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는 무관심하여 몰랐던 식물의 아름다움을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가깝게 느끼고 있다. 저마다 서로 다른 모습과 빛깔, 향기로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한 해 살고 죽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매년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식물도 있다. 씨앗이나 알뿌리에서 자신의 시간이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또 시기가 지나면 시들어 떨어진다. 코스모스나 국화처럼 어렸을 때부터 흔히 보았던 꽃도 있지만, 꽃무릇처럼 한참 성숙해지는 나이에 알게 된 꽃도 있다.
9월이 되면 피었다가 금세 시들어버리는 꽃무릇은 원래 사찰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여기저기 자주 눈에 띄었다. 요즘은 동네 공원이나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다. 꽃무릇의 매력은 꽃잎보다 길게 뻗어있는, 미인의 속눈썹 같은 수술의 아름다움이다. 피기 전의 꽃무릇은 특별히 시선이 머물지 않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꽃무릇의 활짝 핀 모습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난초같이 삐죽삐죽한 줄기만 보고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족두리 같은 꽃이 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교육'이란 것도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어렸을 때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던 아이가 나중에 미스코리아가 될 수도 있고,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못하고 놀기만 좋아했던 학생이 대기만성형으로 나중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도 있는 것이다. 비록 대다수가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믿어주고 장점을 키워주는 것이 교육이 아니겠는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식으로 자신이 떡잎 감별사도 아닌데 척 보면 아이가 잘 될지 못 될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어릴 때, 훈육이라는 이름의 체벌이 당연시되었던 그 시절, 어떻게 보면 진짜 더 심각한 상황도 많았는데 유독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아마 중학교 때 미술 시간으로 기억하는데, 어쩌면 고등학교 때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운동화를 펜으로 스케치하는 실기 시간이었다. 특별히 미술을 잘 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꼼꼼한 성격 덕분인지 데생은 어느 정도 잘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학생이 운동화를 옆에서 본 가로로 길게 측면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리는 게 싫어서 운동화를 세로로 길게 그렸다. 그런데, 미술 선생님은 자신도 없으면서, 잘 그리지도 않으면서 세로로 그려서 비례도 안 맞다고,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울 정도로 면박을 주셨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자존심이 상해서 별것도 아닌 일을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선생님이었다면, "와,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보았구나. 그런데 이렇게 길게 그릴 땐 펜으로 겨누어서 비례가 잘 맞게 그려야지, 잘못하면 너무 길어져서 실제와 차이가 많이 나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혼자 시나리오를 쓰면서 말이다. 매일 큰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제 나도 안다. 하지만, 그 말의 상처는 아직까지 마음에 남아서 그림에 대한 자신감을 떨어뜨리고 미술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한 사람의 말로 인해서.
자기애가 강한 사춘기 시절, 인정받고 싶었던 학생은 자신의 감추어진 잠재 능력을 누군가 찾아서 격려해 주길 바랐을 것이다. '넌 언젠가 꽃무릇처럼 아름답게 활짝 필 날이 올 거야. (비록 지금은 이렇지만...)'
부모도, 형제도 인정해 주지 않았던 나의 장점을 선생님이 찾아서 격려해 준다면 무척 기뻤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내가 의도하든 그렇지 않았든, 누군가의 용기를 꺾고 노력을 무시하는 말을 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