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내가 입을 미처 열기도 전에 그 여자가 말했어.
“나 그쪽 알아요. 사거리의 남자.” 그리고 내게 이런 말을 더했어.
“왜 그렇게 질질대고 있었어요? 불쌍해 보였어요.”
장난기 가득한 입술.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지. 짧은 질문은 많은 걸 물어보았기에. 그날. 사거리. 무엇 때문에 내가 얼굴을 쥐어 짰는지. 무엇 때문에 셔츠에 때가 묻도록 매연을 쐬고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차도에 갇혀 있었는지. 그럼에도 벗어날 생각은 못했는지. 왜. 사고를 냈는지. 정말 부러진 신호등을 보지 못했는지. 알고서도 뛰어간 것은 아닌지. 신호등이 어떤 말을 건넸는지. 지나치는 차들로 뛰어들 때 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또한 질문은 동시에 내게 대답하는 듯 했어.
혼자 벗어나지 못하고, 사거리에 서있었으니까. 사연 있는 사람처럼. 아니면 등신처럼. 애처로운 당신의 모습을 본 목격자로서 호기심이 들었을 뿐 그 이상은 없어. 지금도 이렇게 태연히 묻고 있잖아. 왜 울고 있었냐고. 궁금해서 그래. 그것뿐. 당신과 나 사이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달라질 이유가 없어. 그러니 지금 흙탕물 묻은 더러운 손으로 내 손목을 잡을 이유도 없다고. 당신은 그저 꿈속에서나 나를 찾아.
그래. 여자는 내게 질문 대신, 대답을 했나 봐. 그래서 대답을 할 수 없었어. 더는 어떤 말도 잇지 않은 채,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의 손목을 놓아야 했지. 그런데, 놓아버린다면, 그래서 또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매일 밤 꿈에 그녀는 나를 찾아올 텐데. 풀꽃 같은 향기를 풍기며 날 따뜻하게 안아주겠지. 그리고 사라지겠지.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견처럼 나는 다시 그녀를 기다려야 하잖아. 나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더욱 들어갔어. 여자의 미간이 살짝 찌그러졌지.
“우리 어디 가서 커피 마실까요?” 문득, 여자가 말했어.
“네?” “커피 마시자구요. 바빠요?” “아니요. 바쁘지 않아요.”
“그럼 우리 얘기 좀 해요. 이 손 놓으시고. 아파요.”
흠뻑. 젖은 건 나 뿐이었어. 몇 안 되는 카페 안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지. 무슨 궁상이냐는 듯. 지금은 11시 반. 아직은 한산했어. 그녀는 이곳에 자주 온다고 했지. 나도 자주 오는 곳이야. 그동안 서로를 본 적이 없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생각해보니, 그녀를 알게 된 지 며칠 되지 않았잖아. 우산을 접는 그녀 뒷모습을 보았어. 비 오는 날. 물기 맺힌 갈색 머릿결. 날 덮었던 거대한 여신의 머릿결이 떠올랐지. 고개 숙인 여자의 긴 속눈썹. 갈색 눈동자. 오뚝한 콧방울. 붉은 입술. 그녀의 얼굴에서, 꿈의 조각들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어. 어지러울 정도로. 일단. 정신을 차려야 해. 나는 그녀에게 말했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될까요.”
화장실. 얼룩진 손과 얼굴을 씻으며 생각했어. 다녀와도 될까요. 꼬마가 선생님에게 물어볼 만한 질문이라고. 흐르는 물은 내 손이 닿자 검붉게 변했어. 자세히 보았지. 백색 세면대에 흐르는. 붉은 피와 검은색 흙탕물의 소용돌이. 문득 생각이 들었어. 어제 꿈. 기이한 동물들의 전쟁에선 결국 누가 살아남았을까.
“잘 씻었어요?” 그녀는 어느새 화장실 앞까지 다가와 내게 물었어. 좀 놀랬지. 그녀는 놀리는 듯, 눈과 미간 사이에 주름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어. 기분이 좋아졌어. 그녀가 다시 말했지.
"꿈 얘기할까요."
꿈에서. 당신을 보았어요.
저는 그 곳에서 신들의 세상을 이끄는, 그들의 여신이었죠. 당신은 인간일 뿐이고. 하지만 내게 특별했어요. 당신은 매일 밤 내 신전에 찾아와 은화 한 닢을 두었어요. 그리고 내 석상을 빤히 쳐다보다 돌아가곤 했어요. 은화가 없을 땐 구리 동전을, 그것마저 없을 땐 나무 조각을 들고 오곤 했어요. 내 얼굴을 조각한 투박한 목조.
그렇게 꿈 속에서 삼 년의 시간이 흘렀어요.
