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세계 25 선율

지금, 여기는 흑청색 아스팔트의 바다.

by 류인환

‘ ! ’


짓눌린 건반은 일정한 음파를 뱉어냈어. 울림을 맛보며 손가락은 제 몸을 더 짓이겨보았어. 숨이 다했는지 건반은 입을 닫았어. 그리고 정적. 손등은 돌연 건반 위로 날아올라. 맹금류가 정지비행하듯, 공중에 점이 된 손바닥은 공기를 움켜쥐듯 손톱 끝을 오므리고 내려다보았어. 기록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백색과 흑색의 건반을. 그리고 매섭게 하강해.


청명한 피아노 선율.


유리는 잠에서 깼어. 윤곽이 보이기 시작해. 백색 이불. 백색 천장, 백색 벽, 백색 창문 위 백색 하늘. 유리는 알람을 껐어. 유리의 짓누름에 건반 그리고 건반을 짓누르던 누군가는 숨을 멎었어. 열린 창문 사이 스민 가을 공기를 힘껏 들이마셨어.


수전의 목을 비틀자 터져 나오는 뜨거운 빗물. 유리는 눈을 감았어. 검은 배경, 날아오르는 박쥐 한 마리가 떠올라. 날개 사이로 일렁이는 먼지는 작은 유리 자신들로 변해. 그들은 너무 가벼워 공기 중에 흩날리고 있어. 유리는 어젯밤 꿈속에 그것들을 보았다고 생각했어. 계속 눈을 감은 채 떠올려 보았어. 몇 가지 윤곽이 보여. 달려드는 거대한 토끼들. 멀리서 뒤돌아보는 붉은 가면의 여자.


‘ ! ‘


다시 한번 피아노 선율이 흘렀어. 유리는 시계를 본 후 서둘러 몸을 닦고 집을 나섰어. 밝았던 세상은 금세 변했어. 유리는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지. 비는 유리 막대처럼 쏟아져서 지면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어. 우산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힘겹게 받아내며 부들부들 떨고 있지. 마치 여름처럼 이곳은 더웠어.


버스 정류장에는 유달리 사람이 많아. 오늘 할 일을 생각했어. 팀장이 사고를 당했지. 어제 일이지만 그에게는 마치 한 달 전 같아. 기억을 더듬어보았어. 어제 새벽 동료에게 전화를 받았고 팀장은 며칠 뒤에나 출근한다고 했어. 그리고 오늘은 모두 오후에 나오라고 했었지. 지금 회사에 도착하면 주변 자리엔 아무도 없을 듯해. 잠을 잘 못 잔 탓인지, 유리 머릿속에서는 쿵-쿵 하는 낮은 울림으로 두통이 일어. 마치 오래전 잊었던 업무의 기록을 찾아 머릿속 서랍장을 서둘러 뒤척이듯이.




끼-익


버스가 멈췄어. 그 순간, 유리는 버스를 거대한 생물의 잔해라고 생각했어. 생물은 심해 바닥에 수직으로 박혀 있었어. 눈 앞에 검은 물개 꼬리가 살랑거려. 누군가 뒤에서 헛기침을 할 때야, 유리는 정신을 차렸어. 얼른 생물에 올라타고는 좌석에 앉았어. 그는 멍한 표정으로 유리창에 머리를 기댔어. 빗물은 창에 맺혀 흐르고 있었고 그 모습은 그가 여전히 물 속에 있다는 느낌이 들게 했어. 정류장마다 버스는 멈추고 사람들이 내려. 그들은 이제 우산을 펼치고 하나 둘 씩 버스를 벗어나고 있었지. 그 중엔 나이 많은 여자도 내렸고, 젊은 남자도 내려.


그리고 그 여자도 내렸어.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여전히 빛났고 종아리는 변함없이 하얗고. 그가 기어코 꺼냈던 업무의 기억들은 서랍장으로 둘둘 말려들기 시작했어. 대신 다른 서랍이 꿈틀대고 있어. 버스기사는 페달을 밟았어. 그 반동에 여자는 금세 멀어지고 행인들 사이로 사라졌어.


유리는 끝이라고 생각했어. 더는 이상한 꿈들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이대로 그 여자가 사라져 주었으면 했어. 유리는 한숨 쉬듯 눈을 감았어. 감은 눈 안, 검은 세상의 중점에서 커튼이 열리고 하얀 그녀 손이 그 새어 나와! 양 손가락은 커튼의 가장자리를 집었어. 벌어진 틈 사이로 보랏빛 원피스가 보이기 시작해. 검은 광택의 하이힐이 장막을 넘어왔고 동시에 순백의 발목이 반짝여. 그리고 여자가 등장했어. 그녀는 검은 세상에 홀로 서 있어. 잠시 후 자동차들이 은하수 흐르듯 장막 뒤편에서 쏟아져 나오고 그녀 주위를 공전하듯 돌기 시작해. 회전목마가 돌아가듯.




