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애매함

편안함

동시에 불편함

by 류성

초원의 선선한 바람이 미지근한 피부에 닿는다. 잔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세기. 강하게 불어와도 볼을 스쳐가기만 한다. 무심코 손을 하늘로 들어본다. 역시 손바닥이 간지러운 걸로 그친다. 이 바람이 오늘따라 더 애석하다. 하늘을 잡으려 하는 모양새로 손가락을 모은 뒤, 다시 손을 내린다. 이런 건 이제 익숙하다. 모든 게 조금 질려서 눈가를 미약하게 찡그린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익숙함을 풀고 주변을 본다. 여느 때와 똑같다.


마을 산책로를 걷는 행복한 사람들을 한 차례 쳐다본다. 나처럼 눈가를 찡그린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웃고,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보며 반가워한다. 분명 마음이 따뜻해져야 할 텐데, 내 마음은 더 선선해져 온다. 저 사람들은 왜 웃고 있지. 매번 기쁠 리가 없는데. 저 사람들은 왜 불편함을 느끼지 않지. 매번 편안할리가 없는데. 저 사람들은 왜 분노하지 않지. 매번 받아들일 리가 없는데. 그들과 함께 있을 때마다, 그들과 이 세상이 너무도 어색하다. 결국 이 순간에도 참을만한 쓸쓸함을 품게 된다. 차라리 닿는 바람이 더 세게 불어와도 좋을 것만 같다. 편안함을 위해 안된다면, 스쳐지지 않을 정도로 약했으면 좋겠다. 그래야 불편함을 고통스러울 때까지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격렬한 돌풍이나, 고요한 바람이나 거기서 거기다. 내 왜곡된 시선만큼 이곳도 결국 변함없다. 행복한 사람들도, 편안한 초원도, 전부 다.


볼이 잔잔한 바람으로 간지러워진다. 손으로 볼을 긁으려다가, 멈칫하고 다시 손을 내린다. 간지러움만이 나에게 유일한 불편함을 준다. 손은 옅은 물기가 남아있는 푸른 잔디에 댄다. 간지러움은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살짝 거슬리는 게 있다면, 이곳과 사람들 뿐. 그러나 이것들조차도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 대신 내 머리가 서서히 아파온다. 나는 복잡한 생각을 버리려 손을 뒤로 빼고 이곳의 풍경을 다시금 바라본다.


먼저 내가 바라볼 수 있는 곳 중 가장 먼 곳부터 바라본다. 따스한 해가 지평선 너머로 눈에 들어온다. 해를 깊게 들여다본다. 먼발치라 그런지 눈이 부시지 않는다. 해와 땅이 맞닿는 곳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질리게 봐왔던 풍경들이 다시 담긴다. 세상에 채워져 있는 짙은 녹색에 시선을 집중한다. 그 자리에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초원이 밝은 햇빛을 받쳐주고, 햇빛은 푸른 초원을 망설임 없이 내리친다. 얼핏 보면 웅장하게까지 느껴진다. 푸른 초원의 싱그러운 잔디에는 이슬이 이따금 맺혀있어서, 지금처럼 먼 곳에서 볼 때는 세상을 반사하는 것처럼 비친다.


파란 바닥에 빛이 난다. 하지만 이렇게 텅 빈 세상을 반사해 봤자, 반사되는 것도 텅 비워진다. 풍경은 더욱 적막해지는 것 같다. 애써 무시하고 시선을 더 아래로 내린다. 마을 외곽에 위치한 넓은 산책로가 작게 인식된다. 마을과 거의 붙어있는 가까운 산책로에는 아까 봤던 편안한 사람들이 보인다. 여전히 그들의 얼굴은 어떠한 고통도 없어 보인다. 그들에게 오래 눈을 두지 않는다. 눈을 산책로 바깥으로 둘수록 사람들이 없어진다. 한 명, 두 명, 점점 안 보이다가, 산책로의 끝 쪽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엔 편안한 푸른 초원만이 공허하게 저들을 감싸고 있다. 나는 이내 눈을 한번 감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눈을 뜬다. 비로소 내가 앉아있는 잔디밭을 마음에 담는다. 이곳은 너무나 아름답다. 눈물도, 우울도, 외로움도, 엇갈림도, 뒤틀림도 이곳의 풍경에 개념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곳의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편안해 보인다.


두 손을 잔디에 붙인 자세를 크게 바꾸지 않는다. 고개만 돌려 잔디밭을 둘러본다. 마을과 초원 위에 위치해 있어서,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장소이다. 이곳도 광활한 초원처럼 적막한 건 똑같다. 똑같이 쓸쓸하고, 똑같이 적막하다. 저들에게는 이곳의 본질까지 똑같다 여겨지겠지만, 나에게만은 다르다. 이 외딴 잔디밭은 짙은 녹색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춘록색 잔디밭이다. 이 잔디밭에 있으면 내가 저들과는 다른 불편한 인간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기에 난 이 보잘것없는 장소에 매번 시간을 보낸다. 세상과의 이질감은 이곳에서만 깊게 스며든다. 결국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한 채로, 난 다시 답을 도출하기를 포기한다. 내일, 어쩌면 오늘 저녁에 다시 재개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의 호감을 느낄지언정, 사랑하지 않는다. 저 편안한 자들의 표정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광활한 푸른 초원도, 넓은 산책로도, 마을도, 전부 다 보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는 큰 결함과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불행해지려 해도 불행해지기 버겁다. 이곳은 분명 아름답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충만해지던 때가 있었다. 사람들도 모두 친절해서 이곳이 너무도 만족스러울 때가 있었다. 이제는, 편안한 세상이 엷게 질린다.


이곳에서 나는 오늘도 불편함에 고통받는 꿈을 꾸기를 간절하게 바라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