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18 죽임을 사랑하는 삶

아침이 오면, 사라진 그녀를 그리워한다고.

by 류인환

그런 아가가 변했어. 언제부터였을까. 아가가 성체가 되었을 때, 내게 뜬금없는 말을 한 적 있네. 아가도 짝을 찾을 시기가 왔을 때지. 범고래들이 제 큰 몸집을 뒤틀며 호시탐탐 암컷들을 쳐다보고 있을 때, 의문이 들었다고 했네. 자신은 그 어떤 범고래 암컷도 예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에게 그들은 그저 덩치 큰 고래일 뿐이라고 말했지. 그리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하더군. 자신은 범고래와는 사랑에 대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같은 고기를 먹는 포유류 동료이지만, 자신은 결국 그들과는 다른 생물이라고. 그때부터 물개는 한동안 사냥을 하지 않았네.


궁상맞은 그를 보며 몇 번 다그치곤 했어. 흔들리지 말라고. 이렇게 방황하는 시간에도 별은 저만큼 멀어져 간다. 중요한 시기에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 초반에는 내 말에 아가도 마음을 잡고 다시 사냥에 나서곤 했네. 그러면 나도 안심하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곤 했지. 그런데 그는 이따금 씩 사냥을 멈추는 것이야. 다 잡아놓은 고기를 몇 번 놓치게 되었지. 그를 또 다그쳤어. 넌 지금 그 생명을 살리는 대신, 배고픈 우리 동료들의 생명을 죽인 것이라고. 다른 동료는 그를 잡아먹겠다 으름장을 놓았지. 그는 늘 말을 묵묵히 듣다가 잘못했다고 말했지. 마지막으로 그에게 훈계했던 날. 아가는 네 라는 대답 대신 감히 질문을 했어.


혹시, 세상에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붉은 실타래가 너무 길게 엉켜있어 자신의 반쪽을 아직 만나지 못한 건지. 자신이 뜯어먹었던 수많은 물개 중에 그 인연이 있었던 것이 아닌지. 만약 인연이라는 것이 일생에 단 한번 오는 기회라면, 그 연인을 속여 죽이고 시체를 뜯어먹었다면, 자신은 이제 영원히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것인지. 왜냐면 자신은 본능적으로 오직 자신과 같은 눈을 하고 같은 지느러미를 가진 물개들 만이 아름다웠다고. 그들이 아가의 꾐에 넘어가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동안 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외로워졌다고.


동시에 설레었다고.


자신이 물개를 죽이는 이유는 그들과 꿈속에서 함께하고 싶어서. 그들의 육체를 뱃속에 채운 채, 아름다운 그들을 그리워하다 눈을 감는다. 그러면 그들과 해저를 유영하고 서로에 대해 말하는 꿈을 꾼다고. 하지만 눈을 뜨면, 사지가 조각난 고기 조각이 주위에 널브러져 있다고. 그럴 때면 그들의 퀭한 눈동자가 말을 건다고 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지마 라고. 자신은 죽임을 쥐고 있을 뿐이라 했다. 죽임으로 배를 채우고 죽인 것을 사랑하며 죽은 것과 함께 꿈꾸는 삶.


그래서 내가 말했지.


너는 죽임을 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쥐고 있다고. 오래전 사냥감이던 널 죽음으로부터 구해준 것이 죽임이라고. 넌 그때 이미 선택한 거야. 너의 생명을 남에게 주기보다는, 남의 생명을 쥐고 있기로. 그것은 잔인한 것이 아니야. 영예롭고 초월적인 것이란다. 너는 선별적으로 생명을 구하고 취할 수 있는 생물이 된 거야. 별이 되는 거라고. 너는 아직 알 수 없겠지만, 세상엔 별이 된 다음부터 깨닫는 세상이 있지. 네가 책임진 수많은 생명, 네가 결단하는 수위의 막중함을 알게 되면 소소한 사랑, 우정 따위는 옳은 선택의 장애물로 여겨질 뿐이라고. 이 해양에서 너의 존재감, 그리고 존재 이유가 증명될 거야. 모든 생물이 너의 이름을 알고, 너의 선택에 불가항력으로 휩쓸려버리지. 누구든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하는 신이 되는 거야.


