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23 납치범의 고백

회색 손바닥의 원형. 태초의 악마일 거야.

by 류인환

유리가 어렸을 때, 납치를 당한 적 있어.


당시 부모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누군가 그를 꾀어낸 거지. 갓 국민학생이 되었을 때. 계절은 초가을. 푹푹 찌는 더운 날이 그제야 서늘해지는 때. 물론 그때는 내가 유리 속에 없었어. 그의 기억으로 유추할 뿐이지. 유리는 홀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어. 저녁. 유달리 햇살이 번뜩였다고. 길거리에는 취한 행인들이 많았다 하더군. 동네가 번화가였거든. 비틀거리는 사람도 몇 있었어. 그때 그들 중 누가 그에게 부딪힌 거지. 유리는 넘어졌어. 마침 반팔을 입은 그의 여린 팔꿈치가 아스팔트에 긁혀 피가 날 정도로. 멀뚱히 자신을 노려보는 꼬마를 보자 취한 행인은 화를 냈지. 어디서 그런 눈깔로 쳐다보냐고. 손찌검하려는 순간, 영웅이 취객의 손목을 낚아챘어. 꼬마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그는 덩치가 큰 편에다 험상궂었기에 취객은 꼬리를 내렸지.


그는 유리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웃으며 말했어. “집에 바래다줄게.” 유리는 낯익은 그 남자가 믿음직스러웠어. 남자는 유리를 자동차 뒷좌석에 태우곤 차를 몰았지. 유리 주소를 아는지, 길을 물어보지도 않은 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느낀 거지. 차 안을 유심히 살펴보았어. 뒷좌석에 놓인 남자의 재킷 손 주머니에는 약봉지가 하나 있었어.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수면제 30정 동봉 이라는 글귀가 있었지. 마침 라디오에선 수면제를 먹이는 납치범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난 꼬마가 의심쩍었지. “왜 그러니 얘야?” 꼬마는 대답하지 않았어. 다시 운전에 집중했지. 꼬마는 매우 부산했어. 백미러를 통해 그를 보았을 때, 술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 위스키. 꼬마를 납치한 뒤에, 마시려 고이 모셔둔 것을. 짜증이 났지. 술을 뺐었어. 병을 땄더군. 일단 한잔 마셨지. 그리고 생각했어. 어떻게 부모에게 돈을 뜯어낼까. 저 귀여운 꼬마를 어떻게 죽여볼까 하고.




햇살이 따뜻한 가을날이라, 몽롱하더라. 눈이 감겼지. 백미러로 꼬마가 보이더군, 꼬마에게 말했지. “내가 너에게 억한 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저, 누군가가 시키는 걸 따를 뿐. 내 옆에 보이지? 회색 손바닥으로 내 머리를 짓누르는 저것. 매번 꿈마다 나타난단다. 꼬마야 인사해. 나도 너처럼 순수할 때가 있었는데. 언젠가 저것을 만나고 나서부터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지.


졸다가 다른 차를 들이받았어. 심한 사고였어. 차가 뒤집힐 정도였으니까. 꼬마가 술에 수면제를 탄거야. 사거리 대형사고. 유리는 찌그러진 좁은 창문 틈을 겨우 빠져나와 집 앞에 도착했대. 다행히 집이 꽤 가까웠거든. 유리는 문고리에 피 묻은 손을 걸고는 읊조렸어.


“살려주세요.”


문고리를 물고 있는 해태 동상만 유리를 무심히 쳐다볼 뿐. 한참 뒤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그를 와락 안았지. 살아난 거야. 그 흉악범으로부터. 흉악범이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모습을 마주하던 그 긴 시간으로부터. 흉악범은 유리에게 죽기 직전 말했어. “미안하다 얘야. 차라리 널 죽였어야 했는데.”




