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외국인의 첫 학교

한국 생활2n년차 외국인의 추억

by 라일라 메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난 집에서 교육받았다. 집에서 교육받는 것을 Homeschooling(홈스쿨링)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Home(집)과 Schooling(교육)의 조합이다. 정식적으로 집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홈스쿨링을 통해 3학년이 되려는 과정에서 부모님이 큰 결정을 내렸다.


'우리 집 뒤에 있는 초등학교 알지? 앞으로 거기서 공부하게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절망했다. 난 어린 나이에 외국인과 현지인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 아이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부담스럽고 긴장감을 느꼈다. 나와 다른 세계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서울광진초등학교 그리고 나의 과거

"아, 학교 가기 싫다."

내 표정이 사진의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 손으로 잡은 <우리들은 1학년> 교과서를 내팽개치고 "나 갈래!"라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의 포즈다. 가만 생각해보면 들뜬 모습으로 "우앙! 신난다!"하고 학교로 향하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난 학교 가기 싫은 아이들 중에서 온몸으로 "학교 싫어! 정말 싫어!"라는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이 사진은 입학하기 이전의 사진으로 첫 번째 사진보다 더 일그러진 표정이다. 햇빛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이라고 할 수 있으나 마음은 똑같다. 정말 학교 가기 싫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면서도 무시한 부모님은 나를 서울광진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난 속으로 울었다. 망했다. 정말 망했다.


서울광진초등학교라는 공간이 너무 싫어서 속으로 운 것이 아니다. 그곳에 만나게 될 낯선 사람들이 무서웠다. 나에게 낯선 사람이란 나와 다른 사람, 한국의 현지인을 뜻한다. 현지인을 보면서 내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매일 등교하면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점을 실감해야 한다. 그게 무서웠다.



새로운 학교 생활, 새로운 이름, 이상한 외국인.

홈스쿨링 받고 있을 때 난 본명인 Ryla Mae(라일라 메이)로 집에서 출석했다. 그때 사용된 교육 언어는 영어였다. 그래서 교재도 영어였고 수업도 영어로 진행되었다. 한국 학교에 입학한 후 모든 것이 한국어로 변했다. 내 이름도 마찬가지.


모든 아이들이 교실에 모이면 출석시간이 시작된다. 그 당시 나는 '차미화'라는 한국 이름을 쓰고 있었다. '차'는 차모스라는 성에서 나왔고 '미화'는 아름다울 '미'에 꽃 '화'의 의미를 담겨 있다. 신기한 건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이 한국인이 아닌 한국에서 유학한 외국인이 지은 이름이다.


"26번, 차미화."


선생님의 한마디에 긴장했다. 반 친구들이 나를 은근슬쩍 쳐다보았다. 난 조용히 손을 들었고 선생님은 긍정의 의미로 다른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 쉬운 '네!'를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난 이상한 외국인 어린이였다. 내 한국 이름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의 나는 다양한 감정에 대해 알지 못해서 그냥 이상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그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알고 있다. 난 두 눈에 보이는 세상과 내 한국 이름에서 자아 충돌을 느끼고 있었다. 자아 충돌의 원인은 내 정신세계 안에 있다. 난 내 정체에 관한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엔 두려움이 많았다.


난 원래 다른 나라의 현지인이라는 사실, 내가 밟고 있는 땅의 이방인이라는 사실, 외국인과 현지인이 똑같은 인간인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2살 때부터 한국에 살아서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익숙한데 알고 보니 낯선 곳이다. 알고 보니 내 고향이 아니다. 익숙하게 썼던 한국어도 사실 내 고향 언어가 아니다. 차미화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 충돌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혼란스러운 정신세계 때문에 차미화라는 이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라일라가 아닌 차미화. 내 이름이 아닌데 그 이름대로 살아야 했다. 한국 사람들이 본명을 들으면 라일락 꽃 같다고 해서 쉽게 기억한다. 라일라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굳이 차미화라는 이름을 썼는가. 한국 사람들이 부르기 쉬운 이름을 써야 한다는 말이 나와서 차미화로 살아야 했다.


'차미화.'


원래 라일라인 상태로 차미화라는 이름을 들으면 잊고 싶었던 내면의 충돌을 떠오르게 한다. 난 원래 라일라인데 지금은 차미화로 살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 자신을 부정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나와 맞지 않은 이름을 6년 동안 사용했다. 나와 맞지 않은 이름을 쓰고 다니니까 별로 즐겁지 않았다. 뜻이 예쁘면 뭐해. 난 피어나고 있지 않은데. 오히려 가짜 이름이 라일라라는 꽃을 짓밟고 있었다.


