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면 해임당한 나는 왜 '멋진' 교수인가?
2008년 11월에 항소심에서 승소하였다. 복직은 2009년 신학기에 하였다. 당시 교무처장은 또 다른 목사였다. 그가 아침 교직원 회의에서 신임 교수들을 소개했다. 신임 교수들 소개가 끝나고 복직 교수들을 호명하였다. 내 이름도 있었다.
일어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도 내가 징계위원으로 있었을 때 징계위원이었으니, 총학생회장을 징계하려던 위원들을 향해 내가 ‘독사의 새끼’라고 말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닐 수도 있지만, 내 느낌에는, 그의 말과 표정은 거짓 겸손과, 가식적인 거룩함이 비벼진 것 같았다. 학교를 대표로 어떠한 사과의 말도 없이, 나의 복직을 친근한 듯한 목소리로 알렸다. 일어섰을 때 뭔가 한마디 하고 싶었다. 참았다. 어떤 교수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교수였을 때, 우리 사업을 보조하던 기간제 행정직원이 있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박사 학위도 외국에서 땄다. 어찌 된 일인지 자리를 잡지 못하여, 우리 사업의 기간제 행정직을 내가 교수되기 전부터 맡았던 자다.
그는 기간제 행정직 동안 사람들에게 간을 빼줄 것처럼 열심히 일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가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알지 못하는 그의 가족이 그에게 얼마나 기대할지 생각하니 더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표가 나게 돕는 것은 돕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하여 타인을 이용한 가식(假飾)이다. 예수가 가장 싫어한 것은 바리새인들의 외식(外飾)이다. 성경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잘났음을 알리기 위해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기도하고, 금식하였다. 예수는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라고 쌍욕을 하였다. 어쩌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은, 당시 종교적 실세였던 그들을 끊임없이 그렇게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욕심쟁이다. 구태여 임시직 행정직원을 돕는다는 ‘티’를 냄으로써, 내게 돌아올 하늘의 상급을 잃는다면, 그것은 너무나 큰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교수가 되었다. ‘사직 처리’로 가장해서, 학교가 나를 ‘부당해고’ 한다는 이슈가 커졌을 때, 그가 교수들을 소집했다. 교수들 십여 명이 그의 연구실로 모였다. 나는 고맙게 생각했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는 것에서 힘이 났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 그가 말했다.
왜 일을 벌여 놓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우리를 힘들게 하냐?
나는 도움을 요청한 적이 없다. 그가 교수들을 소집했고, 나에게 자초지종을 알려달라고 했다. 가지 않을까도 생각했지만, 그의 호의를 무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교무처장이 호명해서 내가 일어섰을 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은, 그의 말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나는 일어섰을 때 쓴웃음을 지었다. 남들은 내가 여유 있어 보이려고 억지웃음을 지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를 맨 정신으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검정 선글라스를 쓰고 다녔다. 회의 시간에도, 교직원 예배를 드릴 때도, 검정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내 소심한 복수였다. 나름의 물리적 차단이었다. 6개월 후에 진짜 사표를 쓰고, 더 이상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