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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이영 Jun 10. 2022

이응의 우주

17. 이응과 모(1)


이응은 이응의 모의 말을 듣지 못할 때마다 자신의 마음에도 귀가 있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이응의 마음은 분명 고마운 마음인데 자신의 모의 말을 마음에 들이지 못하거나 마음의 마음이 그 말을 야속해할 때 이응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때로는 이응의 모의 마음에도 귀가 있고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응의 모 역시 자신이 말하고 말해도 듣지 못하는 것이 있는 거라고 이응은 생각했다.


“그래서 11월에는 언제 올 계획인데?”


이응은 이응의 부를 만나러 본가에 내려가지 않은 지 아홉 달이 되었을 때, 아주 오랜만에 이응의 자의로 부에게 전화를 걸어 11월 중에 한번 집에 내려가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실로 9개월 만이었다. 2월에 자신의 부와 그 일이 있고, 9개월이 지나서야 이응은 -여전히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약을 받아먹고 있는 지금이라면 비교적 노력을 덜 들여- 부의 눈을 보고 자신의 생에 걸쳐 일어난 일들을 차분하게 꺼내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서라도 아홉 달은 필요했다. 적어도 아홉 달은 필요했다. (물론 이도 이응에게는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어서 몇 달을 불면에 괴로워했지만 말이다. 밤에 미친 듯이 불안에 떨고, 재수가 없는 밤이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 생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렸지만 말이다.) 아홉 달이 지나고 이응은 그래도 이전의 날들과는 다르게 ‘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응은 용기를 내어 부에게 집에 한번 내려가겠다고 말을 꺼냈던 것이었다. 이응의 목적은 하나였다.  

‘아빠에게 말을 해야 한다. 아빠와 말을 해야 한다!’     

이응이 기억하는 과거 동안, 왜 근 10년 넘게 자신이 우울했고, 왜 5년 동안 격렬하게 자신을 죽이고 싶은 불안에 떨었으며, 그래서 왜 2020년 열 달 동안 굳이 그런 돈을 들여가며 상담을 받았어야 했는지 이응은 자신의 부에게 말을 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응의 생각에 이응의 부는 이응의 삶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응의 눈에 이응의 부는 이응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는 사람이라기보다 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딸의 인생을 바라보는 사람에 가까웠다. 그래서 이응은 이응의 부가 이응이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라왔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이응이 겪어 온 것들을 가리켜 그까짓 것이라고 칭했을 때 그렇게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마음이었다.


11월에는 언제 올 계획이냐는 모의 말에 이응은 최근 조부가 편찮아지셔서 모와 부가 돌아가며 병간호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이번에는 내려가는 게 어렵지 않겠느냐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조부가 입원을 하셔서 모와 부가 돌아가며 병원에서 병간호를 하고 자고 오는 상황이라면, 이응은 자신이 내려가 자신의 욕심대로 이야기를 하고 오기엔 때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자신이 내려가면 필연적으로 모와 부, 모두에게 불편한 이야기를 하게 될진대, 그래서 당신들이 심적으로든 체력적으로든 멀쩡한 상태에서도 듣기 힘든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게 될진대 이응 자신은 당신들이 그 이야기를 잘 들어줄지에 아주 회의적이라고 말을 이었다.


“그 이야기를 안 하고 왔다 갈 수 있잖아.”


되돌아온 모의 말에 이응은 말문이 막혔다. 이응은 이응의 모가 분명 안다고 생각했다. 이응은 이응의 모가 이응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을 때가 되면 자신의 부를 만나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응이 이응의 모에게 꽤나 여러 날에 걸쳐 여러 번 이야길 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응 자신이 9개월이 다 되도록 여전히 그날을 떠올리며 괴로워하는지, 왜 자신의 부와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렇게 두려움에 떠는지, 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아주 격렬하게 불안하고 우울해하는지, 왜 시간이 흐를수록 잠에 더 못 드는지. 하지만 몇 번이고 말한 것들이 이응의 모 앞에서는 매번 낯선 이야기가 되었다.