침묵의 외국인 어린이

내 한국 이름이 차미화였다는 것, 본명은 라일라라는 것. 그리고 출석 부를 때 '네!'라는 대답도 못 한 이상한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겠다. 더 웃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말 없는 외국인으로 살았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말없이 살았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종이로 소통했다. 소통을 위해 매일 종이와 연필을 준비했다. 친구들과 함께 종이로 소통하는 나, 그 종이를 모두 읽어야 하는 친구들. 상상만 해도 답답한 장면이다.


어른들은 내가 수줍음이 많은 내성적인 아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난 어릴 때 학교 폭력에 휘말린 적이 없었고 직접 사고 치지 않았다. 그래서 유일하게 원인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분이 나의 내성적인 성격뿐이다. 그런데 성격을 탓하기엔 부족하다. 내성적인 성격 하나 때문에 6년 동안 침묵할 리가 없다.


차미화라 이름을 소개할 때 내 정신세계까지 언급했다. 내 침묵의 답도 그 정신세계 때문이다. 난 내가 태어난 나라를 고향이라고 인식하기도 전에 낯선 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 일찍 시작된 이민 생활은 내 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 상태로 본명이 아닌 차미화라는 이름으로 살아야 했다. 너무 어렸던 내가 내면에 일어나는 자아 충돌을 마주하고 마음을 정리할 능력이 없었다.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잊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충돌이 조용히 사라지기 바라는 마음에서 6년 동안 침묵을 선택했다.


초등학교 동창회가 열리면 그때 친구들에 분명 내게 이런 질문을 할 가능성이 높다.


'넌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


내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이다.


"난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어. 가짜 이름을 들으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내가 마주치는 세상이 무서웠어. 난 외국인이 되는 게 무서웠어. 난 외국인이 되는 게 싫었어."



그래도 좋은 추억이 있었던 곳

그동안 무거운 내용을 썼으니 이제 재밌는 추억을 언급 때가 왔다. 나는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감당하면서 살았으나 내 인생이 모두 불행하지 않았다. 슬픈 나날이 많아도 그 속에 작은 꽃들이 피어났다. 내 인생도 그랬다. 6학년이 되었을 때 두 명의 인생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 친구들은 나의 어둡고 낯선 세계 안에서 작은 꽃을 심어주었다. 그들이 심어준 꽃은 바로 재밌는 학교 추억이다.


방과 후 아지트가 된 교실

반 친구들이 하교하면 나와 친구들은 끝까지 교실에 남는다. 담임 선생님까지 교실을 떠나면 그곳은 우리의 아지트로 변한다. 교실을 전세 낸 것처럼 열심히 놀았다. 그중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바로 책상 술래잡기다. 책상이 연관되었기 때문에 '아, 사고 쳤나 보네.'라는 생각을 들 수 있는데, 정답이다. 책상 위에서 술래잡기하는 놀이였다. 어른들이 보이지 않은 시간대에 스릴 있고 재밌는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딱 한 번의 책상 술래잡기를 한 후 그것을 하지 않기로 선언했다. 친구들 중 한 명이 달리다가 책상 한 개를 넘어뜨렸고 안에 있던 교과서와 공책들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린 급하게 그 책상을 정리했다. 그리고 선언했다. 다시는 하지 말자고.


비 오는 날 술래잡기

방과 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술래잡기를 했다. 그 당시 교실에 아무도 없었고 복도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비가 올 것 같은 흐린 날씨였다. 술래잡기의 첫 기억은 나를 보고 도망가는 친구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무서운 술래라는 연출을 하고 싶었던 나머지 화장실에 숨고 있던 친구들에게 커터칼 소리를 들려주었다. 신기한 건 그 커터칼 소리가 나올 때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무서움이 더해졌다. 친구들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도 그 친구들과 함께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예전처럼 매일 얼굴 보면서 추억을 쌓는 사이가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나면 "야, 그때 기억나냐." 시작으로 철없고 어렸던 시절을 신나게 떠드는 사이로 유지하고 있다. 나는 사실 초등학교 때 만난 인연을 보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왜냐하면 그들의 얼굴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 추억을 함께 만든 친구들은 아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내 초등학교 기억이 온통 슬픔으로 물들기 전에 친구들이 행복과 즐거움을 남겼으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다.



