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안에서 태어난 토끼이기도 해요.
실을 따라가는 동안, 세상이 옅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어.
횡단보도 주변 남은 자동차들은 모두 흰색. 길바닥에 돌처럼 띄엄띄엄 있어. 그러고 보니 세상은 어느새 순백색이야. 주위를 둘러봤어. 건물도 사람들도 사라졌어. 지면 역시 백색이야. 아스팔트인지 벽돌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지. 질감이 없었으니까. 유리는 뒤를 돌아보았어. 흰 공간 사이, 멀리 떨어진 소실점에 먹물 스민 듯 검은 구체가 박혀있어. 구체 안에는 작은 도시가 보여. 유리가 기억해 낸 사거리의 공간. 곧 유리는 알게 되었어. 자각몽에서 실타래를 쫓다 그가 만들어 낸 범위를 넘어갔다는 것을. 소실점 끝 검은 구체만이 그가 아는 곳이야.
팽-
손목에 감긴 실이 당겨졌어.
다시 실을 따라 뛰어갔어. 얼마나 뛰어갔을까. 숨이 턱까지 막힌 그는 무릎을 굽히고 멈춰 섰어. 소실점은 얼굴의 점 만큼 작아졌어. 이곳은 미지의 영역이야. 유리의 기억 역시 점점 흐릿해지고 있어.
유리의 동공이 멈췄어. 눈앞에 방금 전만 해도 늘어선 자동차 대신 거대한 흰색 토끼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어. 그들 눈은 크고 빨개. 동물의 것이라기보다 자동차의 붉은 헤드라이트 같아. 일제히 유리를 보고 있어. 십 초쯤 지났을까. 그들은 일어섰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유리를 경계하는 듯 말야.
백색 토끼들은 유리에게 기어 왔어.
살집을 보아선, 언제라도 그가 도망가면 쫓지 못할 것 같았지. 그래서 유리는 침입을 내버려두었어. 2미터의 거대한 구체들은 흰색 공간에 원형 그림자를 달고 유리 발끝까지 도착했어. 그들은 연신 킁킁거려. 얼굴을 유리에게 부딪혔지. 그 바람에 그가 넘어질 뻔했지만 주위 수 십 마리의 토끼들 얼굴에 유리 엉덩이가 튕겨질 뿐이야. 그들은 혀를 날름거려. 생각했던 것보다 긴 혀는 뱀 같아. 그의 몸을 진득한 백색 액체로 뒤덮은 다음에서야 그만두었지.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갔어. 유리는 이 공간에 다시 고립되었어. 쪼그린 채 토끼들을 관찰했지. 그들 역시 무리들을 향해 웅크린 채 서로를 마주보며 헤드라이트 같은 눈을 깜빡거렸어. 마치 수신호로 그들끼리 논의하듯이.
주위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들처럼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유리는 주저앉았어. 곧 누웠어. 편해. 흰색 천장이 보여. 어떤 소리도 바람도 흐르지 않는 곳. 누구도 말을 걸지 않고, 부르지도 않아. 신경 쓸 일도, 고민해야 할 일도, 누구를 찾으러 갈 이유도 없지. 문득 그는 의문이 들었어. 누구를 찾아야 했었나. 유리는 고개를 들어 토끼들을 바라보았어. 그들은 귀를 쫑긋거리며 유리를 바라보았어. 그리고 눈을 점멸해. 유리도 눈을 끔뻑거렸어. 그들은 유리에게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라고 했어. 유리는 점멸등의 수신호를 알아들었어.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까지.
그들은 말했어.
“있잖아. 지금처럼 응답 없는 긴 시간은 내 감정을 망가뜨려. 대답하지 않는 것들은 내게 기대를 심어 놓으니까. 사람이든, 실체 없는 관념이든, 서로의 의중을 숨긴 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짐작으로 상상할 뿐이거든. 그들이 내게 무엇을 줄지 알지 못한 채 밤새 기대만 굳힐 뿐인 거야. 내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만큼, 누구도 나를 알 수 없어. 그래서 기대는 날 실망시키지.”
유리 몸이 나른해졌어. 백색 바닥은 밀도를 잃었고, 그는 지면과 합쳐지듯이 내려앉아.
"물론 기대가 늘 어긋나진 않지. 원하던 것을 쟁취할 때가 있어. 뜨거운 마음에 즐거운 화상을 입고 설렘으로 잠 못 이루던 순간.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영원하지 않잖아. 무덤덤해지는 것. 예전 같지 않다는 말. 시간은 우리를 늙게 만들어. 감정 말이야. 예전의 그 환희, 뜨거움이 미지근해질때. 우리는 죽어가는 거야."
유리는 읊조리고 있었어.
눈을 떴어. 살짝 고개를 들어 누운 육체를 바라봤어. 반쯤 백색 바닥에 묻혀있어. 곧 방의 일부가 될 것 같았지. 토끼들은 일제히 유리를 쳐다보고 있어. 그들은 붉은 눈을 연신 끔뻑거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유리는 토끼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어. 공황의 방에서 애초부터 토끼들은 말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팽-
손목의 실이 당겨졌어. 눈 앞에 붉은 실의 잔상이 떠올라. 유리는 다시 홀린 듯 읊조리기 시작해. '이 백색의 캔버스 안에, 붉은 실은 물감이 되어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말을 끝맺자, 유리 눈앞에 붉은 선이 펼쳐졌어. 마치 어디선가 본 해초들의 춤 같기도 했지. 붉은 실은 그림을 그려.