그날 병원에서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었어. 부모가 잠든 유리 머리맡 위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더군. 유리가 있던 그 사고 차량 운전석에 새로 이사 온 옆집 남자가 있었다고. 그는 죽었다고 했지. 차내에서 깨진 술병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음주운전을 한 것 같다고. 그때, 깨달았지. 난 죽었다는 걸. 내가 납치하려던 꼬마는 유리였단 걸.

사고 후 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내 눈동자와, 기절 직전 소년의 눈동자가 닿았을 때. 그리고 끓기 직전 물의 진동처럼 요동칠 때. 우리는 꿈을 공유했다는 걸. 그리고 난 유리 의식 깊은 곳으로 흘러가 다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걸.


미안한 건. 내게 기생했던, 날 흉악범으로 만든 회색 손바닥까지 유리에게 옮겨갔다는 거야. 그때부터 이따금 씩 유리 꿈에, 두터운 회색 손가락이 나타나 조그만 유리 입을 틀어막았지. 손가락은 꼬마에게 말하곤 했어. “나는 당신입니다.” 한동안 유리는 그 손가락만 보면 비명을 질러댔어. 부모는 그를 데리고 여러 병원을 다녀봤지. 뇌 검사. 정신 상담을 받아보고 최면 치료도, 세례도, 하다못해 굿까지 받아보았지만 소용없었어. 오직 유리 스스로 손아귀와 대적해야 했지. 그렇게 감내하다 보니, 이제는 면역이 생긴 거야. 자각몽을 꿀 수 있게 되었어. 꿈속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았지. 언제 그 손바닥이 그를 덮칠지 모르니까. 그러다 손바닥을 보게 되는 순간, 도망치는 거야. 그가 닿지 못하는 저 하늘 위로, 혹은 다른 꿈의 세상으로. 나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어.


유리 속 수많은 존재 중 하나인 나는 여전히 회색 손바닥이 무섭거든. 유리도 날 기억하지 못해. 이곳 사거리 속 반쯤 지워진 나와 유리의 만남을 보았잖아. 난 잊힌 채 그를 지켜볼 뿐이야. 회색 손바닥은 유리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켰어.


내게 빙의 했듯이. 그리고 나 이전의 먹이에게 했듯이. 먹잇감의 먹이. 배 속의 배를 끝없이 갈라 내다보면 몇 백, 몇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회색 손바닥의 원형. 그를 누군가 그렇게 했듯이. 태초의 악마일 거야.






백색 절벽에서 내려다 본 풍경.



절벽 위로 가야 한다고?


그곳에서 그 여자를 찾을 수 있단 말이지. 그럼 가야지.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물어볼 게 있거든.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단지 확인을 하고 싶은 거야. 실제 하는지. 아니야. 그 여자는 존재해. 사거리의 횡단보도에서 보았다니까. 헛것을 봤을 리 없잖아. 내가 그 여자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은. 지난 꿈들. 그걸 물어보고 싶어. 나도 알아. 말이 안 되는 것. 하지만 그 여자가 꿈에 계속 나타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아. 그저 그런 내 상상이 아니란 말이야.


너도 알잖아. 이번 꿈들은 정말 이상했던 것. 그 사무실 여직원 알지. 꿈에 목에 상처를 입었어. 그리고 다음날 똑같은 상처를 입고 출근했다고. 나한테 꿈 얘기를 하려다 말았어. 분명 그녀도 어떤 걸 본거야. 같은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지. 어쩌면 나와 횡단보도의 여자를 본 것일지도 몰라. 그래, 나도 물어보고 싶었어.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물어본다고 해도 제대로 얘기해 주겠어?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 다른 꿈도 그래. 팀장님 사고. 돌더미에 차가 깔렸잖아. 내 꿈속에서도 누가 그랬어. 그것도 같은 날.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팀장님도 내게 말을 전해달라고 했잖아. 흙더미를 주었다면서. 뭔가 아는 눈치였어. 그 사람들과 난 같은 꿈을 꾼 거야.


