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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진 Nov 19. 2021

 상실의 곁에 선 소년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사랑'이야기 였다니, 소설을 잘못 읽은 것일까. <상실의 시대>는 나에게 사랑에 관한 소설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은 줄곧 사랑의 '중심'이 아닌 그 '주변'에서 사랑을 바라보기만 했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던 기즈키를 잃은 나오코의 주변에서, 나가사와의 사랑을 완벽히 가질 수 없는 하스미의 주변에서, 그리고 남자친구와 어떤 어긋남을 가지고 있던 미도리의 주변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와타나베는 자신이 나오코의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중심'에 있다고 착각했었다. 그리고 그는 10년이 지난 후 이렇게 말했다.



양화 <상실의 시대>의 한 장면(와타나베와 나오코)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참을 수 없이 슬퍼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슬픈 배신일 것이다. 누군가와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 지나고 나서 이런생각이 든다면 말이다.그러나 그의 이런 말은 또 다른 배신들을 내포한다.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죽은 가즈키를 떠올리기 위해 만났던 것이고, 하스미에게 와타나베는 그녀가 남자친구(나가사와)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뱉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고 이었다고, 또한 남자친구와의 어떤 어긋남으로 인한 미도리의 욕망을 담는 객체였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여자 3명 모두와 '서로만을 위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저 가즈키와 나오코의 사이에, 하스미와 나가사와 사이에, 미도리와 남자친구 사이에 있었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는'비어있는 관계'만 가졌던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이 '빈 관계'의 순서가 중요하다. 이것은와타나베를 사랑의 '주변'에서 '중심'으로 점차 이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순서를 정리 해보면 이렇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통해 '사랑 이후'의 상실(가즈키를 잃은 나오코의 결핍)을 경험하고,

하스미를 통해 '사랑의 진행'중에 있는 상실(나가사와와 하스미의 관계의 결핍)을 경험하고, 

미도리를 통해 '사랑을 시작하면서'의 상실을 경험한다

(와타나베는 그녀와 사귀고 있지 않지만 계속해서 그녀를 상실하곤 한다)


이 순서는 정확히 사랑이 진행되는 순서와는 반대이다. 그러니 마지막에 있어야할 자리는 자연스레 '사랑의 시작점'이 된다. 




<소설의 마지막>
'나는 어느 곳도 아닌 곳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상실'을 옆에 서 줄곧 지켜보던 소년은 이제 사랑을 시작하는 소년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그간의 간접경험들은 다 무용지물일 꺼라 말해주고 싶다. 이제 그 또한 '상실'을 경험하게 될 사람이 된 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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