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20 재회

유리는 그 여자를 꿈속으로 불러내었어. 확인하려 해. 실체인지 허구인지.

by 류인환

검은 공간, 백청색 물결은 분제하듯 정돈되어 횡단보도가 되었어. 그리고 지면에 얹어졌지. 횡단보도는 수평선 끝으로 뻗어갔어. 그 끝자락엔 부러진 신호등이 서 있어. 수평선 위로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금빛 태양을 찍었지. 그러자 태양을 중심으로, 햇살은 원형으로 뻗어갔어. 투명도 있는 옅은 오렌지색은 실크스크린 인쇄기법처럼 일정한 농도로 천천히 인쇄되었어. 수평선 아래로는 모래 같은 입자들이 지면으로부터 살며시 솟아올랐지. 알갱이들은 형상을 잡았어. 어둑어둑한 사거리. 꽉 막힌 수백 대의 자동차들이 되었어.


이제 사람들을 그렸어. 울고 있는 꼬마. 화를 내며 다투는 현장의 사람들과,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는 건너편의 관중들. 그들은 순간 마법에 걸린 듯 모두 멈춰 있었어. 하지만 그들의 옷깃, 머리카락은 들어차는 바람에 흔들거렸고, 전광판에서는 연이어 광고가 흐르고 있어. 세밀히 보이지 않은 주변에서는 차들의 경적소리,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


마지막으로 유리는 자신의 맞은편 멀리, 횡단보도 선상에 그 여자를 다시 세우려 했어. 우선 신발을 그렸어. 검게 빛나는 흑요석의 하이힐. 아주 단단하게 지면에 박아 놓았지. 자신이 온전히 기억하기 전까지, 행여 그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리고 기다란 종아리. 무릎. 허벅지까지 빚었어. 분해된 마네킹처럼 지금 그 여자 다리만 둥그러니 지면 위에 서 있어. 유리의 손엔 보라색 천이 쥐어졌어. 힘껏 마네킹에 던졌어. 천 더미는 공중에서 펼쳐져 울긋불긋 몸의 윤곽을 만들었어. 그리고 마네킹 위로 안착해 토르소를 완성했어. 원피스 어깨에서 얇은 팔이 피어 나와. 팔 끝 손목이 꽃봉오리처럼 굽어졌다가, 가는 손가락을 잎처럼 활짝 피웠어. 얼굴 없는 머리가 나오고 갈색 머리카락이 무수히 솟아 나왔지. 머릿결은 바람 없는 공간에서 원피스와 함께 천천히 흩날리며 목덜미를 더욱 하얗게 보이게 만들었어. 해는 저물었고, 밤이 된 검은 세상에 그녀는 달처럼 돋보여.


그러나 얼굴을 그려낼 수 없었어.


멈춰있던 그를 지긋이 응시하는 눈빛, 오뚝한 코, 붉은 입술. 모두 기억하지만, 얼굴은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어. 유리는 미간을 찌푸렸어. 그러자, 세상에선 어떤 말소리도, 잡음도 들리지 않아. 멈춰진 시간은 온전히 그의 것이야. 그는 떠올려보았어. 지난 꿈들. 구미호처럼 그 여자가 둔갑한 존재들이 자신에게 저지른 일들을. 눈앞의 저 여자는 실제일까. 상상일까. 그녀에게 다가갔어. 유리가 첫 발걸음을 떼자, 뚜벅 소리가 들려. 뚜벅 뚜벅.


유리와 그녀 사이 횡단보도에는 수십 대의 자동차가 격자무늬처럼 서로 엉켜있어. 그는 직선으로 걸어가다 멈춰있는 차체 앞에서 멈췄어. 자신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 가로로 세워진 중형차 운전석을 열었어. 그 안에는 중년의 남자가 허공을 보며 운전대를 잡고 있어.


유리가 만들어 놓은 사거리의 사람들과 달리, 그 남자 얼굴의 반은 미세한 가루가 되어 공기 중에 흩날리고 있어. 이 공간이 우주라면, 그것은 소멸된 행성의 잔해. 부유하는 작은 성운일 테고. 0과 1의 세계라면, 온전히 복구하지 못해 일그러진 데이터일 거야.


나는 유리에게 다시 한번 미안했어. 그와 나의 만남이.




유리는 운전석 남자 어깨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어. 몸통을 안고 깍짓손을 꼈지. 힘껏 그를 잡아당겼어. 그는 속 빈 캔처럼 가벼워서, 우득- 소리와 함께 길바닥에 던져졌어. 데골-데골 하는 요란한 깡통 소리를 내며 횡단보도 저 멀리 굴러가는 중이야. 보이지 않을 때 즘 둔탁한 충격음이 한번 울렸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어. 유리는 운전석으로 비집고 들어갔어. 목표물에 접근하기 위해 파이프를 통과하는 군인처럼. 차내에서 조수석 문을 열려고 몸을 비트는 순간 유리는 뒷좌석에 앉은 꼬마를 보았어.


꼬마는 머리부터 상체까지 모두 가루로 흩날리고 있어. 그럼에도 이상하게, 유리는 꼬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아챘어.


꼬마. 그 공중에 퍼진 입자는 모자이크처럼 어느 정도 윤곽을 이루었고, 동공이라 짐작되는 부분이 유리의 몸을 훑어 보듯 너울거리고 있어. 유리가 일으키는 미세한 바람 때문인지, 꼬마가 아직 살아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이는 입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유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도중일지 몰리.