무섭기도 해. 내 꿈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고 하면. 그 여자 얘기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들이 엿본 거지. 내 꿈속에 들어온 거야. 깊숙한 곳까지 침입해버리고, 내 생각을 휘저었다고. 아니면 그 꿈들은 내 꿈이 아니라 그들의 것일 수도 있겠지. 지금은 알 수가 없어. 붙잡고 물어보지 않는 한. 어쩌면 영원히 알 수가 없겠지. 나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그들이라고 알까. 그들은, 이 소중한 꿈들을 그저 한낱 백일몽으로 생각했을지 몰라. 꿈은 쉽게 사라지니까.


맞아. 너 말대로 꿈에 의미를 두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야. 나는 그동안 꿈을 유희라 생각했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는. 끔찍한 악몽이라고 해도, 깨면 그만이지. 누구랑 싸움을 하든, 범죄를 저지르던, 사랑에 빠지던, 아니면 죽였다고 해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잖아. 리셋되는 거야. 마치 타임머신처럼. 그래서 꿈을 좋아해. 내가 이루어낸 것들. 굳혀온 환경을 파괴하지 않아도, 쌓아온 나 자신을 변형시키지 않아도 돼. 그리고 그 꿈의 시간 동안 저지른 짓들을 책임질 필요도 없는 거지. 모든 경계선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야. 우리는 그 시간만큼 온전한 자신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 어쩌면. 그 일생의 삼분의 일, 그 시간이 진정으로 우리의 삶일지 몰라. 나머지 시간은 잠의 세상을 채울 소재를 찾으려 분주히 돌아다니는 준비기간 일지 모르지.


아, 그 여자. 보여.


지금 저 백색 바닥 아래에서 뛰어다니잖아. 절벽 꼭대기까지 오길 잘했어. 어딘가 가고 있나 봐. 그녀가 가는 쪽으로 검은 구체가 보여. 아마 내가 나왔던 공간일 거야. 그곳으로 가자. 어서 물어봐야지. 머리에 썼던 붉은 털모자도 없어. 어디서 넘어졌는지, 흙더미를 뒤집어쓴 채로. 가까이 가면 얼굴도 볼 수 있겠지.


안된다니. 도와준다며. 그 여자가 가는 곳이 왜. 내 공간이 아니라고. 무슨 말이야. 내가 저곳에서 나왔다고. 아니라고? 다른 나? 내가 하나가 아니라니. 그럼 저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다는 거야 뭐야. 다른 사람이 아니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혼자서라도 내려갈 거야.


너를 버리면 안 된다고?


영원한 친구라니. 난 널 오늘 처음 본거야. 그런 기억은 없어. 널 상자에서 꺼내는 게 아니었나 보다. 길을 막지 마.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여자는 달려가고 있다고. 놓쳐버릴지도 몰라. 날 죽이겠다고? 이곳은 내 세상이야. 날 해칠 순 없어.




"이곳은 당신의 세상이 아닙니다." 검은쥐가 말했어.


“유리들의 세계이죠. 그리고 난 당신의 오랜 손님이자 친구입니다. 사실 이제는 유리 그 자체예요. 그리고 당신은 유리 중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이곳은 제가 지휘하는 곳입니다. 나는 너로서. 당신을 사랑하지만, 이상행동을 하는 당신을 막을 수 없다면 죽이겠습니다. 당신 하나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해도, 당신 그 자체는 달라질 게 없어요. 눈을 뜨면, 유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죠. 아침을 먹고, 버스를 타고 회사로 출근하고 일하고, 다시 퇴근하고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시게 될 겁니다. 이 꿈속 수많은 당신 중, 유일하게 그 여자에게 집착하는 당신이 내게 죽음으로서 달라지는 점은. 내일 아침부터는 유리가 그 여자에게 집착하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어서 당신을 죽이고 그 여자도 죽이러 가야겠어요. 그 여자가 이 넓은 곳에서 또 다른 당신들을 찾아가 전염시키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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