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22 검은 쥐

지금은 검은 쥐가 되었지만, 나는 그에게 물뱀입니다.

by 류인환

유리가 얼마나 달렸을까.


흩날리던 붉은 눈은 어느새 마른 잎이 되었어. 낙엽은 작은 조각으로 절단되어 흩날려. 유리는 손등에 떨어진 잎 조각을 집었어. 4밀리미터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절단된 낙엽에는 글귀가 적혀있어. 퍼즐 조각처럼 부분만 드러낸 문자를 알아볼 순 없었지. 누군가가 천장에서 낙엽 더미를 파쇄하는 모양이야. 기록된 글귀들을 삭제하고 있어. 낙엽은 토끼 발을 가릴 정도로 덮였어. 토끼 등에서 내린 뒤 유리는 붉은 낙엽 길을 걸었어. 걸음마다 특유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나. 토끼는 여전히 말이 없어. 유심히 그를 쳐다보며 걸어갈 뿐. 유리는 실을 팔목에 휘감은 채 한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어. 그러자 이 공간에도 크게 바람이 일어. 쌓인 낙엽 더미는 조류를 탄 듯 삼각지와 하천의 형상이 되었고 굴곡 사이 쌓인 낙엽들은 혈류처럼 흘러갔어. 그는 거대한 혈관 속을 걷는 느낌이라 했어.


팽-


실이 걸린 듯, 더는 당겨지지 않았어. 낙엽 더미 아래에 무언가 있어. 낙엽 조각들은 액체처럼 그 형상을 덮은 채 흘러가. 실은 그곳에 박혀 있어. 풀어헤쳤어. 검은 상자. 상자는 붉은 실로 감겨 있었어. 마치 누군가가 실로 단단히 동여매어 봉인한 듯. 유리는 고개를 돌려 토끼에게 웃어보았어. 이것을 열어볼까 물어보는 표정으로.


토끼는 별안간, 유리를 노려봐.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해. 토끼의 이빨은 장도리처럼 날카로웠어. 사지를 금방이라도 뚫어버릴 수 있을 듯. 유리는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어. 토끼는 대답하지 않아. 그는 뒷걸음쳤어. 토끼는 그만큼 한 발 씩 다가왔어. 토끼의 얼굴이 일그러졌어! 벌린 주둥이 아래 송곳니가 점점 길어지더니 토끼의 입천장을 뚫어버렸어. 키! 토끼는 괴로운 듯 비명을 지르고 날뛰었어. 발길질에 유리는 그대로 넘어졌어. 그리고 몸을 질질 끌며 뒤로 멀어졌어. 토끼는 얼굴을 더욱 찡그려. 변형된 얼굴은 괴물 같았지. 털이 붉은 낙엽 위로 서벅서벅 떨어지기 시작해. 드러난 맨 살에는 소름 돋듯이 닭살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곧 날카로운 각질이 되었어.


토끼는 백색 해태가 되었어.


유리가 어렸을 때, 보았던 얼굴. 그의 집 대문에는 그 얼굴의 문고리가 있었지. 악을 물리치는 짐승. 몸은 비늘로 덮여있고, 콧등에 솟아난 송곳니는 머리로 옮겨 하나의 뿔이 되었어. 웅크린 다리에는 날개 같은 깃털이 달렸어. 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만, 두터운 다리는 날개 따위 없어도 하늘까지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아. 그때, 상자가 덜컥거렸어! 동여매어진 실타래를 뜯어버릴 듯, 안쪽의 무언가가 발버둥 쳤어. 해태는 흠칫하더니 천둥 같은 울음소리를 던졌어. 유리는 기겁하며 얼른 상자 뒤로 숨었어. 해태는 점점 다가왔어. 그는 더욱 뒤로 내뺐어. 그렇게 십 미터 정도를 더 걸었어. 상자와 그가 멀어지자 해태는 입을 다물어버리고는 온순해졌어. 엎드려 떨고 있는 그에게 거대한 머리를 대더니 긴 혀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지. 열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해. 상자도 더는 움직이지 않아.




“살려주세요.”


상자 속에서, 누군가 외쳤어. 유리는 뒤돌아 먼발치에서 그것을 쳐다보았어. 해태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어. 상자 안에서 다시 누군가 외쳐.


“그 여자를 찾고 싶지 않습니까? 실은 끝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그 실을 평생 따라가도 쫓을 수 없어요. 내가 찾아 줄게요. 실을 버려요.”


적어도, 상자는 그 여자의 행방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때, 해태가 몸을 날려 상자로 돌진했어. 부숴버릴 듯이. 지금의 몸집과 발톱이라면 충분히 상자를 조각 내버릴 것 같았지. 유리는 여러 가지 생각이 겹쳤어.


해태가 상자 안 누군가를 죽인다면, 영원히 그 여자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잖아. 돌아갈 곳도 몰라. 해태도 자기가 어딜 향하는지 모르잖아. 날 따르기만 할 뿐. 그런데 유일한 단서일 수 있는 상자를 없애려 해. 해태가 과연, 나를 도와주려는 것일까. 그래. 토끼를 처음 보았을 때, 백색 공간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지. 내가 이 공간에 녹아 사라질 뻔했을 때도 가만히 있었잖아. 그들은 어쩌면 내가 여자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것일지 몰라. 처음부터 내게 어떤 호의도 베풀 마음이 없었어. 안돼. 해태가 저 상자를 죽이게 하면 안 돼.


