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기에서 창작으로, 그리고 존중으로
어린 시절, 나는 따라 그리는 걸 좋아했다.
만화책을 펼쳐놓고
예쁜 장면을 종이에 한 장 한 장 옮겨 그렸다.
눈을 똑같이 그리고, 머리카락을 예쁘게 색칠하고,
배경까지 그려 넣으면
친구들이 “우와! 진짜 잘 그렸다!”며 감탄했고,
나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게 ‘베끼는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건 그냥 ‘내가 잘 그린 그림’이었고,
‘내 작품’이라 생각했다.
학교 미술 시간에도 주제보다는
‘예쁘게 완성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책 속 그림을 참고하거나,
친구의 아이디어를 살짝 바꿔 그렸다.
창작이란 단어보단, 완성도가 중요했고,
누가 따라 그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게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
내가 공들여 그린 그림을
한 친구가 거의 그대로 따라 그려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나도 한 번 그려봤어”라며 웃었고,
나도 덩달아 웃었지만 속이 이상하게 쓰렸다.
‘그거, 내가 만든 건데…’
그림에는 내 감정과 시간이 담겨 있었다.
내 손끝에서 나온 선,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색감…
그건 단순히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림 하나에도 마음이 스며 있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자란 1990년대, ‘저작권’은 낯선 단어였다.
거리는 불법 복제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리어카들로 가득했고,
그 시절 유행하는 음악이 스피커를 타고
거리마다 흘러나왔다.
정품 음반을 사기엔 용돈이 부족했던 나는
가끔 리어카에서 테이프를 사곤 했다.
좋아하는 드라마 주제가는 라디오에서 녹음했고,
테이프 뒷면엔 좋아하는 노래를 덧씌웠다.
그게 ‘불법’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아서’, ‘간직하고 싶어서’ 했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고,
나의 일상을 글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날의 감정과 장면을 담아
SNS에 조심스럽게 올리는 일이
어느새 나에게는 소중한 ‘기록’이자 ‘표현’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사람의 글에서
내가 정성 들여 찍은 사진과,
그날의 마음을 눌러 담아 쓴 문장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글처럼 포스팅을 해두었고,
어디에도 내 이름이나 출처는 없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메시지를 보내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도 예전에 그랬기 때문이다.
예뻐서, 감동적이어서, 좋아서…
그런 이유로 누군가의 것을 가져왔던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땐 몰랐다.
그 한 문장, 그 사진 한 장에도
누군가의 시간과 마음이 담겨 있다는 걸.
이후로 나는 달라졌다.
누군가의 글이나 사진을 볼 때면
‘이걸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감정이 담겼을까’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나는 내 글 아래 이렇게 적는다.
“공유하실 땐 출처를 남겨주세요.”
짧은 문장이지만,
그건 내 작업의 의미를 소중히 여겨달라는
진심이 담긴 요청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한 줄이 사소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랜 시간 쌓아온 정성과 진심을
가볍게 넘기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다.
저작권이라는 말은 때때로 거창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법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 만든 결과물에 대해,
그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고,
마음과 노력을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서로를 위한 약속이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너무 쉽게 저장하고, 복사하고, 공유한다.
하지만 창작은,
그저 결과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각과 감정이 쌓여 이루어진
작은 ‘나의 조각‘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창작은 예술가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기록하며 살아간다.
그 표현을 존중받고 싶다면,
나 역시 누군가의 표현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좋아서 담는 것도,
감동받아 나누고 싶은 마음도,
누군가의 마음을 지킬 줄 아는 태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닮은 창작물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마주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깊은 감성을 담은 말들도
그 마음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