화는 초등학교 때만 존재했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미술을 향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 행위가 내 세계를 표현하는 적절한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미술이라는 도구가 내게 힘든 도구로 변했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한 장의 그림으로 그 생각을 모두 표현할 수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한 장면의 순간을 포착해서 그리는 것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고 싶었다. 담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한데 난 그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미술을 포기했다. 그 영향으로 학년마다 나오는 초등학교 문집에서 화가라는 장래 희망이 사라지고 임시로 선택한 직업인 영어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초등학교 근처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 과거의 기억을 부정했다. 심지어 초등학교와 관련된 흔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도망치게 된다. 멀리서 과거의 인연을 보면 은근슬쩍 도망쳤고 초등학교 때 사진을 보면 삭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어릴 때의 기억을 버리고 싶었다. 기억을 지우면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무언가가 쌓여서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을 잊어버리는 행위가 오히려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태도를 바꾸었다.
과거의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용기를 내어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떠올랐다. 아이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벌벌 떨게 된다. 나에게 두려움은 낯선 세상이었고 벌벌 떠는 행위는 6년의 침묵이었다. 난 초등학교 앞에서 속으로 외쳤다.
인정하기 싫었던 과거의 내 모습, 외국 생활 자체가 무서워서 늘 침묵으로 벌벌 떨었던 내 모습을 인정했다. 목소리를 지키면서 느꼈던 불안감과 긴장감도 인정한다. 낯선 세상의 사람들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니기 싫었던 내 태도까지 인정한다. 난 답이 없던 아이였다. 답이 없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외국인 어린이였다.
내가 완벽한 침묵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과거의 사람들은 여전히 내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서운한 부분이 있었고, 나를 알아주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두려움을 알리지 않았던 나에게 서운하다. 사람들이 나의 두려움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의 아픔을 알리지 않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마지막까지 나 혼자 그 아픔을 알고 있는 꼴이 되었다. 내 두려움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런데 '정말 한 명도 눈치채지 못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다. 물론 나를 도와주려고 노력했던 어른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 그들은 내 두려움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정답은 낯선 세상을 향한 두려움인데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으니 어떤 도움을 내밀어도 내게 통하지 않았다.
내 기억을 인정한 상태로 초등학교를 다시 보니까 뭔가 후련했다. 내 두려움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내 상황을 몰랐던 사람들도 용서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인정하고, 반성하고, 용서했다. 초등학교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때 모든 것을 인정하고 더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더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만났던 선생님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