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 오브 웨일스 5 숲의 입자

피부가 말했어. “왕자님은 욕조에서 물살을 가르는 중이다.”

by 류인환

피부가 말했어.

“왕자님은 욕조에서 물살을 가르는 중이다.”




눈꺼풀을 덮은 그는 자신의 몸 위로 일렁이는 모래알을 떠올렸어. 입자는 융단처럼 섬세해. 왕자는 상상했지. 거친 삼베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욕조에 몸을 담근 모습을. 먼저, 물의 입자 표면에 발이 입을 맞췄어. 입술에 퍼지는 뜨거운 곡면에 발은 황홀해져 잠깐 촉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야. 뱀 같은 다리는 발의 흐름과 중력을 따라 미끄러지듯 입수했어. 뜨거운 물결은 왕자 몸짓에 따라 비단처럼 퍼져나갔어.


왕자가 깨운 물결은 생명체가 되었어. 움직임은 손의 형상으로 변했어. 손은 왕자의 다리, 허벅지, 배꼽 그리고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해. 손은 황색 눈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것일 수도, 어쩌면 검은 눈의 신하들 것 일지도 몰라.


의식이 뚜렷해져. 지금 이곳은 어디이고, 손길은 누구의 것인가. 쓰다듬는 것인가. 붙잡는 것인가. 왕자의 의심에 손길은 서운한 듯 더욱 뜨거워졌어. 곧 화상을 입은 듯 따가워!




왕자는 눈을 떴어.


한줄기 빛이 안구를 관통해. 눈은 잠시 멎었다가 다시 숨을 들이켰어. 미간에 뭉쳐지는 풀과 짐승들의 냄새. 이곳은 숲 속이야. 하늘은 잎사귀로 거진 가려졌어. 간간이 잎 사이로 새는 빛들이 지금이 낮이라 말해. 왕자는 더욱 코를 킁킁거렸어. 공기가 품은 미립자들이 뇌신경에 부딪혔어. 지금은 아침일 거야. 궁전의 정원을 거닐 때 맡았던 시간. 이곳에서는 향수를 뒤집어쓴 듯 강렬해. 지금도 자신을 어루만지는 손길. 누구일까. 풀숲에 누워있던 왕자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어.


수많은 벌레들!


그들이 자신의 몸을 뒤덮었어! 물결의 잔잔한 울림은 벌레들의 맹렬한 날갯짓으로 변해. 피 묻은 사지의 상처 주위에는 고름처럼 위장한 구더기들이 제 몸을 폭발할 듯 울렁대고, 그 위를 주먹 만 한 딱정벌레들이 사냥감을 노리듯 두꺼운 갑각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배회하는 중이야. 왕자는 기겁하며 벌레들을 털어냈어. 그들이 머문 피부는 따가워. 숲의 지면. 이곳은 온갖 곤충과 썩은 나뭇잎으로 가득해.

왕자는 비명을 질렀어.


메아리가 울리자 곧 숲에서 온갖 소리들이 쏟아져 나와. 응축된 물벼락 같은 음파에는 여러 갈래들이 숨어있어. 놀란 깃털이 펄럭이는 소리. 화난 발굽에 돌이 치이는 소리. 실성한 듯 울며 높은 곳의 나뭇가지를 낚아채는 긴 팔의 소리. 동료들을 부르려 공기를 울리는 길쭉한 주둥이의 나팔소리. 썩은 잎을 스치며 내뱉는 혓바닥 소리. 진득한 물가를 울리는 축축한 울음통 소리. 나무를 긁어내는 거대한 콧잔등의 킁킁거림. 북을 치듯 제 살가죽을 때리는 거대한 가슴통의 소리.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무수한 그들은 보이지 않아. 곧 다시 이곳은 고요해졌어. 간간이 새들의 소리만 들려올 뿐. 그들은 전파를 보내듯이 왕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어. 왕자는 상체를 일으켰어. 어깻죽지가 쓰려. 그는 어젯밤 산비탈로 떨어졌지. 다리가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발은 침묵했어. 몸에는 상처와 피가 가득해. 그는 조금 더 누워 있기로 했어.


이곳은 낮의 암흑. 간간히 새어 나오는 흰 빛과 미량의 윤곽으로 세상을 판단해야 했어. 귀를 세우고, 냄새를 맡고, 모근에 집중해야 해.


그래. 이곳이 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자연. 산이라 불리는 곳이야. 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 왕자는 해방되었어. 신하, 의복, 연극, 궁전으로부터.


곧 배가 고파졌어. 무엇을 먹어야 할까. 무성한 이곳에는 막상 먹을만한 것이 느껴지지 않아.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구조물이 생명으로 제각기 생존하는 이 숲. 궁전 바닥의 모래 알갱이는 벌레가 되었어. 석재 기둥은 주름진 나무, 천장은 하늘거리는 잎사귀로 변했어. 그리고 신하들과 백성들 만큼이나 많은 숨 쉬는 존재들은 방 구석구석 숨어있어. 벌레가 문 자리는 벌겋게 부었어. 붉은 신호처럼. 마치 숲이 그에게 말하는 듯했지.


“이곳에서 너는 영역을 침범한 외래종이다. 궁전으로 돌아가라.”

왕자는 코웃음 쳤어.

“난 늘 외래종이야. 너희들을 먹이로 삼아 이곳에서 왕이 되겠다.”



이전 04화프린스 오브 웨일스 4 홍채虹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