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ina Aug 25. 2019

엄마에 대하여

친구같은 모녀관계라는 환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6살이었나 7살이었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살던 아파트 바로 앞 상가 지하에 내려가면, 혼자서도 자주 가던 슈퍼가 있었다. 작은 마트 형태의, 꽤 큰 슈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에도 과자 속에 작은 장난감이 들어있는 제품들이 아이들을 유혹하곤 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같이 동봉된 조그만 종이 공주옷 같은 것이 갖고 싶어서 나는 맛도 별로 없어보이는 과자를 집었고, 내 용돈으로는 적지 않은 금액인 300원이었나 500원 정도를 지출해서 그것을 샀다. 오로지 그 장난감이 탐이 나서, 큰맘먹고 샀던 기억은 분명하다.


집에 오자마자 과자를 먹지도 않고 그 장난감을 펼쳐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불량품이었다. 공주에게 도저히 입혀지지 않는 옷이었다. 겉포장 그림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뭔가 중요한 어떤 부분이 빠져있거나 뜯겨있었다. 나는 울상이 되어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그 슈퍼에 다시 가보자고 했다.


슈퍼 주인 아저씨는 줄서있는 손님들의 물품들을 계산하느라 바빠보였다. 엄마는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우리 딸이 여기서 이걸 샀는데 이 장난감이 불량품인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새걸로 바꿔가도 될까요? "


"네? 한번 뜯은 과자는 못바꿔줘요~"


"네~ 그건 아는데.. 이 장난감 좀 보세요. 이게 이렇게 되어있잖아요. 이거 불량품인것 같은데..."


"안돼요, 자 다음 손님, 이쪽으로 오세요~ "


구체적인 대화 내용은 기억 안나지만, 위와 비슷했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귀찮아진 아저씨의 마지막 외마디였다.


"이 여자가 왜 이래? 안된다고 했잖아요! 저리 가요!"


엄마는 결국 내 손을 잡고 물러났고, 우리는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복잡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엄마 손을 꼭 잡고 옆에 서 있었다. 엄마는 그저 '이 과자는 앞으로 사지 말자' 라고 했을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나는 엄마한테 미안했다. 특히 그 슈퍼 아저씨의 경멸어린 눈초리와 '이 여자가 왜 이래?' 이 한마디가, 기억에 오래오래 남았다.


'이 여자'라니.. 나에겐 우주와도 같은, 하늘과도 같은 커다랗고 절대적인 존재인 엄마가, 그렇게 낯선 아저씨에게 함부로 불리우는 모습을 난생 처음 보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계산하려고 줄서있던 많은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던, 호기심 어린 눈길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이 모든 분란을 만든 것 같아서 나는 엄마한테 참 미안했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든든함과 뭔지 모를 기분 좋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건 엄마에 대한 단단한 '믿음'이었다.


엄마는 무조건 내편이구나, 엄마는 저 조그만 싸구려 장난감 때문에 속이 상한 내 기분을 무시하지 않고 이해해줬어, 엄마는 언제나 내 편에 서 주는 사람이구나... 라는 막연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평범했다.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지만 오빠와 나를 낳은 후 그만두고 쭉 전업주부로 사셨다. 엄마는 탁월한 살림꾼이자 주부였다. 엄마가 하는 음식은 사먹는 것보다 훨씬 훌륭했고, 우리집은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엄마는 늘 부지런하고, 알뜰했으며, 가족에게 헌신적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엄마는 당연하다는듯이 그 모든 것을 혼자서 하셨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면 늘 여러가지 반찬과 밥이 차려져 있고, 화장실에는 깨끗하게 삶아서 햇빛에 바싹 말린 새 수건이 걸려있었다.


한번도 엄마가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동을 투자해서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면들을, 하나도 닮지 않았다. 아니, 닮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부모님 세대의 흔하디 흔한 스토리겠지만, 아빠는 적당히 가정에 무관심했고, 엄마 혼자 도맡아 하는 육아와 가사노동을 당연시했고, 돈을 아낄 줄 몰랐으며, 엄마는 그런 아빠 때문에 속앓이했고,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 힘들어 하면서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한때는 독신주의를 꿈꿨고,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영원히 내 일을, 경제적인 자립을 놓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결코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흔히들 여자에게 딸은 하나 있어야 한다, 는 말을 한다. 나는 그 말이 좀 불편하다. 딸이 더 공감을 잘하고, 이해도가 높으며, 엄마를 더 잘 챙기고 효도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딸에게 챙김과 이해와 보살핌을 받고 싶기 때문에 딸이 있어야 한다, 로 들린다. 물론 내가 오바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있겠지만, 내가 그렇게 커왔기 때문에 더 그렇다.


나는 엄마를 사랑하지만, 사실 엄마와 성격이 잘 맞지는 않는다. 엄마와 2-3일 정도 같이 있으면 참 좋은데, 그 이상 되면 반드시 사단(?)이 난다.


남들이 보면 '친구같은 좋은 모녀 관계'로 보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무슨 일만 있으면 제일 먼저 엄마에게 전화해서 시시콜콜 수다를 늘어놓고, 어쩔 때는 남편보다도 엄마를 더 의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와 자주 크고 작은 갈등을 늘상 겪었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며 놀랐다고 한다. 모녀관계는 늘 친구같고, 나이들수록 좋은 줄만 알았단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엄마는 나를 당장이라도 화나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있는것 같다. 나의 가장 약하고, 불안정하고, 들키기 싫은, 그런 아킬레스건을 엄마는 무심하게 툭툭 건드린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나약하고 혼란스럽고 일관성없는 자아의 한 부분을, 엄마는 참 잘도 끄집어낸다.