이제껏 그 고난을 버텨왔는데, 지금 와서 이렇게 소년처럼 덜 여문 감정 때문에 흔들리는 것은 꼭 후회할 일이란다. 넌 이 세상 어느 물개보다 축복받은 거야. 출신성분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피라미드 최상층에서 살고 있잖니. 어떤 생물도 너를 기만하거나 멸시할 수 없단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잡아먹히지 않지. 영원의 삶이 보장된 거야. 내가, 널 구원한 거지. 너는 지금 진정한 범이 되는 중이라고. 한 번의 으르렁거림으로 바닷속 군중이 숨을 집어먹는. 그것도 범 중의 별이 눈앞에 있는 시점에. 더 이상 이런 질문을 하지 말도록 해라. 넌 충분히 잘 살고 있단다.


그때 그 녀석이 말했네. 자신은 범의 별이 될 수 없는 것을 깨달았다고. 자신이 꾀어낸 물개들 중에 자신의 반쪽이 있었다고. 정작 그녀를 죽이고 그녀의 살을 뜯어먹을 때는 몰랐었지만, 그녀를 꿈에서 만나고 알게 되었다고. 그녀는 꿈에서 자신을 안아주었고, 쓰다듬어주었으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고. 꿈을 꾸는 밤이 되면 그녀의 품에 안겨 영원 같은 안도감에 시간을 보낸다고. 아침이 오면, 사라진 그녀를 그리워한다고. 그녀를 죽였다는 죄책감. 그녀의 살로 배를 채운 자신의 육체에 대한 증오심이 서려, 이젠 낮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버틸 수 없다고. 그러니 이제 범의 별은 자신에게는 ‘벌'로 돌아왔다고. 평생, 죽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생각했었다고?”


“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그녀는 살아 있어요. 죽었지만, 이젠 날 숨 쉬게 하는 물방울로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더 이상 이곳에 있지마 라고 했습니다.”


말문이 막혔다. 아가는 이제 환청이 들리는 모양이야. 초롱초롱했던 눈망울은 붉게 물들었네. 병이 생긴 건 아닐까. 내가 모르는 사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문드러졌을지 모르지. 아가는 지금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네. 부들부들 떨며 눈을 쳐다보는 듯 피하는 듯. 실망스러웠네. 지난 세월 동안 널 키우며 이런 모습을 원했던 게 아니었는데.


“내가 보기에 아가야. 그래, 우리 고등생물의 뇌는 상상력이 지나칠 때가 있지. 다들 그런 시기가 있단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열병처럼 곧 지나치는 감정이란다. 자연스러운 거야. 한숨 쉬듯 흘려보내면 정신이 굳건해질 거야. 넌 내 후계자이자, 이빨로 키운 자식이란다. 분신인 거야. 네가 병들면 나도 온전하지 못하단다. 그러지 말거라.”


그는 돌아섰네.


나는 그가 나의 말뜻을 그리고 그를 위한 인내심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치기 어린 마음을 식히려 주변을 빙 돌아보고 다시 집으로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지 않았네. 이틀이 지나고 영원히 그가 오지 않을 것이란 걸 깨달았을 때. 그때 받은 충격이란.


근 몇 년 간. 그가 어엿한 성인이 될 때까지. 미약하게 빛나던 재능을, 이토록 정성스레 키워놓았건만. 물개 주제에. 감히 먹히는 존재가, 별의 일원으로 굳혀가기까지 얼마나 그에게 사랑을 쏟았는가. 매번 훈육할 때는 또 얼마나 마음속으로 다짐했었나. 누구보다 빛나는 별로 만들어 놓겠다. 절대 나처럼 협곡에 들어가게 두진 않겠다. 언제나 늠름하고 단호한 별로 살게 하겠다. 쓸데없는 감정 따위는 삭혀 녹여버림으로, 초월적인 존재로 살게 하겠다. 나처럼 버러지 같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회복할 수 없는 실패를 겪게 하지 않겠다고. 그런 나를, 그는 버린 셈이지.