물론 꿈 얘기이지만, 난 당신이 좋아졌어요.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거든요. 재물을 달라거나, 몸을 낫게 해달라는,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 따위는 입에 담지도 않았어요. 그저 날 소원했던 거예요. 당신이 내게 준 그 조각품은 내가 받은 유일한 선물이었어요. 당신이 오는 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고, 행여 오지 않을 때는 걱정이 되었어요. 결국 난 참지 못하고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냈어요. 뒷걸음치다 주저앉은 놀란 표정. 귀여웠어요. 당신은 그 작은 손으로 내 발끝을 감싸 안았죠. 그때부터 우린 인간과 신들의 눈을 피해 매일 새벽 신전 뒷담에서 만났어요.
언젠가 당신과 내가 초원에 드러누웠을 때, 당신은 내 귀 옆으로 다가와, 날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말했어요. 그 말에 내가 웃었을 때, 동굴처럼 커다란 입에서 흐르는 바람결에 당신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 당신이 내 머리카락 안에 파고들어 날 쳐다볼 때, 난 당신에게 매료될 수밖에 없었어요. 신이란 건 외롭거든요.
근데, 아나요. 날 웃게 만들어버리고, 당신은 날 버렸어요.
우리가 함께한 날이 길어질수록, 변해갔어요.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당신은 말이 줄어들었죠. 한동안 신전에 오지 않기도 했죠. 그럴 때면, 내가 당신을 기다리게 되었어요. 화가 나기도 했죠. 오랜만에 찾아온 당신에게 다그쳤을 때, 당신은 내게 말했어요. 종이 다른 우리는 서로 맞지 않다고. 서로를 시리게 생각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했어요. 당신은 나와 함께 할 때면,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고. 사람들이 바친 황금들이 쌓인 제단 구석에, 놓인 초라한 나무 조각처럼. 나와 나눌 이야기마저 떨어져만 간다고 했죠. 우리는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니까.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거나, 응시하는 것 외에는 없다고 말했죠.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엔 침묵이 일었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힘을 잃어갔죠. 신이기에. 언젠가. 탁해진 내 눈동자에 비친. 당신의 표정 없는 얼굴을 보았을 때. 당신 눈동자에 비친 야윈 내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몰골은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꼴이었죠. 그래서 알았지. 이제 너와 나의 애정은, 서로를 갉아먹을 뿐이라고. 나는 다시 당신에게 물었어.
"여전히 나는 내게 아름다워. 그렇지 않니?"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어. 한번 더 물었어.
“그렇지 않니.”
그때, 우리를 알아챈 다른 신들이 덤벼들었고, 내가 신들을 막아내고 당신을 위해 죽어갈 때 알았어. 결국. 모든 것을 바친 건 당신이 아니었어. 보잘것없는 존재도 당신이 아니었어. 모두 나였던 거야. 당신 때문에. 나는 지위도, 날 따르던 신들도, 평온하던 감정도, 그리고 목숨까지. 꿈일 뿐이었겠지만, 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이 아파요. 당신의 그 무표정한 눈빛이 잊혀지질 않아요.
두 번째 꿈은 기억나겠죠.
당신과 나는 바다표범이었어요. 우린 어릴 적부터 오랜 친구였죠. 당신은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나는 태어나 갓 눈을 뜨고 시야가 보이는 순간 당신을 알아챘어요. 커다란 검은 눈망울이 꼭 당신이었죠. 신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다음 생. 우리는 동등한 입장으로 만난 거예요. 우리가 늘 말했던 바람이 이루어졌죠. 하지만 당신은 기억하지 못했어요. 난 이해했어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다시 시작하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함께 커가고, 걱정 없이 배부르게 얼음 위를 미끄러지며 노는 순간들 행복했어요. 그러면서도 가끔 생각이 들었어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은 날 친구로만 생각하는 게 아닐 까. 당신은 내게 말했어요. 꿈에서 자신은 인간이었다고. 그리고 위험한 순간에 어떤 여자를 보았다고 했어요. 그 여자가 잊히지 않는다고. 질투가 났죠.
당신은 거인들이 사는 꿈 이야기도 꺼냈죠.
거인으로부터 당신을 구하려 했던 거인이 있었다고 했죠. 그뿐. 내가 그 거인이었다고 말했을 때, 당신은 웃고 말았지. 그래요. 웃고 말았어. 모든 것이 날아가버린 느낌. 지금 나와 당신이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후, 당신이 범고래에게 먹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이나 슬펐지만, 과거를 청산하는 느낌도 들었어. 어쨌거나 한 마리 바다표범으로 지금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죽은 줄 알았던 당신이 돌아왔을 때는 혼란스러웠지. 반가움 이상으로 행복했지만, 동시에 두려웠어. 잊었던 과거가 다시 나를 힘들게 만들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당신의 손을 잡았어.
니가 날 배신할 줄은 몰랐어. 범고래들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는 나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당신. 마치 날 먹이로 생각하는 듯 했어. 이상하게도 내 생은 끝나지 않았어. 이 세계에 속박된거야. 혼령이 되어서 내 남은 시체를 먹는 당신을 보았어. 범고래 일원으로 혹독하게 살아가는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았지. 동정과 분노가 공존했어요.