다시 눈을 떴어.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어. 유리는 휴대폰을 들어 보고는 한숨을 쉬었어. 다들 늦은 오전까지 여유롭게 잠에 빠져 있을 듯해. 유리는 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았어. 그리고 노트북의 머리를 추켜올렸어. 화면이 하얗게 발광하는 동안 그는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주위를 돌아보았어. 옆자리 여사원 자리 바닥에 무언가 떨어져 있어. 피가 묻은 붕대. 어제 아침 보았던 여사원 목에 베인 상처가 떠올랐어. 백색 솜 위로 점처럼 눌어붙은 갈색 혈흔은 어떤 외침을 떠오르게 했어! 쿵-쿵 하는 큼직한 뜀박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해. 그 연속적인 울림에 유리의 심장도 뛰어. 곧이어 누군가의 비명소리 그리고 짐승들의 알아듣지 못할 낮은말들이 뒤집어 나와. 반창고는 하나의 커다란 눈자위가 되었어. 그 여자의 눈. 유리는 벌떡 일어섰어. 회사를 급히 나왔지. 바깥엔 여전히 비가 내려. 우산을 미처 챙기지 못했어. 이마에 떨어지는 물방울은 얼굴을 거쳐 입술에 고였어. 유리는 빗물을 맛보았어. 무채색 맛. 유리는 안도하며 이곳이 현실이라 했어. 지금 황급히 걷고 있는 유리 무릎은 발과 지면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냈으며 빗물 감촉이 따갑게 얼굴을 쏘아대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더운 열기가 식는 듯했어. 하늘이 어두워졌어. 태풍이 올 것 같아. 지금은 오전 열 시. 밤처럼 어두워진 공간에는 사람이 없어. 가로수길 위 미처 끄지 못한 가로등 두 개 뿐.


심해처럼 검게 변한 거리에 번뜩이는 두 빛 덩이는 유리를 노려보고 있어. 잠시 후 두 눈 아래, 검은 입이 벌려졌어! 유리를 잡아먹겠다는 듯이. 유리는 질끈 눈을 감았어. 그의 심장은 겁먹은 개처럼 계속 날뛰고 있어. 감은 눈으로 보는 세상에는 검은 물방울을 흩날리며 맹렬히 다가오는 범고래가 보여. 범은 그를 물고 송두리째 뜯는 중이야. 유리는 사지에 통증을 느끼고는 눈을 부릅떴어. 열리는 눈꺼풀. 두개의 가로등 아래.


그녀가 유리를 보고 있어!




나는, 확인할 게 있어. 눈 앞의 그녀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실제라면. 병 걸린 듯 환영을 보는 것이고. 허구라면,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거야. 벗어나고 싶어. 그녀는 내게 칼이야. 잡는 쪽이 날이든 손잡이든 중요하지 않아. 매듭을 끊어야 해. 그녀는 돌아섰어. 그리고 걸어갔지. 난 서둘러 쫓아갔어. 몸의 율동에 갸우뚱거리는 듯한 머릿결. 아름다웠지. 지금 내게 그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행인들과 부딪혀 넘어지기도 했지. 흙탕물을 뒤집어쓰고도 개의치 않았어. 부딪힌 그 사람은 미안하다며 나를 일으켜 세웠어. 오래전 본 듯한 낯익은 아저씨. 그는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 줬어. 몸 조심하라며. 내 몸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더군. 손에 쥐어진 건 작은 칼이었어. 미처 대꾸할 틈도 없이 시야에 사라지려는 그녀에게 달려갔어. 한참을 뛰었어. 그리고 그녀 손목을 잡았지. 그래. 드디어 잡았어.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랐어. 내게 손목 잡힌 채 말했지.


“아. 당신.”


그래. 낯선 여자가 아니야. 날 알아보잖아. 지금 그 여자는 온 눈으로, 온몸으로 날 응시하고 있어. 맞아. 지금 나는 흙탕물을 뒤집어쓴 채 그 여자를 상대하고 있어. 우리 처음 만난 날처럼 만신창이였지. 하지만 대수롭지 않아. 나는 그저 그런 사소한 감정들은 모두 잊은 채 그 응시하는 눈빛에 매료되었으니. 드디어, 물어볼 차례야. 난 쿵쾅거리고 있어. 가는 손목을 쥔 손도 떨리고 있지.


지금, 여기는 흑청색 아스팔트의 바다. 그리고 무채색의 빗물이 수북하게 떨어지는 곳. 바다 위에는 숙연한 가로등 불이 너와의 재회를 숙고하는 듯 조용히 울리고 있어.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나는 응시하는 그 행동 만을 쫓고 있어서, 내 몸이 보내는 어떤 신호도 지각할 수 없어. 그래서 다리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팔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어. 세상은 흑빛. 다만 이제는 밤도 마음을 비운 듯 마지막 비명을 지르더니, 옅어졌어. 다시 한번 내가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너와 내가 점점 밝아지는 이곳에서 단 둘이 그렇게 서로 마주 보고 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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