분명 며칠 전에도 이응은 모와 전화를 하며 말을 했다. 자신이 집에 계속 가지 못하고 있는 건, 자신의 부와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거나, 같은 상에서 밥숟갈을 들거나, 단 둘이 차에 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이게 단순히 삐지고, 토라지고, 심통을 부리는 게 아니라 그날에 절망하고, 좌절한 것을 여전히 회복하고 있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부에게 화가 난 거고, 아주 실망을 한 거라고 이응은 스스로의 입을 통해 뱉어내면서도 괴로운 단어들을 쏟아내며 자신의 모에게 말을 했었다. 그렇지만 그 전화와 그 말은 이응의 모에게 수많은 그저 그런 전화와 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이응의 모는 너무 쉽게 말을 했다.

이응은 모가 자신에게 한 말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응은 모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종종 원점으로 돌아오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럴 때마다 이응은 그건 이응의 모의 마음의 마음이 그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곤 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을 이번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이응은 자조했다. 이응은 스스로가 아주 우스워졌다고 느꼈다.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영원히 상처 입는다고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을 달리 표현할 의지가 없어진 이응은 한숨을 쉬며 말을 했다.

“그럼 나한텐 가는 게 의미가 없지. 내가 내려가려는 건 아빠와 이야기를 하려고 내려가는 건데, 그 이야기를 못한다면 집에 내려가는 게 나에게는 의미가 없지….”

이응의 말의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이응의 모는 다시 한번 더 이응의 마음을 할퀴었다.


“11월이야. 2월부터 한 번도 집에 안 왔으면 9개월인데, 그 정도면 시간 끌만큼 끌지 않았어?”  


시간을 끌만큼 끌었다라. 저건 또 무슨 말이지…? 이응의 기억 저편으로 몇 번을, 실로 몇 번을 울분을 토해가며 말을 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응의 머리에는 몇 번이고 스쳐 가는 기억들이 이응의 모에게는 단 한 번도 스치지 않는 듯했다. 이응은 내쉬는 한숨에 다시 차분해졌다. 그날 부의 차 안에서 차분해졌던 것처럼 이응은 차분해졌다. 역시 일종의 포기 같은 것이었다.

‘아빠는 고사하고 엄마도 못 듣고 있었네. 내려가 이야기를 해도 나는 또 벽에다 이야기를 하는 꼴이 되겠구나.’

이응은 포기했다.

“시간을 끌만큼 끌었다라…. 그게 엄마한테 시간을 끈 걸로 보였다면 나는 참…. 참…. 안타깝네. 그게 시간을 끈….”

이응은 수번을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나는 단순히 삐지고 토라진 게 아니다. 화가 난 거고, 충격을 받은 거다. 고집을 부리면서 집에 내려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가는 거다. 그게 시간을 끈 것처럼 보였다니, 엄마에게 몇 번을 말했는데 그게 엄마에게는 안 보이고, 안 들린다니 참…. 안타깝네….

이응의 모는 한숨을 쉬었다.


“또 엄마가 딸내미 마음을 모르고 말했네. 미안하다. 미안해.”


그 말마저 이응의 귀에는 일종의 비아냥으로 들려왔다. 이응은 포기했다. 이응은 그게 누구든(부든 모든) 관계를 회복할 마음을 포기했다. 포기가 되었다. 그래서 이응은 평소처럼 시시껄렁한 말들이나 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그런 딸로 돌아가 웃으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곤 괴로워했다. 낮이고 밤이고 이응은 괴로워했다. 때로는 서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고, 때로는 벽에 기대어 괴로워하다가 주저앉았다. 침대에 쓰러져 괴로워하다가도 잠에는 들지 못하는 밤이 반복되었다. 불면의 밤들이 쌓여갈수록 차라리 다행이라 느끼는 것들이 생겼다. 그건 일종의 포기의 마음에 가 들러붙었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멍하게 보냈다. 이응의 몸은 그저 우울과 불안을 받아내기만 하면 되는 유기체로 전락했다. 그런 이응에게 생각은 사치가 되었고, 그 사치조차 부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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