분노가 치밀었네. 그가 말했던 물방울에 질투가 스며들 정도였지. 그까짓 병이 날 버릴 만큼 중요한 것인가. 다신 그에게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그년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아니 그를 찢어버리겠다. 그가 죽으면 나는 다시 망령을 보게 될지 모르지만 이젠 상관없네. 내게 행복을 주었던 그가 고통을 준다는 건 더는 아가가 아니란 말이다. 그는 이제 협곡 속의 물개 망령과 다름없었지. 어쩌면 아가는 그 망령들의 현신일지 몰라. 그렇다면 이제 먹이일 뿐이네. 물개들을 먹어서 고통스럽다면, 내가 널 먹어서 끝내주겠다.




아가의 냄새를 쫓아 간 곳에는 유난히 해파리들이 많았네. 점처럼 박힌 해파리 불빛은 그의 주위를 비추고 있어. 별자리처럼. 아가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네. 그 옆에 물개 한 마리가 더 누워 있었어. 둘을 한 번에 죽일 심산으로 몰래 더욱 접근했네. 특히 그 이름 모를 물개는 더욱 잔인하게 죽이리라.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살아있는 것이 아니야. 조각난 시체를 엉겨 붙인 그것은 마네킹 같았어. 찢어진 시체 조각은 각기 다른 물개의 것이야! 그동안 먹지 않고 하나 씩 빼돌린 모양이야. 기가 막혔지. 그는 구제불능이다. 징그러운 자식.


그에게 돌진했네. 그는 소스라치며 몸을 내빼더군. 내가 노쇠했다 해도 물개 한 마리 정도는 휘어잡을 수 있네. 공포가 스며든 그의 페로몬이 내 감각기관에 풍부하게 들어찼어. 별이 될 아이라 생각했지만 그도 내 추격에 어찌할 바 없이 도망치는 한낱 물개일 뿐이야. 못난 자식아. 이제 널 죽이는 것으로 놓아주겠다. 너와 같은 종으로 만났다면 형제가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요동치는 꼬리가 눈시울에 흐릿해져 갔어. 눈을 깜빡이고 꼬리를 더욱 튕기며 덮쳐갈 때.


갑자기, 해저 바닥에서 수많은 물방울들이 솟아올랐지.


이곳 열수구를 미처 보지 못했나. 고열의 물방울이 내 몸에 부딪히며 유황가스를 퍼뜨렸어. 죽음 같은 독한 냄새. 열풍 아지랑이에 시야가 막혀버렸네. 정신을 차리고 위를 보았을 때. 내 몸 위로 쏟아지는 거대한 암초 조각들. 온몸으로 암초에 부딪힌 건가. 뿌연 흙먼지. 코와 얼굴에선 연신 피가 퍼져. 영혼이 빠져나가듯. 몸이 익은 채, 돌 더미에 짓눌려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어. 곧 피 냄새에 상어 떼들이 몰려올 것 같아. 그리고 온갖 작은 생물들이 날 뜯어먹겠지. 마침 이곳은 그 예전의 협곡이 아닌가. 그때와 다른 점은, 그들을 먹어 치울 수 없다는 것. 내 몸을 회수할 수 없다는 말이네.




시간이 흘러 먼지가 온전히 가라앉았을 때.


온갖 생물로 뒤덮인 내 몸 앞에 물개 한 마리가 보였네. 그는 내게 말했어. 들리진 않았네. 잃어가는 정신을 꼭 붙잡았지. 그에게 항상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거든. 그러나 말 역시 나오지 않아. 그래 지금 말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곧 바다 눈이 되니까. 그리고 먼지 조각, 물방울이 되겠지. 그래. 나 역시 물방울이 되어서 그때 그에게 말할 것이다.


“넌 날 참 닮았어. 처음 보았을 때 알 수 있었지. 넌 나와 같은 길을 갈 운명인 걸.”




seal head.jpg 아침이 오면, 사라진 그녀를 그리워한다고.


keyword
이전 17화미지의세계 17 마스터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