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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Aug 18. 2019

아이에 대하여

너와 함께 하는 이 소중한 시간

누가 나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아보는 직관적인 방법 중 하나는, 그 사람이 내게 얼마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시간과 돈만큼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가치의 기준이 되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남녀 사이도 그렇고, 친구 사이도 그렇고, 취미도 그렇다. 피곤하고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어 정성을 쏟는 대상이야말로 자신이 진정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굳이 더 소중한 가치를 꼽으라면 -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 나는 '시간'을 들 것 같다. 누구나 똑같이 나이가 들고,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그 절대적인 유한성을 생각하면 소중해질 수 밖에 없다. 나처럼 할일도 많고 하고싶은 일도 많은데 아이까지 키우고 있는 경우, 시간은 절대적인 가치가 된다.


돈이 많다면 돈으로 시간을 어느 정도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가사 노동을 직접 하지 않고 돈으로 사람을 쓰면 그 시간은 내 것이 된다. 해외 촬영이나 방송 스케줄을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는 '애엄마'인 연예인 기사에는 어김없이 '돈이 많으니(누가 봐주는 사람이 있으니) 저렇게 다닐 수 있고 좋겠다'라는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댓글이 달린다.


나도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마치 수많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처럼, 그렇게 육아를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지금처럼 꾸준히 운동하고 내 일과 공부도 놓지 말아야지, 아이만 바라보며 사는 여자가 되지 않겠어! (ㅎㅎ) 내게 가장 소중한 자기 발전을 위해 시간을 투자해야지, 아이는 아이 할머니에게 맡기거나 돈을 써서 사람을 쓰면 되니까... 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를 내가 직접 키워보기 전에는, 나 역시 잘 몰랐다. 아이가 그저 '아기'가 아니라,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엄연한 '인간'이고 인격체라는 것을. 육아가 가사일이나 회사 업무처럼, 사람을 써서 쉽게 대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는 예전부터 '모성애' 운운 하는 말이 정말 싫었다. 모든 책임과 의무를 오직 '엄마'에게만 몰빵(!)하기 위해 유난히 강조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그럼 부성애는? 아빠는 도대체 어디 있는거지? 아기를 낳기만 하면 모성애가 마술처럼 뿅 하고 샘솟는 것인가?


실제로 낳아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아이는 정말 사랑스럽고 예쁘지만, 엄청난 모성애가 낳자마자 샘솟듯이 솟아오르진 않았다. 그저 신기하고, 이렇게 아이를 무사히 잘 낳은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앞으로 살은 언제 빠질까, 산후 조리는 어떻게 하면 잘하지, 모유 수유는 어떻게 하는 거지, 등등 당장 눈에 닥친 일들에 마음이 바쁠 뿐이었다.


그 이후에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아이와 함께 울고 웃은 그 많은 날들을 보내면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이 조그만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한창 일이 지치고 그만두고 싶을 때 아이를 가졌기 때문에, 아 이젠 쉴 수 있겠다 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결혼 전에 그만둔다고 했을 때는 모두가 말렸는데, 임신하고 나서 그만둔다고 하니 모두가 축하해주었다. 그 온도차가 참 신기했지만, 어쨌든 아무것도 몰랐던 나는, 전업 육아의 세계에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보통 신입일 때 회사에 들어가면 첫 2~3년 간은 '신입사원' 으로서 업무를 익히고 배우는 시간으로 여긴다. 그 이후에야 자기 몫을 해내고 이익을 창출하는, 한마디로 말귀를 좀 알아듣고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일할 수 있는' 짬이 된다.


육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나는 '엄마'로서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데 한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오롯이 육아에만 투자했던 2년의 시간이 -아이를 잘 몰랐을 때에는 낭비되는 시간으로 여겼을- 지금 뒤돌아보면 엄마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로서도 정말 소중하고 가치있는 시간이었다.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놀랐던 점은, 이 조그만 아이 한 명이, 어쩌면 그렇게 엄청난 에너지로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느냐는 점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그 '사랑받고자 하는' 본능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는 일주일 내내 나와 붙어있다가 주말에 한번 반나절 정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그렇게 나에게 치대고 엉겨붙으며 반나절 어치(?) 받지 못했던 사랑을 갈구했다. ㅎㅎ 밤에 잘 때도, 팔이든 다리든 어느 곳 하나라도 엄마의 몸에 붙여놓고 자곤 했다. 내가 방 어느 곳에서 자고 있어도 떼굴떼굴 굴러와 엄마의 온기를 확인하곤 한다. 더 어렸을 때는 내가 벗어놓은 티셔츠를 손에 꼭 쥐고 엄마 냄새를 맡는 것을 좋아했다.


