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공 강 그리고 영화 ‘연인’

5. 양가휘 멋진 연기와 상대 15세 소녀 제인 마치 파격 연기 회자

by 류진환

이른 아침 사이공 강은 물결의 흐름은 느려도 사람들의 삶은 분주하다.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뱃사공의 시간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빠르다. 컨테이너를 싣고 바다로 이어지는 강 아래 항구로 가는 배들의 움직임도 물살의 흐름을 뒤로한다. 사이공 강의 하루는 그렇게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 사이공 강의 흐름을 보면 늘 한 편의 촉촉한 인연 이야기가 떠오른다. 메콩 강과 사이공 강으로부터 인연의 고리가 이어지는 영화 ‘연인’이다. 영화 ‘연인’은 프랑스의 장 자크 아노 감독이 콩쿠르상 수상자 마르끄리뜨 뒤라스의 동명소설 ‘연인’을 직접 각색해 만든 영화다.

1992년 개봉된 장자크 마치 감독이 마프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각색해 만든 영화 연인의 포스터. 양가휘-제인마치 주연


영화는 베트남 곳곳에서 촬영됐다. 호찌민에서는 지금은 시에 편입된 당시 중국인의 도시 쩌런(cholon)을 중심으로 통일궁 주변, 타오 감 비엔(Thảo Cầm Viên) 동물원, 뻰냐롱(Bến Nhà Rồng)·뻰메꼭(Bến Mễ Cốc) 시장 등도 무대가 됐다. 양가휘가 살던 독신자의 집도 그대로 남아 있다. 또 배에서 처음 만난 제인 마치를 차로 태워 주고, 그녀를 잊지 못해 찾아간 기숙사는 3군에 있는 명문학교인 레뀌돈(Lê Quý Đôn) 중고등 학교로 알려지고 있다. 이 학교는 1870년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세워진 학교로, 1970년대 베트남 대학자 레뀌돈의 이름을 따 변경되었다.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1922~2004년) 등 많은 저명인사들이 이 학교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참고로 호찌민에는 또 다른 명문학교로 레홍퐁 고등학교가 있다.


영화는 개봉이 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영화는 늙어서 작가가 된 여주인공이 파리의 자기 집에서 16살 소녀 시절을 회상하며 시작된다, 매력적인 양가휘의 멋진 연기도 그렇지만, 상대 배우로 나선 15세 소녀 제인 마치의 파격적이고 수위 높은 연기가 세상에 회자됐다. 외설이냐 예술이냐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나의 통역을 담당했던 코아라는 친구는 베트남에선 X등급이라 못 보았다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15살 반의 소녀는 사덱이 있는 집에서 사이공 지금의 호찌민에 있는 기숙학교로 돌아오기 위해 메콩강의 도하 지점에서 배를 탄다. 아버지가 죽고 엄마가 전 재산을 사기 당해 풍비박산이 된 후, 절망으로 감옥 같은 집에서 늘 도피하고 싶었다. 소녀는 그 배에서 32세의 중국인 부호 청년 양가휘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파리에 유학 중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빈롱의 집으로 돌아오던 청년이다.


청년은 입에 루주를 바르고 박스원피스에 구식 라메힐 그리고 장미 넝쿨색의 남자 모자를 쓴 성숙한 소녀에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다. 불온한 사랑이지만 인종과 나이를 무시하고 이루어진다. 답답한 현실의 도피처 같은 두 사람의 밀회는 1년 반이나 지속된다. 소녀는 어리지만 세상의 때가 묻었고 나이는 들었지만 청년은 순진했다. 그들의 사랑은 현실과 부딪치면서 갈등으로 점철된다. 청년이 소녀의 가족과 만나면서 갈등은 커진다. 가진 것은 쥐뿔도 없으면서, 백인이라는 자존심만 가진 그녀의 가족은 중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청년을 무시한다. 상처를 입은 청년은 그녀를 창녀처럼 대하지만, 이미 그의 가슴 속엔 사랑이 담겼음을 느낀다.


하지만 두 연인을 기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재산 상속을 위해 청년은 아버지가 정해준 여자와 정략결혼을 한다. 소녀 또한 식민 사회에서 백인 여성이 중국인과 결혼할 수 없는 현실을 수긍한다.


이별하는 날. 배를 타고 떠나는 소녀는 멀리 차에서 배가 작아 질 때 까지 그녀를 지켜보는 그를 발견한다. 그녀 또한 그의 거의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응시한다. 그리고 그녀는 곧 그와의 만남이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통곡한다.


영화는 나레이션을 통해 두 사람의 인연이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며 맺는다. 그가 동생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고. 그리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


식민지 시절을 배경으로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는 소녀를 옥죄는 가족과 그 굴레에서 벗어나 만난 첫사랑과 활활 타오르다 금방 꺼져버리는 성냥불 같은 욕망 그리고 처음부터 기정사실이 될 수밖에 없는 이별의 현실을 간접화법을 통해 담담하게 그린다. 한결같이 흐르는 강물처럼.


이 영화를 본 지가 몇 십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영화가 준 강렬함도 한 이유지만, 지금 나의 하루 일과가 사이공 강에서 시작되는 까닭이다. 매일 만나는 사이공 강 앞에서면, 딱히 사랑보다는 스스로 떠나와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의 아쉬움에 가슴이 무겁다. 그러면 늘 그렇게 흐르는 강물처럼, 그것들을 나도 흘러 보낸다. 그리고 나도 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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