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류다 Nov 07. 2023

내 영혼의 너구리 라면




날씨가 갑자기 너무 추워졌다. 이것이 바로 수능 한파라는 것인가. 낮에는 포근하고 조금 움직일라치면 덥기까지 한데, 퇴근할 때가 되면 칼바람이 분다. 오늘은 기필코 퇴근 후 운동을 가겠다는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바람결에 날려가고, 몸을 웅크리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여름에 태어난 사자자리인 나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탄다. 겨울이면 손도 발도 얼음처럼 차가워져 아이의 손이라도 잡으려면 미안해진다. 수족냉증임에도 한창 다이어트에 올인하던 몇 년 전 겨울에는 김 서린 안경을 닦으면서도 꿋꿋이 저녁 산책을 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도 저녁을 먹기 전에는 '저녁 먹고 운동 가야지'하는 생각이 남아있는데, 저녁을 먹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운동할 생각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습관성 게으름인가.


날씨가 추워지니 따뜻한 국물이 땅긴다. 다이어트를 포기하지 않은 나는 국물을 많이 먹지는 않고 꼭 남긴다. 어떨 때는 건더기만 건져먹기도 한다. 떡국 국물이나 좋아하는 들깨가 들어간 국물은 예외다. 라면 국물은 몇 숟가락만 먹고 컵라면 국물은 먹지 않는다. 한동안 라면을 멀리하려고 노력했는데, 가을이 되면서 라면이 자꾸 생각난다. 아무튼 라면을 집에 사놓으면 다 먹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안 사놓자니 남편과 아이가 찾고 그래서 사놓으면 나도 먹게 된다.


최근에 맛 들인 것은 편스토랑에 나온 류수영 씨의 '어구리 라면'이다. 어묵이 들어간 너구리 라면. 별첨된 다시마를 넣고 평소 라면 끓일 때보다 물을 조금 더 많이 붓고 끓인다. 기다리는 동안 어묵은 미리 뜨거운 물에 한번 데쳐 놓는다. 면을 넣고 2, 3분 끓인 후 어묵을 넣고 3분 정도 끓이면 완성! 

나는 꼬들꼬들한 면보다 퍼진 면을 좋아하는 편이고, 어묵도 퍼진 게 좋아서 3분보다 조금 더 끓였다. 면이 퍼진 게 싫은 분은 면을 넣을 때 어묵을 함께 넣고 끓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오래 끓여서인지 꼬치에서 어묵이 풀려서 헤롱헤롱거렸다. 먹을 땐 그냥 꼬치에서 빼먹는 것보다 잘라서 먹는 게 편할 듯하여 가위로 적당하게 잘라서 먹었다. 추운 저녁에 퇴근해서 어구리 한 냄비 끓여 국물 한 숟갈 떠먹는데 짜르르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퇴근 후 지친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내 영혼의 라면 국물! 그래, 이 맛이야!

마지막에 고춧가루 한 술 넣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안 넣는 게 좋다. 생각보다 너구리가 매콤했다. 파도 없고 면은 퍼져서 비주얼은 좀 안타까우나 맛은 끝내줬다. 물론 아무리 맛있는 것이라도 양이 많으면 나중엔 맛을 못 느끼게 되므로 가족과 나눠 먹는 것이 좋다. 


오늘도 어구리를 한 냄비 끓여서 가족과 나눠 먹었다. 가래떡을 끓여 물떡처럼 넣어 먹어도 맛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없어서 생략했다.

대신 후식으로 마카로니 과자를 꽈삭꽈삭 씹어 먹으며 남아있는 스트레스를 날렸다. 스낵을 좋아하는데, 투다리 같은 곳에 가면 기본 안주로 주는 마카로니 과자는 소리까지 맛있다. 그런데, 100g에 칼로리가 480이라니 놀랐다. 다음에는 과자와 라면을 안 사놓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그래도 춥고 배고픈 날, 어쩐지 슬프고 지치는 날이면 오동통한 너구리 한 마리가 몹시 생각날 것 같다.


(참고로 라면 회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 믿어주세요. 입맛에 따라 열라면이나 신라면, 안성탕면이 더 맛있을 수도 있습니다. 야밤에 라면 테러 죄송합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사장님, 제발 그 무는 보내지 마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