나 역시 외출하는 시간이 반나절 이상 넘어가면 기분이 괜히 우울해졌다. 아이에게 돌아가고 싶은 본능이 발동하는 것일까? 무얼 해도 즐겁지가 않고 그저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이를 꽉 끌어안고 아이의 냄새를 맡고 따뜻한 그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어쩔 때는 수많은 할 일들을 다 미뤄놓고, 핸드폰도 당연히 내려놓고 그저 아이를 바라보며 눈을 맞추고 있는 시간을 가진다. 아이를 키우면 쉴새없이 가사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만, 최소한의 것만 해놓고 아이와 밀도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한다. 집이 지저분해도, 엄마 꼴이 말이 아니어도, 아이는 신경쓰지 않는다. 아이는 깨끗한 집의 예쁜 엄마보다, 지저분해도 눈을 맞춰주고, 맞장구를 쳐주고, 함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막춤을 같이 쳐주는 엄마를 더 원할 것이다.


아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실 별게 없다. 엄마 아빠와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이고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다. 그 관심이라는 것은, 그저 사랑스럽게 바라보기만 해도 되는, 아주 작은 것들이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보지 못한 어른은 그 '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잘 모른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래서 아이의 시선을 뺏을 화려한 장난감이나 스마트폰이 필요해지고, 키즈카페나 문화센터로 시간을 죽이러(?) 가고, 멋진 여행지로 맘먹고 떠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는 어디에 있든 무엇을 가지고 놀든, 엄마 아빠의 관심을 받으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가장 행복해한다.


더불어 내가 예상치 못했던 점 중의 하나는, 엄마인 나 역시 아이에게서 엄청난 사랑과 치유(!)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되면 오로지 내 시간과 에너지를 내어주는(?) 희생만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아이에게서 받는 것이 오히려 더 크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서 받는 사랑은,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마치 메마른 땅에 단비가 내린 후, 그곳에서 생각치도 못했던 풀이 자라고 꽃도 피고 나비도 찾아오면서 풍요로워지는 느낌이다. 그 땅을 일굴 때는 힘들고 지치기만 했는데, 중간 중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꽃이 피고, 그 향기와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는, 그런 날들이 이어지는 것이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사실 육아만큼 고되고 비효율적이며 단순반복적인 일은 없는 것 같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탈탈 털릴 때까지 사람을 극한으로 몰고가는 것이 육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천히 서로를 알아갔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아이라고 해도, 아이 역시 엄연한 타인이다. 아이를 이해하고 알기 위해서는 아이를 잘 관찰하고 함께 생활하는 '절대적인 시간의 양'이 필요하다.


그 절대적인 시간을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면들이,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더 많아진다. 그 성장의 속도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순간을, 하나하나 우리의 눈과 기억 속에 담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남편과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육아를 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신은 이렇게 아름다운 감정을 그냥 거져 주시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정말 더디게 흐른다고 느꼈던 그 고된 육아의 기간을 거친 후에야, 아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사랑스러움과 천진함과 순수함으로, 진짜 '사랑'을 알게 해주었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 남편과 나는 원없이 아이를 안아주었다. 애기띠로도 안고, 포대기로도 업고 어디든지 다녔다. 유모차에 있었던 시간보다, 우리 품에 있었던 시간이 더 길었을 것이다. 아이가 평균보다 크고 체격이 좋아서 남편도 나도, 어깨와 팔이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난 결국 팔 한쪽이 잘 올라가지 않아서 병원 신세도 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그렇게 품에 꼭 안고 있던 날들을, 벌써 그리운 마음으로 떠올리곤 한다. 그 조그만 코로 숨을 쉬며, 천사같은 얼굴로 내게 완전히 안긴 채 잠들던 아이의 얼굴, 그 완전한 믿음의 무게, 그 보드라운 살결과 쿰쿰한 냄새, 통통하던 팔과 다리... 머리가 아니라 내 팔과 가슴에 닿는 감촉으로 생생하게 남아있는 그 느낌. 보이지 않은 끈끈한 애착과 사랑이, 그런 날들 동안 조금씩 나무처럼 자랐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보며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아이를 빨리 자라게 할 수도, 더 천천히 자라게 할 수도 없다. 아이가 부모를 억지로 사랑하게 할 수도, 찾지 않게 할 수도 없다. 아이를 더 오래 내 품에 있게 할 수도, 반대로 일찍 독립하게 할 수도 없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오직 인내와 사랑이 어린 '시간'의 누적만이 그걸 할 수 있다.


아이가 처음 두 발로 일어서는 일, 걸음마를 떼는 일, 엄마와 눈을 맞추고 웃는 일, 옹알이를 하다가 어느 순간 말을 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이 다 그렇다.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아이는 그저 자기 때에 맞게 자란다. 생각해보면 아이의 모든 순간은 인생의 단 한번 뿐이다. 그 절대적인 시간의 흐름과 무게에 새삼 놀랄 때가 있다. 후회없도록, 아이의 마음의 허전함이 없도록, 부족함없는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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