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24 몸 속 전쟁

이곳엔 박쥐와 그들만 살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by 류인환

쥐가 주둥이를 벌렸을 때.


덫처럼 갈기갈기 돋아난 이빨은 설치류 답지 않았어. 태엽 감기듯 끼릭 소리를 내는 거대한 구강을 보며, 유리는 언뜻 범고래 이빨을 떠올렸어. 그가 떠올린 잔상들이 내 눈 앞에 스쳐 지나갔기에 알 수 있어. 송곳니에 물리면, 덫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고 유리는 생각해. 이빨을 구성하는 세포 하나하나가 유리를 향해 집결했으며, 잇몸 안으로 파고들어간 뼈 연장선 상의 두개골은 그를 장악하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긴 검은 쥐 뇌를 두텁게 보호하고 있었으니까. 집념에, 나도 감히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아. 오래전 어린 유리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검은 쥐가 두려워.


별안간 유리는 백색 절벽 아래로 달려갔어.


이대로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 없이 깊은 바닥에 몸이 충돌하는 장면, 충격으로 꿈에서 깨려는 생각을 엿보았어. 그가 절벽 끝으로 달려갈 때까지도 쥐는 주둥이를 벌리고만 있을 뿐이기에 승산이 있어. 불안한 건, 쥐가 태연히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달아나는 그를 응시하고만 있다는 것. 다른 대안이 있는 것처럼. 쥐는 주둥이를 더욱 벌렸어. 얼마나 큰지, 직각을 넘어 위아래로 뒤집힐 것처럼 늘어졌어. 뒤집으면 다른 옷이 되는 양면 재킷처럼, 내면에 또 다른 형상을 숨겨놓았을 것 같았지.


유리는 절벽 바깥 공중으로 도약했어. 그의 왼쪽 발꿈치는 절벽 지면의 끝을 밟았어. 몸을 공중으로 힘껏 끌어올렸을 때, 뒤통수에서 끼익 하는 짧은 비명이 들려! 검은 쥐. 완전히 까뒤집은 주둥이에는 목구멍이 훤히 드러났고, 그 동굴 안에서 두터운 회색 손가락이 튀어나왔어. 손가락 사이에는 물갈퀴 같은 표피가 달려 있어. 순식간에 두 팔은 쥐 주둥이의 끝을 부여잡았고 그 사이 잉태하듯 머리가 나왔어. 박쥐! 태반을 뒤집어쓴 악마는 쥐 껍데기를 밀쳐내고 온몸을 드러냈어. 몸을 가누기가 익숙지 않은지, 거대한 몸통을 지면에 붙인 채 도마뱀처럼 네 발로 얼기설기 짚어 나가. 돌부리에 걸려 부딪히고 날개가 바닥에 긁히면서도 빠르게 그를 쫓아갔어. 그것은 미처 마르지 않은 체액, 그리고 긁힌 상처에서 흐르는 핏물까지 번져 마치 유리를 쫓는 검붉은 덩어리 같아.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안도했어.


지금 나는 잔잔히 쌓인 바람의 층을 뚫고 추락하고 있어. 곧 아픈 충격으로 깨어나겠지. 감당할 수 없는 꿈에서. 검은 쥐도, 백색 토끼도, 더는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둘 수 없다는데 안심이 되니 여러 생각이 들었어. 나는 왜 꿈에서조차 도망쳐야 할까. 이곳은 내 안식처야. 현실에서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을 안고 이곳으로 돌아오면,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고 손에 쥔 문제 다발을 부드럽게 잡아채고 안아주어야 해. 그래야 해. 누군가는 날 이해해야지.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떤 일을 저질렀든 간에 웃어주어야 해. 적어도 이곳에서는. 따뜻한 색감의 조명. 바닥에선 피아노 선율이 흘러야 하고. 날씨는 선선해야 하고. 기온은 따뜻해야 하고. 누구든 날 해치려 해서는 안돼. 이곳은 내 곳. 누구든. 내 잠을 방해해서는 안돼. 검은 쥐. 백색 해태. 그 여자. 이젠 모르겠어. 모두 방해꾼일 뿐이야.


응징할거야. 날 어지럽힌 그들에게. 매번 꿈에서 도망칠 순 없지. 그래 지금 깨면 안돼. 해결하지 않으면, 그들은 날 또 못 살게 굴게 분명해. 모두 내 편인 듯 말하지만, 결국 날 지배하려는 거야. 자신들이 옳다는 방향으로 날 변화시키려는 거지. 더는 휘말리기 싫어. 죄책감에서도, 무기력함에서도, 충동에서도. 그들은 날 제거하려 해. 그들은 더 이상 생각 따위가 아니야. 분신이 돼버린 거야.