그거 아나요. 당신에게 죽을 고비가 생길 때마다 고민했어요. 살려야 할까. 내버려 둘까. 살리면 당신은 계속 살겠지만, 난 계속 죽은 채 당신에게 묶여있을 테고.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둔다면, 나와 당신은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되겠죠. 그곳은 미지의 세계라서 우리 운명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잖아요. 평생 못 보고 살거나, 서로 존재를 모른 채 영영 이별하는 꼴이 될 수도 있겠죠. 그래서 늘 고민했어요. 너를 살려야 할까. 죽여야 할까.
어느 날. 당신은 범고래에게 말했어요. 내가 당신을 늘 살리고 있으며,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미 당신이 날 죽여버렸기에, 후회와 고통으로 살아간다고. 바닷속 물방울이 된 나를 끝없이 그리워하고 있다고. 난 증기처럼 끓어오르는 기분이었어요. 사랑하는 감정, 미워하는 감정. 내 존재. 지난 과거의 삶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 선택은 하나였어요. 당신을 죽이는 것. 도박이지만, 지금보다는 나았어요. 당신과 연결고리를 끊든, 새로운 인연으로 만나든, 당신이 죽음으로서 시작할 수 있었죠. 그래서 당신이 죽도록 내버려 두었어요.
다음 세계는 참 이상했죠.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당신은 날 강제로 소환했어요. 당신이 말했던 인간 여자의 형상으로. 어쩌면 그것이 시작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당신과 나는 이제 꿈과 현실, 어느 것이 둘 중 하나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신전의 여신이 되기 전, 전생이 그 여자 일지도 모르잖아요. 아니면 우리는 동시에 그 세계들을 사는 것인지도 모르죠. 당신은 나를 만지려 했지만, 나는 거부했어요. 화가 풀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당신은 내게 붉은 두건을 씌우고 목 조르려 했어요. 난 도망쳤죠. 당신은 날 쫓아오다 백색의 세계에 빠졌어요. 미처 그려지지 못한 곳. 그곳엔 많은 존재들이 살아 있었어요. 그들을 보며 의문이 들었어요. 그들은 누구이고, 나는 누구일까. 나라는 것이 당신 체내에 존재하는 귀신같은 혼령일까,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인격일까, 아니면 이곳은 미지의 세계일 뿐, 우린 당신에게 속박된 것이 아닌, 각각의 삶을 사는 존재가 맞을까. 무엇보다도
나는 나일까, 아니면 당신일까.
나는 나일 거예요. 내가 당신이라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당신과의 역사 말고도, 내가 가진 과거의 일들 그리고 내 존재라는 것이 있잖아요.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나를 사랑해요.
그녀가 말을 끝냈을 때, 꿈속 여신의 눈망울이 그녀 눈에 겹쳤어. 작아지고 초라해진 여신. 여자의 눈이 붉어졌고, 나 역시 불가항적으로 붉어졌지. 그녀와 나의 인연처럼. 벌써 저녁. 해는 졌어. 회사도 까맣게 잊고 있었지. 지금 내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 우린 하나의 삶이 아니잖아. 그녀는 내게 집까지 바래다 달라고 했어. 우리는 함께 걸어가며 우리만의 지난 삶 이야기를 나누었지.
아, 그녀 이름은 미지라고 했어.
나랑 같은 외자야. 유리와 미지. 아름다운 이름이라 생각해. 문이 열리고. 작별인사를 하고. 그녀가 집 안에 들어갈 때. 열린 문틈으로 그녀의 방을 보았어. 마치 내 집 같았지. 내 집에 있는 것과 같은 의자, 테이블, 유리잔. 같은 색의 이불, 배게, 조명. 소름 끼칠 정도로 같은 것들. 미지와 나는 하나의 공동체처럼, 삶을 초월한 운명을 타고난 거야. 그래서 생각했어.
그날, 횡단보도. 내가 자살하려 했을 때 말이야.
아저씨가 내게 스파크를 번뜩이며 이제 그만 지옥같은 삶을 그만두고, 회색 손가락으로부터 벗어나자 말했을 때. 그래서 백색 토끼들이 자동차들 사이로 내 몸을 던졌을 때. 우연히 많은 사람들이 뒤따르고, 사거리의 모든 자동차들이 멈춰서는 기적. 구급대원들과 경찰이 달려들고 차로가 봉쇄되는 기적. 그 사이, 나와 그녀 둘만이 차도에 갇혀 서로를 응시했던 기적. 그 모든 일들은, 나를 구원 하기 위해서 또 한 번 그녀가 해낸 것이라고.
그때. 별안간 문이 다시 열렸어.
미지는 달려와 날 껴안고는 한동안 말이 없었어. 나도 그녀를 힘껏 안았지. 그러자 미지는 내 뺨에 입을 맞췄어. 내 살갗이 달콤하다는 듯이 쩝쩝거리고는 내 귀에 속삭였지.
"당신은 날 참 닮았어요. 처음 보았을 때 알 수 있었지. 넌 나와 같은 길을 갈 운명일 걸."
미지는 내 손목을 붙잡고 날 데리고 갔어. 자신의 집으로. 그 바람에 아저씨가 쥐어준 칼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지. 상관 없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