"건들지 마!"


유리가 외쳤어. 별안간, 해태는 공중에 뜬 채 멈췄어. 정지화면처럼. 어쩌면 유리의 의지에 따라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어. 없애야 할까. 유리가 그런 생각을 할 때. 해태는 전파가 약해진 텔레비전 화면처럼 흐릿해졌다 뚜렷해졌다를 반복했어. 고민되었어.


“토끼를 죽여야 합니다.” 상자가 말했어. “토끼는 당신이 영원히 여자를 찾지 못하게 방해할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유리는 얼른 상자에게 물어보았어.


“나는 당신이니까. 당신을 잘 알고 있습니다. 토끼에 대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토끼는 당신을 아끼는 존재가 맞습니다. 하지만, 방법이 옳지 않아요. 토끼는 당신이 여자를 영원히 찾지 못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송곳니를 보았지 않습니까. 찾으면, 토끼는 바로 여자를 죽여버릴 거예요. 나를 믿어요. 이곳에서 당신과 대화가 가능한 것은 나 뿐이지 않습니까, 조언할 수 있는 것도 나 뿐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당신입니다.”


유리는 해태를 공중에 띄운 채 낙엽 더미에 주저앉아 고민했어.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상자는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어. 유리는 해태를 살리기로 했어. 자신을 위하는 존재라니까. 대신 작게 만들었지. 토끼 다운 크기로. 적어도 그녀에게 위협은 되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해태는 공중에서 힘없이 떨어졌어. 껑충껑충 뛰어와 무르팍에서 그를 올려다보았어. 더는 그를 노려보지 않았지.


투두둑. 툭. 상자에 금이 가기 시작했어. 내부 생명체가 부풀어 오르듯. 상자 사방이 불룩하게 솟아나더니 펑 하는 굉음과 함께 터졌어. 연막탄처럼 검은 가루가 붉은 공간에 맺혀. 연기가 걷히자, 거대한 검은 쥐 한 마리가 나타났어.


“내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 검은 쥐라고 모두 악당은 아니니까.” 쥐는 유리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대답하고는 두 발로 선 채 웃었어. “자, 그 여자를 찾으러 갑시다.” 검은 쥐는 그와 토끼를 제 등에 태웠어. 그리고 나지막이 흘려 말해. “토끼를 삭제하지 않은 것. 후회할 겁니다.”





그는 날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그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 해도 모든 것을 다 기획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는 그저 뇌가 흩뿌려놓은 낙엽 조각 데이터에 따라 무작위로 움직일 뿐입니다. 나는 동시에 그입니다. 그를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실, 그녀를 죽이는 것은 나입니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토끼가 삭제되어야 했으나, 결국 그는 죽이지 않았어요. 대신 토끼를 무력하게 만들었으나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라도, 토끼는 내가 여자를 찾아 죽이려는 순간에 달려들 것이 분명하니까. 이곳. 그의 세상이자, 비유하자면 몸입니다. 그는 나를 쥐로 만든 것으로 보아, 바이러스라고 인식하는 모양입니다. 언제든 날 제거할 준비를 한 게 분명합니다.


그에게 실망했어요. 날 바이러스 취급하다니. 지금은 검은 쥐가 되었지만, 나는 그에게 물뱀입니다. 계속 그에게 말했어요.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겹게도 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인지도. 이제 내가 행동할 차례입니다. 그가 변하면 내가 온전치 못하니까.


나는 이곳 배경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그가 잠시 떠올렸던 잔상.


백색 눈이 덮인 산. 백색 올빼미가 소리 없이 날아와 쥐를 덮치는 장면. 올빼미 꽁무니에서 서서히 갈고리 발톱이 드러나, 쥐의 살갗을 뚫어 쥐는 모습. 그는 그걸 바라고 있나 봅니다. 다행히 여기 올빼미는 없어요. 횡포가 대단한 범고래가 먹어버렸죠. 일단 그를 백색 산으로 데려갈 생각입니다. 나의 계획은 이래요. 그와 함께 산 정상에 올라가 멀리 떨어진 검은 점을 보여줄 겁니다. 그가 떠났던 그 공간. 사거리의 횡단보도와 많은 행인들이 서 있는 곳. 나 없이 그는 자신의 공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사실, 그 흑점은 동시에 수백 개로 존재하니까. 천억 개의 은하처럼. 이 백색의 우주에서, 그 역시 수백 명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는 단 하나의 흑점에서 갓 태어난 핵 일 뿐이니까요. 이 꿈속의 그는 단지 신경의 신호에 의해 일어나는 스파크 조각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도 그들 중의 그가 특별한 이유는 변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포를 뚫고 나온 단 하나의 핵입니다. 그 핵이 몸의 염증을 일으키기 전에, 나는 그를 다시 그의 공간 안으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유지되어온 그의 내면 그대로. 내가 보기엔 진정한 바이러스는 그 여자입니다. 그동안 나와 그가 함께 이루어놓은 이 세계의 항상성을 파괴하려는 악당이란 말입니다. 그 여자는 하이에나였던 날 배신했고, 거의 죽일 뻔 했었죠. 둘 다 없애버려야 하지만 나는 그 만은 죽일 수 없습니다.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로서. 그가 그저 수백 개의 그 중 하나일 뿐이며, 해가 되는 변종이라고 할지라도. 설득할 생각입니다. 그에게 현실을 보여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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