그는 차 밖으로 나오려 문을 열었어. 쾅- 조수석 차문이 다 열리지 않아. 옆 차체에 문이 부딪혀 기다란 긁힌 자국이 생겼어. 그는 짜증이 난 듯 힘껏 차 문을 찼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간 문 아래 캐비닛에는 술이 하나 들어있어. 술병은 깨졌어. 아스팔트 바닥에 흐르는 깊은 흙색의 위스키. 그리고 번뜩이는 유리 파편들. 유리는 액체가 담긴 유리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 마셔보았어. 혀를 타고 흐르는 알코올에 알싸한 기분이 들어. 가까스로 비집고 차 밖으로 나왔을 땐, 꽉 막혀있던 차들이 사라졌어. 유리는 급했어. 그에겐 당장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는 서둘러 걸어갔어.


나는 아쉬웠어.


유리는 알아채지 못했어. 그 꼬마가 자신이란 걸. 그리고 운전석에 있던 중년의 남자는 나란 걸. 지금 유리를 만들었던 유년의 기억. 내가 유리에게 저지른 일. 유리는 지우려 했지만, 훼손된 기억은 이 세계에서 스스로 제 몸을 추스르고 있었지. 나는 알았어. 유년의 유리가 유리에게 알려주려 했던 것. 유리의 몸을 구성하는 원자만큼 그의 안엔 수많은 존재들이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먼 원자들끼리의 거리만큼 존재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우주 속 별처럼 고립된 채 동면하고 있다는 걸.




유리는 그 여자 앞에 섰어.


하이힐에 구두 끝이 맞닿을 정도로. 어떤 냄새도 소리도 드러나지 않아. 몇 걸음 물러났어. 시야에 그녀 전신이 보였지. 흩날리는 머릿결. 풍성해 보여. 다가가선 손가락을 뻗어 머리카락 사이로 넣어 보았어. 유리 몸을 데워주었던 거인을 떠올리며. 머릿결은 부드럽게 요동쳤지만 손을 빼자 제자리로 돌아섰어. 유리는 왠지 불안해졌지. 그녀 손목을 잡아 올렸어. 감촉은 백옥 같이 매끈하고 시려. 손목을 놓았ㅇ어. 팔은 침잠하더니 제자리를 찾았어. 유리는 실망했어. 자각몽. 지금 꿈을 꾸는 중이라는 걸 알아.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이번은 어떤 접근도 할 수 없는 셈이야. 힘껏 안아보았지만 팔을 빼자 그녀 옷가지는 말끔히 정돈되었어. 살갗을 긁어보았지만 붉은 자국은 금세 흔적 없이 아물었어. 모든 질문과 행위는 그녀에게 무효가 되는 셈이야. 그래서 유리는 그녀에게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렸어.


주먹을 꽉 쥐었어. 유리 손에 무언가 쥐어져 있어. 푹신한 촉감. 고개를 내렸어. 붉은 실이 얼기설기 엉켜 만들어 낸 털모자 하나. 손은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어. 손가락을 멈추려 했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아. 꿈을 제어할 수 없어! 유리 다리가 번쩍 들어 올려졌어. 그리고 땅바닥을 내리쳤어. 반동으로, 그의 몸은 그녀 쪽으로 덥석 다가갔어. 유리는 당황했어. 입으로는 그만하라고 외쳤지만 그의 손은 반대로 붉은 털모자를 늘어뜨려 그녀 머리에 씌웠어. 모자를 팽팽히 양쪽으로 잡아당기고는 목덜미까지 덮어. 그녀는 교수형 당하 듯 머리에 두건 쓴 꼴이 되었어. 여전히 몸은 말을 듣지 않아. 이번엔 검은 펜이 쥐어졌어. 손은 그녀 얼굴이 덮인 털모자 위로 검은 선을 그었어. 아치 모양의 눈 두 개. 일자로 내려 그은 코. U자 모양의 입술. 웃는 얼굴을 그렸어.


그녀가 움직여!


그녀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어. 기다란 팔을 맹렬히 휘젓더니, 정지했어. 그리고 얼굴을 더듬어. 웃는 얼굴이 그려진 털모자를. 그 바람에 웃는 얼굴은 일그러졌지. 그녀는 손가락을 번뜩이며 털모자 한쪽 귀퉁이를 뜯어내었어. 제 살을 뜯어내듯. 그녀의 행동을 보았을 때, 드러날 그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할지. 유리는 두려워졌어. 그녀는 유리 앞으로 다가와. 목을 유리 쪽으로 더욱 당겼지. 붉은 털실 속 그녀 코가 유리 코에 닿았어. 그녀 입에서는 연신 훅 하는 거친 숨소리가 뿜어 나와. 훅-훅-훅-훅


십여 초 정도를 유리에게 그렇게 씩씩거렸어. 그녀는 천천히 유리 손목을 들어 올려. 백옥의 손은 데워진 듯 뜨거워. 타는 듯 붉은, 일그러진 웃는 얼굴이 진짜라 생각 들 만큼. 강제로 유리 손바닥을 폈어. 두건에서 뜯어진 붉은 털실 가닥을 올려놓고 그의 손아귀를 닫았어. 그리고 등 돌리고 뛰어갔어.


멀어지는 만큼, 털모자는 아래에서부터 뜯어져 줄어들어. 실은 유리 손을 빠져나갈 듯 위태롭게 요동쳤어. 그제야 몸이 움직여졌고. 그는 생각할 틈 없이 실을 움켜잡았어. 그녀는 멀리서 멈춰 유리를 바라보았어. 길고양이처럼. 그도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어. 그녀가 쓴 털모자는 반쯤 뜯어졌어. 아래로 새하얀 코 끝, 입술, 목덜미가 드러났지. 그녀는 웃었어. 드러난 부분을 보았을 때 틀림없었지. 유리는 생각했어. 나를 보고 웃는 표정을 보았잖아. 얼른 쫓아가야지.




유리는 그 여자를 꿈속으로 불러내었어. 확인하려 해. 실체인지 허구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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