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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Sep 10. 2019

일상의 무게, 그리고 동반자

누군가와 함께 쌓아온 시간, 공간, 그 모든 일상의 소중함

예전에 막연히 미래의 결혼 생활을 상상할 때, 나의 개인적인 로망은 남편과 함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잔을 하고, 손을 잡고 다정하게 집에 오는 것이었다. 더 이상 집 앞에서 아쉽게 헤어질 필요도 없고, 그저 언제라도 술 한잔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소박한 시간을 꿈꿨다.


물론 그런 데이트는 결혼 후 몇 번 하지 못했다. 결혼 후 아이없이 지내는 시간이 더 있었다면 둘만의 로맨틱한 시간이 좀더 오래 지속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결혼 후 바로 아이를 가졌고 약 9개월 간의 오붓한 신혼 이후 우리는 전쟁같은 육아의 터널을 함께 지나오고 있다.


소소한 의견 충돌은 있었지만 거의 싸우는 일 없이 늘 다정하기만 했던 우리가, 꽤 심각하게 부부싸움을 하기 시작한건 역시 아기를 키우면서 부터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아이가 세돌 정도까지는 안 싸우는 부부가 없다고 했다.


양가 도움이나 시터 등 외부의 도움없이 부부가 직접 육아하는 경우엔 더더욱, 싸움은 불가피하다고 했다.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했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우리는 때때로 서로에게 지쳤다. 서로에게 실망하고, 원망도 했다. 못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나 사이에는, 함께 보낸 일상 속에서 쌓아온 깊은 신뢰가 존재한다.


누군가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는 것은, 하루 하루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이 세다. 우리가 그토록 평범하게 생각하는 그 작은 일상이 축적되어, 서로간의 보이지 않는 믿음과 신뢰가 쌓여가기 때문이다.


열 마디 말보다, 함께 산 그 시간과 세월이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같이 살면 숨길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사소한 습관, 행동, 본성, 표정, 말투, 가치관....그 모든 것이 일상 속에서, 손이 닿는 모든 것에서 묻어난다.


나는 직접 결혼생활을 해보고서야, 역설적으로 '불륜'의 파급력을 깨달았다. 결혼 전에는 불륜으로 사이가 나빠지거나 파경 직전의 부부를 보면, 사랑했던 사람의 배신으로 충격이 클 거라고 막연히 짐작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단순히 '사랑의 배신' 정도의 의미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저 '사랑'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는,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는 일이다.


만약 나라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고작 사랑 때문에? 그까짓 남녀간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함께 공들여 쌓아올린 이 모든 단단한 시간과, 공간과, 생활의 누적들을 다 져버리다니. 겨우 그런 사람이었다니, 라는 충격일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했던 나의 존재마저 모두 부정당한 느낌이 들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쌓아온 일상의 무게는 그 정도로 사소하지 않다.


나는 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결혼 후 함께 '생활'을 하다보니, 나는 이 사람을 '사랑'의 감정 빼고도, 기본적으로 꽤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은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이건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love와 like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면, 각자의 대답이 있겠지만, 나는 like가 좀더 '존중'을 바탕으로 한, 더 친밀하고 안정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남녀간의 사랑은 너무나 감정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다. 충동과 설레임, 격정적인 끌림도 사랑이다. 잔잔하게 친구처럼 가는 사랑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콩깍지가 벗겨지고 나서도, 오래오래 이 사람을 좋아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내게 꽤 중요했다.


결혼 전에 꽤 오래 썸(?)을 타던 남자가 있었다. 30대 초반에 만나 짧게 연애하고 헤어진 후에도, 이상하게 그 인연은 끝이 나지 않았다. 안 좋게 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로 약간의 호감이 남아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둘 중 누군가가 연애 중일 때는 연락이 끊겼다가, 서로 싱글이 되면 다시 연락이 닿아 밥 먹고 차 마시고 하는, 그런 애매모호한 상태로 꽤 오랫동안 지냈다. 나는 헤어진 후에 친구로 지내는 남자가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관계는 그가 유일무이했다.


하지만 남편을 만난 이후로 그와의 썸은 완전히 끊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결혼할 사람을 만나면 아무런 내적 갈등이나 고민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남편과 나 사이는 정말 투명하고 확실했다. 애매모호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썸조차 타지 않고 그냥 직진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애하고 자연스럽게 결혼까지 흘러갔다.


그렇다고 그 썸남(?)이 애매하게 간이나 보는, 그런 나쁜 남자였던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둘 다, 서로에게 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서로 이성으로서의 호감은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삐걱대는 부분이 있었다. 그의 가치관, 말하는 방식, 취향, 생활 습관, 그 모든 것이 나와는 너무 달랐다. 결 자체가 다른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그를 만나 즐거운 데이트는 할 수 있었지만, 그를 끝내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나에게 비슷한 감정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남편은 내게 확신을 주는 사람이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한결같은 사랑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늘 마음 가득히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한번도 날 불안하게 한 적이 없었다.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안정감을 주면서도 지루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와 웃음은 끊이지가 않았다.


같이 여행을 가도, 둘다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걸 보는 것을 좋아해서, 아침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것도 잘 맞았다. 식성도 비슷했고, 옷에 큰 관심없는 것도 비슷했다. 둘 다 혼자만의 시간을 중요시 한다는 점도 그랬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에는 이 모든 것이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점도, 정말 그랬었나 싶은 의문이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실 온 신경과 에너지가 아이에게만 집중되기 때문에, 정작 남편에 대해서, 또는 부부로서의 우리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로 '잘 살아있다'는 정도만 확인한 채 일상을 보내기에 바빴다.


그런데 요즘들어 남편에 대해 드는 생각은, 우리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아이가 첫돌 지나 얼마 안되서, 아주 심한 수족구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 여리고 작은 팔과 다리에, 거의 살색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수포로 뒤덮여 곪아 터지고, 피가 흐르고, 밤새 열이 치솟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정말 태어나서 가장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연속으로 토하고 괴로워하는 아이 옆에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우리는 한마디 말이 없어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완벽히 일치하여 아이에게로 향해있었다. 남편은 묵묵히 토사물을 치우고, 이불을 빨고, 아이의 열을 재고, 밤새 안아 달래가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리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투박하게 나를 위로했다.


지금도 나는 '수족구'라는 단어를 들으면 바로 눈물이 난다. 그 정도로 내게 지옥같은 시간이었다. 그런 나를, 유일하게 비웃지 않고 진지하게 토닥여주는 사람은 남편 뿐이다. 남편만이 그 모든 것을 생생하게 보았고, 얼마나 심각했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모든 고통을 함께 겪은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겪은 고생과 하나 하나 쌓아온 일상이, 백 마디 말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를 통하게 해주었다.


아이와 함께 한 부부의 시간, 그 시간만큼은 우리의 것이었다. 아이가 첫 걸음마를 시작했을 때, 처음 엉거주춤 서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을 때, 처음 오물오물 이유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 처음 우리를 보고 활짝 웃으며 엄마~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 순간의 가슴 벅찬 환희와 기쁨을 나와 똑같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이의, 또다른 분신.


아이와 관련된 일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에라도, 나만큼 기뻐하고 슬퍼할 수 있는 사람. 나와 함께 이 기쁨과 고통을 평생 짊어갈 이.


이렇게 천천히, 그리고 서툴게 우리는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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