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점점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진다. 친했던 사람과도 생활의 반경이 달라지면 금세 멀어지기도 하고, 나이 들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나 좋은 관계를 지속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특히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30대까지만 해도 곁에는 만날 사람들이 꼭 있었다. 어떻게 보면 외롭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을 그룹별로 관리했던 것 같기도 같다. 여고 동창, 대학 동창, 편입 동기, 성당 친구들이 나의 인맥 전부였긴 했지만 말이다. 한 번씩 연락을 해가며 인연의 끈을 이어갔다.
발령과 이사, 결혼은 이런 친구들과 거의 담을 쌓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 만난 사람들은 '친구'라기보다 '지인'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고, 옛날 친구처럼 지속적이고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아이가 좀 크고 나니 여유가 생긴 것인지 그 틈으로 외로움이 밀려왔다. 특히 어린 시절 친구들이 문득 보고 싶어졌다.
한때 '아이 러브 스쿨', '싸이월드' 등으로 동창이나 옛날 친구를 찾는 것이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사는 게 자리가 잡히지 않아 고민이 많던 때라 무관심한 듯 지나갔다. 한 번쯤 다시 만나고 싶은 친구는 있었지만, 이미 인연의 줄이 끊어져 버린 친구인데 억지로 연을 잇는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나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렇게 재회한 옛날 친구와 꾸준히 만나고 있는 경우는 많이 없을 것 같다.
'싸이월드'를 통해서 한번 만나고 싶다고 먼저 연락해온 국민학교 시절 친구가 있었다. 그때는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이름이 특이한 친구라 인스타그램을 통해 찾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30년 지기 친구도 잃고 외로웠던 시기였다. 내 기억으론 7살 때부터 초등 4학년 때까지 친하게 지냈던 친구인데, 친구가 이사를 간 이후로 연락이 뚝 끊어져 버렸다. 친구는 결혼해서 우리가 살았던 그 동네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40년 만에 만나기로 했다.
강산이 변해도 몇 번은 변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렇게 오랜만의 만남이라면 왜 만나자고 하는 것인지 상대방에게 의혹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일단 전화로 근황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사는 곳이 다르지만, 운 좋게도 연락이 닿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고향 방문을 빙자하여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움직였다. 친구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단순히 어린 시절 추억 팔이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순수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비현실적인 희망이 내심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많은 면에서 더 자연스러워지고 편해지는 것이다. 40년 만의 만남이라도 우리 나이가 있어서인지 걱정했던 것만큼 만남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서로가 기억하고 있는 추억이 조금씩 달랐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웠다. 소꿉놀이하고 인형놀이하면서 놀던 그 시절은 추억의 사진첩 속 흑백사진이 되어 남아있었다. 흑백사진을 뚫고 컬러풀한 모습으로 현실에 나타난 중년의 여인네 둘. 외모뿐 아니라 성격도 달라진 것 같았지만, 그 속에서 기억 속의 모습을 조금 더 찾고 싶었다. 좀 더 가까이 살았으면 더 자주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났는데, 언제까지 계속 만날 수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다. 하지만, 사람들이 동창회를 나가고 옛날 친구를 찾는 마음을 나도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만나고 싶은 중고등학교 동창이 있었다. 그 친구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기에 우리는 갑자기 멀어져 버렸다. 함께 전혜린을 읽고 클래식을 듣고 문학을 얘기하던 그 친구를 못 잊어 꿈에서도 괴로워했던 20대 시절이 있었다. 전무후무한 솔메이트였기에 가끔 궁금해졌다. 나중에 그 친구가 나온 대학의 동창회에 지인을 통해 알아봤더니 독일로 갔다는 소식이었다. 결혼을 해서 간 것인지 단순한 유학인지는 알 수 없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친구가 독일로 갔다는 소식에 좀 의아했지만, 우리가 좋아했던 전혜린이 떠오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질투심이었을까.
추억은 추억일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 한 자락 지울 수 없는 그리움 때문에 오늘도 빛바랜 추억의 앨범을 꺼내본다. 그 속의 정겨운 이름을 작은 목소리로 불러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