어릴 때는 당연히 아빠를 더 좋아했다. 하지만 머리가 조금 커지자 나는 금새 알아챘다. 엄마가 악역을 맡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철이 들면서 아등바등 살림을 꾸려가려는 엄마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도 커졌다. 남편과 아들은 엄마의 얘기를 듣지 않으니 주로 딸인 내가 엄마의 하소연을 들었고, 그 얘기에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며, 나도 대부분의 딸들처럼 금새 '어른아이'가 되었다.


이것은 엄마의 끝없는 하소연과, 현실적인 걱정(주로 돈문제)과, 아빠와의 갈등, 집 걱정, 빚 문제 등등을 초등학교 고학년 부터 하나 하나 알게되고, 엄마와 함께 그것을 내 일처럼 걱정하고, 하고싶은 일이 있어도 돈부터 걱정하게 되는, '어른스럽고 이해심많고 공감력 높은 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엄마들이 그토록 바라는 딸, 알아서 공부도 잘하고 엄마 하소연도 들어주고 함께 걱정해주는, 그런 딸.


나는 그런 착한 딸의 역할이 어느 순간 너무 버거워서, 취직하고 독립한 이후로는 엄마에게 조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기적인 마음이었지만 나도 내 삶을 살아야겠기에, 더 이상 부모님의 문제에, 우리집 경제 문제에 신경쓰고 싶지가 않았다. 어쩌다 엄마가 전화로 그런 화제를 꺼내면, 나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금방 전화를 끊거나 말을 돌려버리곤 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도 내 가정을 꾸리게 되니 엄마 아빠의 문제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게 되었다. 이제는 결혼해서 '내 편'이 된 남편에게 시시콜콜 엄마에 대한 불만도 가끔 얘기하곤 했다.


따뜻하고 좋아보이기만 했던 시댁도, 영원히 나를 이해하고 품어줄 것만 같았던 남편도, 살다보니 나를 화나고 슬프게 할 때가 있었다. 심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의 '엄마'와도 그런데, 처음부터 남이었던 그들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부모님은 좋은 분들이었지만, 가까이 살면서도 '자주' 못보고 연락하지 못한다는 것이 불만이셨고, 나는 그 '자주'의 기준이 나와는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고 힘들었다. 중간 입장인 남편은 말이 없어질 뿐, 갈등 해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힘들게 노력해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대학원 합격 소식에, 시부모님의 첫 마디는 이랬다.


"이제 더 자주 못보겠네?"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 한마디, 조차도 없었다. 어머님은 한술 더 떠서, "낼 모레 40인 애엄마가 그런거 해서 뭐하게...?" 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서운했고, 시부모님은 영원히 그저 '시댁'일수밖에 없다는 현실 자각을 했다.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것이다. 딸같은 며느리'가 현실에 없듯이, '엄마같은 시어머니'도 당연히 있을 수 없다.


이후 양가 부모님을 모시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의 대학원 입학에 대한 화제가 나왔고, 시부모님은 약간 농담조로 다시 말씀하셨다.


"지금도 자주 못보는데, 앞으로 2년간은 더 못보게 생겼네요. 사돈 어르신도 (대신 아이 봐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어요."


그때 조용히 식사하시던 엄마가 갑자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르륵, 너무나 자신있게 대답하셨다.


"아유~ 사람이 자기가 하고싶은건 하고 살아야죠~ 남들은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학교인데, 우리 딸은 아이 키우면서도 저렇게 공부를 잘하니, 얼마나 대견해요? 아이도 자기 공부,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엄마를 보며 배우는게 많을 거에요. ^^"


"니나가 어렸을 때부터 아주 똑부러지고, 잔소리 한번 안해도 공부를 참 잘했답니다~ 공부만 잘했게요? 체육도 잘하고 피아노도 잘 쳤지요. 한글도 스스로 뗐다니까요, 호호호"


"사돈 어르신들께서 잘 좀 봐주세요~ 우리 딸이 지 새끼 잘 키워보겠다고 노력하는거니, 열심히 공부해서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도록 예쁘게 봐주세요 호호"


그 순간 나는, 그때 그 슈퍼 아저씨 앞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서있던, 일곱 살 때의 나로 돌아가는것 같았다. 그때의 기분과 꼭 같았다. 조마조마하고, 뭔가 불안하지만, 믿을 수 없이 마음이 따스해지고, 뭔가 부드럽고 단단한 안정감이, 내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  


나의 든든한 울타리, 영원한 내 편. 못말리는 주책꾼이자 딸바보, 우리 엄마. 맨날 나랑 싸우고 울고 돌아서면 금새 또 내 걱정하는 우리 엄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엄마.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엄마는, 어쨌든 '엄마'였다. 나는 새삼 생각했다. 아 맞다, 우리 엄마였지. 늘 우주같이, 한결같이 날 품어주던 우리 엄마. 늘 체면을 중시해서, 자기 자식 자랑하는 친구들 앞에서도 우아하게 침묵을 지키는 쪽을 택하는 엄마가, 필요할 때는 주책없이 나서서 부끄러울만큼 딸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이, 우리 엄마였지.


나는 요즘에야 비로소 엄마를 마음 깊이 이해한다. 나도 내 아이에게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 내 새끼는 영원한 나의 작고 연약한 '아가'이다. 늘 같은 편이 되어주고 싶고, 보호해주고 싶은 나의 작은 새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그럴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뿐이다. 그저 엄마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단 하루만이라도 더 오래, 나와 지지고 볶으면서, 나의 엄마로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다. 이제 흰머리가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딸이지만, 여전히 엄마의 작은 새로, 엄마 팔짱을 끼고 오래오래 같이 걷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아이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