붉은 빛. 붉은 등. 붉은 유리조각. 붉은 옷. 붉은 손톱. 붉은 눈. 붉은 머리. 붉은 입술. 붉은 혀. 붉은 뺨. 붉은 털. 붉은 원숭이. 붉은 피. 붉은 살점. 붉은 이빨. 붉은 뼈. 붉은 물방울. 붉은 목소리. 붉은 마스크. 그리고 붉은 눈.
이 공간 천장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해!
피처럼 붉은 색의 함박눈.
얇은 얼음 조각은 가볍게 살랑거리며 지면에 닿았어. 곧 무수한 결정은 녹아버렸지. 바닥에 붉은 샘물을 이루기 시작해. 마치 적혈구처럼. 유리의 머리와 어깨는 금세 젖기 시작했어. 유리는 머리카락을 만져보았어. 그의 손은 따뜻한 핏물로 물들어 있어. 주변 역시 물들었어. 순백색의 공간은 종이처럼 붉게 물들었어. 토끼들이 생각나 주위를 다시 두리번거렸어. 흩날리는 붉은 눈 사이로 붉게 물든 토끼들이 웅크려있어. 유리는 다가갔어. 그들은 붉은 빛을 깜박거릴 뿐 도망치지 않아. 토끼 머리를 쓰다듬었어. 축축이 젖은 붉은 털은 따뜻해. 그래. 그 여자가 기다리고 있어.
유리는 토끼의 거대한 등에 다리를 올려보았어. 토끼는 알아들었다는 듯 몸을 더욱 웅크렸지. 올라탔어. 그를 태운 채 기지개를 길게 켰어. 그리고 내달리기 시작해!
그는 매우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어요.
자신이 재현해 낸 백색 공간에서 길을 잃다니. 우리들은 그를 알아요. 그날 밤, 사거리에 갇힌 그를 몇 시간 동안이나 지켜보았으니. 그가 차로에 들어서고 나가기까지 행적을 우리 모두가 목격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는 집단의 기억력으로 그의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물론, 우리가 실제로 그를 목격한 것은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이곳은 그가 구현한 세상이며, 우리들 역시 그가 재현한 행인과 자동차일 뿐이니까요. 그의 안에서 태어난 토끼이기도 해요.
사거리의 대형사고.
당시를 이야기하자면, 사람들이 빠져나간 그곳에서 그 혼자 갇혀있었어요. 차들이 그를 스치고 까마득히 사라질 때, 그는 마치 자신을 두고 보란 듯이 떠나는 것 같았다고 했어요. 자신에게 다가오 듯, 떠나버리는 일련의 행동. 그리고 행위들의 반복. 마치 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지나치는 차들을 보며 그는 분명 열등감이 생긴다 했어요. 무력감도 들었다 했어요. 자신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들에 대해 대꾸할 명분도, 대응할 수단도 없었으니까. 손을 흔들어도, 소리 지르며 멈춰 세우려 해도 반응 없는 사람들. 그들을 보고 남자는 알았어요. 자신이 무효가 되는 입장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겠다고요. 무력감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그는 소외감이 들었다고 했어요. 우리가 판단하기에-우리는 동시에 그이기도 하지만- 그는 스스로에 대해 눈금을 정하는 버릇이 있어요. 머릿속으로 점 찍어둔 부표를 향해 헤엄치는 꼴이죠. 거친 바다를 건너 그곳에 닿도록. 손이 닿으면 눈금은 그의 소유가 되는 게임인 거죠. 자신의 기대치를 높은 곳에 던져놓고는 다시 그것을 쟁취하고 기뻐하곤 했죠.
하지만 손이 닿지 않을 때에는, 부표에 걸어놓은 자신을 내버려둔 채 돌아오게 돼요. 되찾지 못해요. 그 결과로 해안가 모래사장에 서있는 자신과, 바라보는 먼 곳에 떠 있는 부표와의 거리만큼 멀어지게 되는 거예요. 무엇이 멀어지냐면, 스스로의 기대치와 자신의 본 모습이. 자신이 스스로에게 소외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소외된 사람은 겁이 많아져. 타인에게 소외된다면, 적어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스스로를 부둥켜안을 수 있지. 하지만 자신의 기대치 즉, 아름다운 면에게 소외된 사람은 기댈 곳이 없어요. 기대하지 않는, 추한 면 만을 붙잡고 주위 눈치만 보게 되는 거야. 가진 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 뿐이라 쉽게 상처받기 마련이거든. 매우 취약해져. 마치 숨을 곳 없는 초원 위 토끼 무리들처럼. 지나치는 가벼운 말이 의미 없는 바람처럼 그의 몸을 훑고 지날 때, 벌거벗겨진 그는 화상을 입어요. 화상은 쓰라림 자체로 만성적인 질병이어서,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했죠. 그래서 누구와 조금만 살과 마음이 부대껴도 쓰라림이 강해지고 그 대상을 미워하게 되어버린 거야. 아프니까. 자신의 잃어버린 가죽 때문에.
그는 이곳에 있으면 무엇에게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어요. 이곳은 자신밖에 없는 세상이니까. 누구도 자신을 비난하거나, 누구와도 비교당하지 않죠. 그는 이 공간에 서서히 녹아들었어요.
그런데 별안간 눈을 떴어. 그리고 백색 늪에서 빠져나왔죠. 그가 뜬금없이 뭘 찾으러 간다고 했어. 우리는 그가 찾는다는 것이 자신이 오래전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들 일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모르지만 일단 따라 나서기로 했어요. 앞서 말했듯 어차피 우리는 그 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