그는 절벽 아래로 떨어질 생각이었지.


알고 있었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거든. 잠에서 깨면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봐. 내버려두면 되었지. 어찌 되었든 변종인 그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었으니. 굳이 내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잖아. 본인이 살려면, 날 죽이면 되었을 텐데. 이 공간, 내 손아귀에 묶인 수많은 소실점의 그들. 내가 죽으면 그들도 없어져. 날 벗어난 그만이 살아남게 되지. 그러면 유리는 그의 소유가 되는 거야. 그는 짐작조차 못하고 있지. 이곳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니까. 어찌되었든 나는 허겁지겁 내달렸지. 그리고 절벽 위로 날아갔어. 그가 죽는 모습을 봐야 했거든. 바퀴벌레를 잡으려면, 알 하나까지 박멸되는 모습을 확인해야지.


그런데 갑자기, 주위가 변했어! 그가 땅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지면이 그가 떨어지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내려앉았어. 돌덩이 하나 구르는 소리 없이, 백색 비단처럼 지면이 그를 받아냈지. 벌레 같은 게 미친 건지. 화를 내더군. 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눈앞에 방전되는 그의 분노가 보였지. 그저 모든 것을 없애려는 생각이야. 나 마저 없애버리겠대. 곧 절벽은 사라졌어. 모든 바닥이 평행을 맞춰버려 평야가 되었지. 도망치지 않겠다는 거야. 그는 내게 덤덤히 걸어왔어. 그때서야 난 알아챘지. 나와 그의 입장이 바뀌었단 걸. 그가 날 멀치감치 바라보자, 나는 뼈를 옥죄는 듯 통증과 함께 변해버렸지. 손바닥보다 작은 생쥐로. 그래도 아직 승산은 있어. 내겐 지원군이 있거든. 내가 잠식한 검은 소실점의 유리들. 잠시 후 사방에서 쥐떼처럼 그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지.






그가 마음을 바꿨을 때 세상이 바뀌었어요.


쥐가 줄어든 만큼, 반사적으로 나는 다시 커지기 시작했어요. 한동안 뒤흔들리는 지면, 육체의 통증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죠. 하지만 나는 어떻게는 그를 구해야 하는 입장이었어요. 이유는 몰라요. 나는 따를 수밖에 없어요. 태초부터 무기력한 존재이기에. 단지 해태의 몸으로 조그만 쥐를 잡아먹으면 되었어요. 곧 끝날 여정이었죠.


쥐는 나를 보고 기괴하게 웃었어요. 무슨 심산이 있는 모양이었어요. 근 십여 분을 쫓아갔을 때, 시야에 검은 파도가 보였어요. 그들이에요. 수백 명은 족히 넘어 보일 듯한 숫자예요. 그들은 그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표정은 달랐죠. 그들은 나를 죽일 듯 달려왔어요. 나는 도망쳐야 했어요. 아니 그에게 알려야 했어요. 도망치라고.


그의 복제품들에게 등을 돌리고 한 참 도망칠 때, 보였어요. 백색의 파도를. 우리들. 토끼들이에요. 토끼들은 백색 테이블에 쏟은 설탕처럼 빛의 윤곽으로 제 존재를 드러낼 뿐이었죠. 내 앞에는 검은 그들이 군단처럼 줄을 지어 달려오고 있어요. 곧 굉음과 함께 흑백의 무리가 반죽 빚듯이 회색덩어리가 되었죠. 아무리 그들의 수가 많아도, 맹목적으로 달려드는 거대한 토끼들을 이길 수 없었죠. 토끼들은 그들을 물어뜯었어요. 그리고 잡아먹었죠. 세균을 먹는 백혈구처럼.


유리도 그들에게 달려들었어요. 그를 구하기 위해 나도 달려들었어요. 한참을 물어뜯었을까. 정신을 차렸을 땐, 검은 그들은 모두 사라졌어요. 박쥐. 회색 손가락이 죽었어요. 그가 죽이지 않았어요. 난리통에 검은 옷을 입은 그들의 발에 짓밟혀 죽었죠. 그렇게 전쟁은 쉽게 끝났어요. 이곳에는 나와 그가 있어요. 지금도 내 눈앞에 떠오르는 그의 생각. 쥐가 죽었으니 이 참에 나 역시 죽일 마음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무기력하게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사실 그는 날 죽이면 안돼요. 이곳엔 박쥐와 그들만 살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keyword
이전 23화미지의세계 23 납치범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