꿈이 화가였던 외국인 어린이

초등학교 문집을 보면 장래 희망을 밝히는 페이지가 있다. 초등학교 때의 나는 꿈이 화가였다. 그리고 꿈이 화가인 어린이답게 그림을 많이 그렸다. 과거의 나는 단순히 색연필 잡고 끄적끄적하는 활동이 좋아서 그림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종이가 사람보다 인내심이 크기 때문에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보다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많았다. 사람은 날 보면 '언제 말할 거야?' 같은 반응으로 나와 소통하지만, 종이는 그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그림으로 하고 싶은 말을 표현했다.


그림을 계속 그리다 보면 상상하던 세계를 그리게 된다.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면 나는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그렸던 것 같았다. 내가 그렸던 세상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도 다르고 결말도 다르다. 그런데 주제가 비슷하다. 모두 자유와 해방을 보여주고 있다. 내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은 배경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른데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세계로 돌아가는 전개로 끝났다. 나는 그때 재밌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내 소원을 방출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소원은 당연히 낯선 세상에서 벗어나는 소원이다.


학교에서 낙서를 끄적끄적한 결과 미술 관련된 상을 많이 받았다. 초등학교 때 좋은 그림을 완성하면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게 되는데 나는 3개 이상의 도장을 받은 기억이 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반 친구들은 차미화 하면 '미술 잘하는 애'로 통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본 좋은 그림들은 모두 '보여주기식 그림'이었다. 3개 이상의 도장과 상을 받은 작품들은 모두 내 세계를 표현한 그림들이 아니었다. 나는 머릿속에 간직하던 나의 세상을 표현할 용기가 없었고 그런 복잡한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남들이 이해할만한 세상을 그렸다.


안타깝게도 미술 잘하는 차미화는 초등학교 때만 존재했다. 고학년으로 갈수록 미술을 향한 열정이 식어버렸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 행위가 내 세계를 표현하는 적절한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미술이라는 도구가 내게 힘든 도구로 변했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지 한 장의 그림으로 그 생각을 모두 표현할 수 없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나는 한 장면의 순간을 포착해서 그리는 것보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고 싶었다. 담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한데 난 그 인내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미술을 포기했다. 그 영향으로 학년마다 나오는 초등학교 문집에서 화가라는 장래 희망이 사라지고 임시로 선택한 직업인 영어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서울광진초등학교, 그리고 나의 현재

2020 서울광진초등학교

초등학교 근처에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 과거의 기억을 부정했다. 심지어 초등학교와 관련된 흔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도망치게 된다. 멀리서 과거의 인연을 보면 은근슬쩍 도망쳤고 초등학교 때 사진을 보면 삭제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어릴 때의 기억을 버리고 싶었다. 기억을 지우면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무언가가 쌓여서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을 잊어버리는 행위가 오히려 내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태도를 바꾸었다.


과거의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용기를 내어 초등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 과거의 나를 떠올랐다. 아이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벌벌 떨게 된다. 나에게 두려움은 낯선 세상이었고 벌벌 떠는 행위는 6년의 침묵이었다. 난 초등학교 앞에서 속으로 외쳤다.


그래, 난 답 없는 외국인 어린이였다.

인정하기 싫었던 과거의 내 모습, 외국 생활 자체가 무서워서 늘 침묵으로 벌벌 떨었던 내 모습을 인정했다. 목소리를 지키면서 느꼈던 불안감과 긴장감도 인정한다. 낯선 세상의 사람들 때문에 초등학교를 다니기 싫었던 내 태도까지 인정한다. 난 답이 없던 아이였다. 답이 없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했던 외국인 어린이였다.


나도 사실 서운한 점이 있다.

내가 완벽한 침묵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과거의 사람들은 여전히 내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서운한 부분이 있었고, 나를 알아주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두려움을 알리지 않았던 나에게 서운하다. 사람들이 나의 두려움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의 아픔을 알리지 않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마지막까지 나 혼자 그 아픔을 알고 있는 꼴이 되었다. 내 두려움을 알아주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한다. 그런데 '정말 한 명도 눈치채지 못했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운한 마음이 없진 않다. 물론 나를 도와주려고 노력했던 어른들이 있었다. 그런데 내 기억에 그들은 내 두려움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정답은 낯선 세상을 향한 두려움인데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으니 어떤 도움을 내밀어도 내게 통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인정하고 반성하라, 그리고 용서하라.

내 기억을 인정한 상태로 초등학교를 다시 보니까 뭔가 후련했다. 내 두려움을 인정하고 반성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내 상황을 몰랐던 사람들도 용서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는 인정하고, 반성하고, 용서했다. 초등학교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때 모든 것을 인정하고 더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더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만났던 선생님들, 그때 만났던 친구들을 다시 보게 되면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나 이제 괜찮아."

"저 이제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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