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가 왜 살아 있어야 하냐고?
샛별이 현관을 열자, 햇살 머금은 붉은 정원이 보여.
한동안 시린 문고리를 쥔 채 문턱에 머물러 있었어. 늦은 오후. 반쯤 가라앉은 태양은 구름을 붉게 태웠어. 타버린 잔해들은 황량한 교외 언덕길에 붉은 꽃잎이 되었지. 꽃잎은 바람과 함께 길바닥을 쓸어내고 있어. 주인공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난 무대처럼 말야. 샛별의 눈 코 입은 공연을 놓친 관객처럼 저마다의 표정을 드러냈어. 왼쪽 동그란 눈망울에 맺힌 눈물. 체념한 듯 자애롭게 미소 짓는 오른쪽 눈꺼풀. 분노로 부릅뜬 콧잔등. 절망이 양쪽 꼬리를 붙잡은 입꼬리 까지.
또각. 또각.
꽃잎을 짓이긴 하이힐 굽 자국이 보여. 그 옆 누군가의 큼지막한 발자국도 있었지. 아마 꽃을 들고 온 남자일 거야. 발자국을 따라 걸어갔어. 혹시라도 숨 붙은 장미들을 밟을까 걸음 걸음을 신경 쓰면서. 동시에 딸과 그 남자가 같이 꽃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렸지.
낯선 도로에서 걸음을 멈췄어. 허리를 세우고 주변을 둘러보았지. 도로 건너편, 아치형의 거대한 건물이 우뚝 서 있어. 그 아래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을 보여. 자신과는 다르게 은빛 머릿결을 가진 사람들. 다들 젊고 건강해 보였어. 자신, 그리고 어머니들 만큼이나 아름답고 품위가 있었지. 사람들은 붉은 잠옷을 입은 그녀 모습을 힐끔 쳐다보았어. 샛별은 그들 곁에서 대화를 엿들었어.
사회가 잠들었다. 그 바람에 며칠간 몸을 씻지 못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지속될까. 식품 공장에 남은 식량은 충분하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아. 몇몇 사람들은 신이 나서 멸종 보호원으로 갔다네. 사냥하러 갔군. 아무래도 지금은 자유니까. 사회가 정신을 차리면 어쩌려고. 지금처럼 기록되지 않는 순간에는 무엇을 하든 사회는 죄를 묻지 않아.
나는 외출했던 부인을 찾는 중이네. 자네를 두고 다른 도시로 가버렸는지도 모르지. 나라도 당신 아내였다면 떠났을 것이네. 당신과 그녀의 계약 조건이 100년 간의 결혼생활이었지 않은가. 차라리 당신이 부럽네. 10년마다 늘 다른 짝을 만나 살아가야 하는 것도 만만치 않네. 사회는 이상한 악취미가 있는 모양이야.
혹시 다른 도시의 소식을 알고 있나. 아무도 모르네. 바깥으로 가는 길이 모두 막혀버렸다는 얘기가 들려. 왜 사회가 우리를 가둬놓겠는가. 우리는 데이터베이스 그 자체니까. 우리 중 하나가 없어져도 큰 손실일 거야. 그나저나 사회는 괜찮을까. 한두 번이 아니잖아. 이번은 약소한 편이지. 그런데 이곳은 자동차 보관소잖아. 왜 차가 한 대도 없는 거야. 이런 적은 없었어. 정전 이후 그 누구도 차를 본 적이 없네. 내가 마지막으로 차를 본 건 병원 앞이었어. 그 차가 화훼 빌딩을 향했네. 왠 검은 머리 놈이 타고 있더군. 날것의 육체밖에 가진 게 없는 것들. 그들은 원시인과 다름없지.
그때 어떤 사내가 샛별을 가리켰어! “저 검은 머리 여자가 화훼 빌딩으로 가는 차 안에 있었네! 여전히 불 켜진 그 건물 말이야!” “나도 거길 다녀오는 길이야. 왜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야! 비상시엔 서로 돕고 살아야지.” 한 사내가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자, 반사적으로 사내의 팔을 쥐었어. 너무도 쉽게 사내의 팔이 부러졌지. 사내의 비명과 함께 일순간 침묵이 일었어. 백발의 사람들은 그녀에게 물러서며 제 팔을 꽉 껴안았지. 샛별은 사내의 손을 놓고 그들에게 다가갔어.
“저랑 닮은 사람을 보았나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 누군가는 허겁지겁 등 돌리고 달아났어.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그녀 곁을 떠나 내달리기 시작했지. 쓰러진 사내만 남았어. 그에게 또각또각 다가갔어. 사내는 주저앉은 채 뒷걸음쳤지. 그녀는 가는 손가락으로 사내의 아픈 팔을 살짝 집었어. 그는 몸이 굳어버린 채 입술만 들썩거려. “본 적 있다네. 있어요. 네. 자동차를 타고. 어떤 남자와 함께. 앳된 소년이었습니다. 서른도 안되어 보였죠.”
샛별은 사내 옆에 쪼그리고 앉았어. 사내의 귀를 쳐다보며 속삭였지. “그래서 그들은 어디로 갔나요?” 사내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외쳤지. “화훼 빌딩! 불이 켜진 빌딩. 그 소년과 함께 갔습니다. 여자는 소년 품에 안겨 있었어요. 죽은 줄만 알았죠. 아니 당신이 그 여자가 아니라면 죽었을지 모르죠. 피범벅이었으니까.”
샛별은 주저앉은 사내의 백발을 쓰다듬으며 멀리 그녀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훑어보았어. 그중 한 여자가 눈에 띄어. 백발의 여인은 말아 올린 머릿결만큼이나 풍성한 백색 모피 코트를 두르고 있었지. “코트를 벗어 제게 주실 수 있나요. 춥거든요.”
얼마나 걸었을까.
햇살이 옅어진 남색 거리. 인공위성처럼 작게 반짝이는 건물이 보어. 저곳이 화훼 빌딩일 거야. 딸과 그 남자가 있는 곳. 길을 걷는 동안, 샛별의 머릿속에 사는 그녀들이 물었어. 둘을 만나면 어떡할 거냐고. 어떤 이는 지금이라도 둘을 위해 이곳을 떠나버리자고 했고, 누군가는 딸 대신 우리가 그 남자를 가져야 한다고 했어.
해가 완전히 졌을 때. 샛별은 벤치에 걸터앉아 종아리를 매만졌지. 주변을 둘러봤어. 세상은 그녀가 기억하던 풍경과 달라. 거리를 두리번거리는 낯선 백발의 사람들. 아마 그 사회라는 것이 고장 나서, 쉽게 잠들 수 없나 봐. 전기가 나갔던지, 수도가 막힌 것처럼. 그녀가 밤하늘 같은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도로 건너편 거대한 검은 벽을 보았어. 대문이 활짝 열린 검은 빌딩. 기이하게도 외벽은 너무 짙어 형체마저 보이지 않았지. 이끌리듯 그곳을 걸어 들어갔어.
금속으로 사방이 둘러진 주광 빛의 실내. 복도 주위로는 석상처럼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들이 멈춰 서 있어. 그중 하나는 손바닥 끝으로 바닥을 가리키는 모양이야. 금속 바닥엔 마른 핏방울이 잔뜩 흩뿌려 있었지! 살결이 요동치는 느낌에 샛별은 두 팔을 끌어안았어. 걸어가 무릎을 굽혔지. 바닥에 눌어붙은 핏덩이를 손톱으로 죽 긁어내 입술에 집어넣었어. 눈을 감고 혀를 오물거리다 내뱉었어.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