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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다 Nov 16. 2022

은행나무 편지



  출근길에 어린 은행나무들이 양쪽 길에서 호위무사처럼 늘어서 있다. 노오란 은행나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니 직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마냥 무겁지는 않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부쩍 힘들던 터였다. 그나마 목요일쯤 되면 목전에 주말이 기다리고 있으니 굳이 긍정 확언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모든 것이 저절로 낙관적으로 변한다. 몸이 무거운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일어나는 것이 고역이지만, 출퇴근길에 길가의 화사한 꽃이나 고운 단풍을 보노라면 시름이 잊히는 것 같다.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노란 은행잎은 일상의 작은 어려움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즐겁게 속삭이는 것 같다.

  노랑이 주는 이미지는 밝고 낙천적이다. 노란색은 자신감, 명랑함, 부와 권위, 풍요로움, 지적인 능력, 에너지 회복과도 관련된다. 비타민이 많은 레몬을 이미지화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비타민 케이스를 보면 노란색인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형광빛이 섞인 듯한 가벼운 느낌의 연노랑보다 연주황색이 섞인 듯한 진노랑을 더 좋아한다.

 가지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에 밝게 빛나는 노오란 은행나무는 물론이고, 짙푸른 잉크를 푼 듯한 밤하늘 아래 별 조각을 뿌린 듯한 은행나무도 참 아름답다. 그런 은행잎을 보면 반짝이는 새 금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 같다. 저 은행잎이 십 원짜리가 아니고 다 금화라면 세상에 굶주린 사람은 많이 줄어들지 않을까?

  노란 은행나무를 보다가 옛 추억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초등학교 시절 나를 예뻐해 주셨던 선생님이 주셨던 책으로 샘터사의 '노란 손수건'이란 책이었다. 한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오랫동안 감옥생활을 하던 남자는 고향(미국 브룬스위크)으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아직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면 마을의 큰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묶어놓으라고 했다. 일말의 기대도 있었지만 실망할 각오를 한 늙은이 빙고의 이야기에 버스 안의 사람들은 마을로 가까이 갈수록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다.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큰 참나무에 묶여있는 수백 개의 노란 손수건! 남편을 기다리는 애타는 마음에 마을 사람들까지 감동해서 나무 가득 노란 손수건을 매달아 놓았다.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라는 올드 팝송으로도 유명하다. 기다리는 마음, 변함없는 사랑, 외로움과 그리움...  

  며칠 지나지도 않아 조금씩 원형 탈모를 보이던 은행나무가 찬란히 빛나던 금발머리를 다 떨어뜨리고 완전히 대머리가 된 후에도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나무 아래에는 나뭇잎 편지가 노랗고 빨간 색실을 엮어 짠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가 바람에 나부낀다. 우리가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것은 내년 가을에 다시 만날 금발머리 그녀. 그때까지는 그리움으로 밤을 지새울지도 모른다.

  노란 은행잎으로 만든 카펫은 노란 벽돌 길로 이어지고, 그 길을 따라가면 에메랄드 성으로 갈 수 있단 말이지. 그 성에 도착하면 마법사에게 무엇을 달라고 청할까. 지혜나 용기를 달라고? 어쩌면 내년 가을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할지도 모르겠다. 그대는 무엇을 청할지 상상해 보면서 'Goodbye yellow brick road!'

# 덧. 은행나무가 물들기 시작할 때 이 글을 몇 줄 쓰다가 말았습니다. 이제 은행잎이 다 떨어질 무렵 글을 다 썼네요.

내게 겨울은 너무 써. 조금만 더 머물러 주겠니, 가을아!


#가을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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